김종관 감독의 <조금만 더 가까이>는 설레고 아름다운 연애의 처음이 아니라, 심술궂게도 들여다보기 싫은 끝을 파헤치는 작품이다. 옴니버스로 구성된 영화에서 윤계상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 출연한다. 이미 헤어지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찾아온 전 여자친구. 윤계상이 맡은 ‘현호’는 집착으로 자꾸 자신을 다그치는 여자를 향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다. 갈팡질팡하는 현호의 마음처럼, 이 역할은 정확한 답이 없는 만만치 않은 연기다. 심리적 거리로 따지자면, 현호는 지금까지 윤계상이 맡은 필모그래피 중 카메라가 가장 그의 얼굴 가까이 접근한 경우다. 집요한 카메라의 시선 앞에서 그는 지난 7년간 연기자로 거쳐온 시행착오와 깨달음을 통해 수렴된 단 하나의 답안, 꽤 바람직한 윤계상식 연기를 선보인다.
-김종관 감독에 따르면, 개런티도 못 주고 제작비도 넉넉지 않은 터라 설득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먼저 대뜸 수락해 놀랐다고 하더라.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처한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조금만 더 가까이>는 지난해 가을쯤 시나리오를 받았는데, 마침 사랑에 대한 생각이 많던 때였다. 나이가 들어서 사랑이라는 걸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 누굴 만나도 재미도 설렘도 없던 그런 찰나에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보니 내가 예전에 헤어진 연인이 떠올랐다. 다시는 보지말자, 힘들다 하면서 이 상황을 벗어나자고 헤어졌는데, 뒤돌아보니 헤어질 때의 감정이 그립더라. 그것 또한 사랑이더라. 그 감정을 풀어낸 게 이번 영화였다.
-정유미씨가 연기하는 ‘은희’가 발산하고 내지르는 역할이라면, ‘현호’는 정반대다. 상대의 연기를 받아주고 받쳐주는 연기라 무척 까다롭고, 반면 생색내기에 곤란한 연기다.
=난 별로 한 게 없다. 그런 면에서 유미한테 놀랐다. 이 사람은 감각적으로 타고난 배우더라. 리액션이 나올 수 있게 상대를 몰아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받아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소통을 통한 연기를 원하더라. 총 촬영분량이 이틀밖에 안됐고, 유미는 촬영 전날 만나서 사실 영화를 찍긴 했지만 서먹한 편이다. 끝나면서, ‘이제 우리 다음엔 말 놓자’ 이 정도는 친해졌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꼭 같이 하고 싶다.
-상대 배우의 공으로 다 돌리기엔, 받아주는 본인의 연기도 칭찬할 구석이 많다.
=난 원래 작품을 모니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한번 정도 보게 되는데, 그때 느꼈던 모든 것이 날 놓게 만들었다. 저게 아니구나, 너무 오버했구나, 싶은 부분이 보이더라. ‘배우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연기를 해야 할까?’라는 물음에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에 이 작품을 만났다. 너무 애쓰지 말자 했다. 내가 이렇게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모습이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부담없이 연기했다.
-드라마 <로드 넘버 원>이 가장 최근작이라 그런지, 장르에서 정석의 연기를 하던 군인 ‘신태호’의 모습이 보인다. 연기 커리어 중 가장 강한 이미지를 소화했었다.
=연기의 성향이 작품을 하면서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달랐다. 많이 의식했고, 내가 가진 기존 이미지를 깨기 위해 표정도 과장되게 했다. 나는 그동안 드라마와 영화를 병행해왔는데 드라마가 아직 보여주는 연기를 요구한다면, 영화는 자연스럽고 현실감있는 연기가 대세다. 처음엔 둘 다 하자니 고민이 많이 되더라. 영화에서 하던 연기를 드라마에서 선보이면 ‘너무 밋밋하다’고 하고, 영화 찍으면서 드라마처럼 연기를 하니 기술적인 연기라 감정이 없다고 평가받았다. 난 잘하고 싶은데 혼선이 생긴 거다. 지금은 둘 사이의 균형을 스스로 찾아낸 것 같다. 감독님 말씀에 무조건 네네 하는 대신 이제 나를 악기같이 다뤄보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생각한다.
-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차별점이 무엇인가. 윤계상이라는 배우의 가장 큰 장점이 평범함이라면, 그게 또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연기 중 뭐가 안 좋다고 하면 다 완벽하게 새로 맞추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하게 하자면 50년은 걸리겠더라. 그런데 연기 잘하는 배우들 보면, 다들 훌륭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건 아니다. 자신이 진짜 잘하는 걸 알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답이 있다.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연기가 있어야 한다. 난 밋밋해 보이지만, 내가 가진 얼굴 때문에 결국 달라 보일 거다. 웃을 때 한쪽만 표정이 나온다든지, 화가 나면 눈을 작게 뜬다든지, 소리 지를 때 목을 비트는 것 모두 다른 배우에게 없는 나의 특징이 될 수 있다. 그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려 한다. 지금은 내가 생각한 연기의 10% 정도 왔나 싶다.
-군대 간 2년을 제외하면, 배우 생활만 5년차니 연기자로는 적지 않은 경력이다.
=처음엔 스스로 연기 너무 잘한다, 천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잠깐 한 건 디렉팅과 편집 모든 게 받춰져서 그런 거였다. 한 꺼풀 한 꺼풀 벗기다보니 내 바닥이 보이더라. 이 세상에 연기를 못하는 사람은 없다. 본인이 경험한 걸 근거로 감정을 끌어낸다면 누구나 그 상황에 빠져들 수는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이 일차적인 상황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한다. 연기로 관객에게 울림을 주려면 자기를 깨기 위한 무수한 노력을 해야 한다. 무척 추상적인 이야기인데, 자꾸 하다보니 느껴지더라. 인정받겠다느니 하는 잡생각도 다 떨쳐야 한다.
-무대 위에서 최고의 자리를 경험한 스타였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떨치는 건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3년 전까지는 나도 그런 고민에 굉장히 시달렸다. 일부러 상업적인 작품을 선택한 적도 많았다. <로드 넘버 원>만 해도 모든 것이 갖추어진 대작이었고 성과도 기대했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그런 성공은 운도 따라야 하고, 남을 탓할 일은 아니다. 난 노력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웃음) 그래서 괜찮다. 이 작품이 잘 안돼서 다음 작품이 끊긴다면 정말 큰일이지만, 난 여전히 일을 하고 있지 않나. 예전에 한 선배가, “괜찮아. 작품이 성공하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이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어”라고 충고를 해주는데, 그땐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래도 1등 해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은 배우로 봐주는 사람들도 생기고, 감독님들도 내 의견을 존중해주신다. 내 필모그래피가 헛된 게 아니다 싶더라.
-처음 <발레교습소>에 출연하고 연기자로 전향했을 때는 그야말로 영화계의 루키였다. 그룹 god의 유명세도 분명 한 몫했는데, 군대를 가면서 맥이 끊어졌다. 제대 뒤 색깔을 찾기 위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한방’은 없었다.
=그룹생활의 인지도 때문에 난 과분한 기회를 가졌다. 나보다 더 연기 잘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게 주어진 기회는 정말 큰 행운이고 고맙다. 군대 가기 전까지 시나리오도 많이 들어오고 많이 찾아주었다. 군대 때문에 이 일을 중단해야 한다 싶으니 아쉽고 속상한 마음도 컸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느님이 계신다면 날 좀 훈련시키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때 칭찬받고 연기했다면 스타는 돼 있을지 모르지만, 배우는 되어 있지 않을 것 같다. 뭐든 잘되면 장점만 부각되고 뭘 잘못한지 모르는 체 잘한 것만 보고 살게 된다. 생각한 만큼 성과가 없으니 난 계속 고민하게 되고 더 노력하게 된다. 연기 오래할 생각이니 이게 오히려 내게 약이 된 것 같다.
-첫 형 집행을 맡고 고뇌에 시달리는 사형집행관 <집행자>의 ‘오재경’으로 윤계상 특유의 섬세한 연기를 찾은 것이 돌파구가 됐다.
=<비스티 보이즈> 때 많이 좌절했었다. 군 생활 2년 동안 남들은 잊었지만 나는 연기를 쉬지 않았다. 표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연기를 연습했고, 그 노력을 다 쓴 게 <비스티 보이즈>였다. 그런데 그 작품이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 마음이 많이 다쳤다. 그때 드라마 <트리플>이 들어왔는데 주연이 아니더라. 그때부터 부담을 덜어내고 마음껏 해보자 싶었다. 다 잘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시청률은 잘 안 나왔다. 그렇지만 내겐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돼준 고마운 작품이다. 내 안에서 뭔가 정의되고 확립되는 것들이 생겼다. 그리고 <집행자>를 만나면서 그 마음들이 반영됐고, 자신감도 얻은 것 같다.
-친한 장혁이 주야장천 연기 이야기만 하는 걸 보며, 연기가 뭐기에 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했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같은 모습이다.
=혁이 형의 그 마음 때문에 연기에 대해 진지하게 다가갔다. 나도 잘하고 싶었고 막연하게 1등이 되고 싶었다. 연기자로서 누군가에게 ‘윤계상씨 연기 보고 감동했습니다. 팬입니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시작했다.
-지금의 정체성은? ‘뮤지션 출신 배우’가 아니라 바라던 대로 ‘배우인데 한때 뮤지션 생활을 했다’고 평가받게 된 건가.
=물론! 지금은 배우다. 그룹생활 땐 순수하게 내가 아닌, 다른 멤버들 때문에 덤으로 인기를 얻는 것 같은 미안함이 있었다. 연기를 하면서 제로에서부터 시작했다. ‘윤계상’ 본인으로 출발한 거다. 그래서 힘들어도 성취감이 크다. 요즘 아이돌들 정말 대단하다. 2NE1 한번 보고 사인받는 게 소원이다. (웃음) 타고난 기질과 연습이 합쳐지지 않고선 할 수 없다. 모두가 존경스럽다. 나같이 재능없는 사람이 지금 데뷔하면 다들, ‘너 나가!’ 할 거다. (웃음) 어쨌든 우리 멤버들이 모두 다 각자 위치에서 잘돼서 기분 좋다.
-차기작 소식도 들린다.
=전재홍 감독의 <풍산개>에 ‘풍산’ 역할로 캐스팅돼서 다음주부터 촬영 들어간다. 지금까지 했던 내 모든 캐릭터와 완전히 상반되는 아주 동물적인 역할이다. <나쁜 남자>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로드 넘버 원>에서 보여준 남성적인 이미지를 좀더 발전시킬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발설할 수 없다. (웃음)
-<조금만 더 가까이>가 이제 개봉한다. 이번엔 흥행해야 하지 않나. 첫주부터 교차상영 소식이 들려서 안타깝긴 하지만.
=아유. 아니다. <조금만 더 가까이>는 개봉하는지도 몰랐다. 감독님 단편이 좋아서 했고, 시나리오 보고 더 좋아서 한 거고. 갑자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고 참석해달라고 해서 잘됐네 했다. 개봉도 한다니 더 좋은 거다. 솔직히 대중영화는 아니지 않나. 흥행을 기대하고 선택했다면, 이 영화는 안 했을 거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