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마법의 부사
2010-11-19
글 : 윤성호 (영화감독)
나에게 ‘두근두근’이란 무엇일까

몇주 전 한 모임에서 받은 질문. “당신이 만드는 작은 단편들마다 ‘두근두근’이라는 수식이 앞에 붙는데 그렇다면 당신에게 ‘두근두근’이란 무엇입니까?” 관객과의 대화에서 종종 나오는 주문- 모두 익히 알고 쓰는 어휘를 새삼 정의하길 바라는- 이다. 대개는 연애, 영화, 독립, 정치 등등의 보통명사를 고유한 방식으로 서술해달라는 주문을 받곤 하는데, 나라고 고유할 게 뭐 있을까. 그냥 그 시간 그 장소의 지형지물과 분위기를 적당히 인용 또는 응용해 웬만한 말장난을 내밀면- 가령, 자리가 절반 정도 차 있는 극장에서 “사랑은 시네마테크의 객석이죠, 군데군데 비어 있지만 그 사이를 분명 메우고 있는 얼굴과 사연들” 요런 식으로- 청중도 하하호호 할인해주고, 나도 빙긋빙긋 자족하며 문답은 적당히 마무리. 그런데 제시어의 품사가 바뀐 것만으로 적이 당황스럽다. 두근두근…. 그러게, 뭘 그렇게 두근두근거리며 살았다고 그 4음절을 앞에 죄 붙였지? 만든 순서대로, 두근두근 배창호, 두근두근 시국선언, 두근두근 영춘권 등등. 삼성 캠페인의 영향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조정린과 정시아가 나오던 시트콤이 있었지. 아니면 현진영의 히트넘버?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무슨 일본 만화의 제목이나 어떤 도서의 챕터로서 ‘두근두근 000’라는 조합을 이미 숱하게 접했을 듯도 하다.

왜 그 4음절을 단편들 앞에 죄 붙였지?

정리하면, ‘두근두근’은 그 뒤에 올 명사(名詞)에 없던 리듬감 + 어쩌면 좋은 사연이 이어질지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부여하는 마법의 부사. 개인적으로는, 시간상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충분히 배열하기 어려운 소소한 콩트의 제목에 저 수식을 붙이면 시작 전부터 기-승이 진행된 듯 고마운 오독을 불러일으키는, 그러니까 별 콘텐츠 없는 식단을 위한 ‘맛선생’의 향기 같은 거, 별 세간 없는 복층 다락을 위한 귀여운 사다리 같은 거. 내게 ‘두근두근’은 그런 페이크의 경로.

좀더 보편적인 정의를 해보자. 유산소운동 없이도 두둥거리는 심장의 의태어(그런데 우리 마음속 소리를 들킨 듯하여, 어쩌면 의성어)로서 ‘두근두근’. 중요한 시험을 볼 때 ‘조마조마’하는 마음, 무서운 영화를 보다 심장이 ‘덜컥’할 때가 있고, 수줍은 사람이 청중 앞에 서면 심장이 ‘쿵쿵’거린다. 이중에서도 ‘두근두근’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기대하던 일의 성사를 앞두고 묘하게 활발해지는 신진대사에 대한 보편의 감탄이고 묘사- 비슷한 말로 ‘콩닥콩닥’이 있는데 이것보다는 ‘두근두근’이 좀더 두툼한 표현 아닐까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다 두근거리는 것도 아니다. 부모와 한집에 사는 자녀들의 귀가가 설레는 무엇이 되긴 힘들다. 매일 보는 단짝 친구를 만나면서 가슴이 콩닥거리는 사람도 드물다. 즉 ‘두근두근’은 친근한 상대보다는 새로이 만남을 시작하는 누군가를 전제한 부사다. 그리고 오르지 못할 나무보다는 어쩌면 오를 수도 있는 나무, 즉 현실에서의 성사 가능성을 전제한 부사다(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따라서 ‘두근두근’대는 마음은 오래 갈 수 없다. 새로운 만남은 언젠가 낡은 관계가 되게 마련이고, 가능성에 대한 설렘은 그 일이 정말 성취된 뒤에는 평정심으로 착지한다. 가령, 아다치 미쓰루 만화 속 문득문득 귓불이 빨개지던 소년 소녀들도 결국엔 편한 호흡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 거다(이 일본의 중견은 그런 단계로의 진입이 싫은지 주인공들이 결합할 기미가 보이는 순간 연재를 멈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연재를 멈출 수 없기에 내 마음이 정말 ‘그냥 내 마음’이 되어버린 아쉬움 ‘아, 나를 다시 두근거리게 할 그런 상대가 또 어딘가 있을 텐데’ 하는 괜한 맘을 가슴속 폴더의 폴더 속에 넣어둔 뒤 ‘숨김 파일 및 폴더 표시 안 함’ 설정까지 해둬야 할 때가 있다. 그게 안전하다. 그리하여 이제는 편안해진 그/그녀와 상온의 만남을 지속할 때 우리는 ‘두근두근’보다는 ‘토닥토닥’ 같은 부사와 친근해져야 한다. 내 심장보다는 상대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마음.

그러나 처음 왕래하던 시절의 밭은 호흡이 같은 상대에게 재연되는 경우의 수. 함께 세월을 보내면서도 몰랐던 그/그녀의 좋은 면모를 보물찾기하듯 알게 되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들. 하나 대개는 인연이 끝난 뒤에야 상대의 값어치가 새삼 매겨져서, 그래서 혹 그 인연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가능성을 타진하며 애태우는 나날의 두방망이질인 경우가 많다. 내가 왜 저 소중한 상대를 그리 평정심으로 대했던가, 아니 그냥 평정심으로나마 함께했으면 좋았을 사람을 기어코 미지의 가능성과 트레이드하고 후회하는가 하며 리바이벌을 꿈꿀 때. 아주 작은 회생의 가능성에도 마음은 아프게 두근거린다. 옛사람들은 ‘애가 끓는다’는 더 강한 표현을 썼는데 지금보다 만남의 기회가 적기에 사연도 더 간절했을 것이다. 허나, 아이폰과 3D의 시대라고 해서 사랑이 없겠는가. 서울 골목 철없고 캐주얼한 연애에도 회한과 사연은 넘쳐나게 마련. 지금도 어느 모퉁이에서 연인 중 남겨진 한명이 낯익은 (이제 낯설어지기 직전인) 얼굴을 기다리며 바짝바짝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 두근두근 바르다 할머니

다만,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너와 나의 이야기’들은 왠지 예전의 전통적인 ‘봄-여름-가을-겨울-봄’의 플롯으로는 적절히 설명될 수 없을 것 같다. 자기가 보고 온 풍물을 얘기하는 (공간을 경유하는) ‘선원’ 같은 이야기꾼이 있고 자기가 살아온 고장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풀어놓는) ‘농부’ 같은 이야기꾼이 있다면 요새의 우리는, 틈틈이 커뮤니티를 옮기되 그 로테이션은 친숙한, 그런 ‘유목민’ 같은 이야기꾼을 필요로 한다. 자, 그럼 디지털 시대의 어떤 젊은 작가가 그런 노마드 서사의 전형을 보여줄 것인가.

엉뚱하게도 (어쩌면 필연적으로) 노장에게서 그 가능성을 발견한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창인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회고전. 대중적인 장편으로 입지를 굳힌 뒤에도 꾸준히 발설한 단편들, 자족적인 에세이를 쓰는 듯하면서도 그 안에서 놓치지 않고 있는 다른 이웃들의 사연. 딸의 급우인 14살 남자아이에게 그만 마음이 두근두근해버린 중년의 여성(<아무도 모른다>)의 역정을 우리가 구경거리라 생각할 만한 ‘사건’을 전시하지 않고도 정서적으로 풀어내며,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애정과 응원을 그들의 인증 사진과 제3자의 보이스오버만으로 지금의 어떤 퀵타임 파일보다 ‘넌리니어’한 포임으로 완성한다(<안녕 쿠바>). 실시간이라는 형식 실험에 취하지 않은 채 도회여성의 위태롭고 기적적인 하루를 대중영화로 선보이고(<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여자 팔불출의 시선으로 쓰다듬지만 예술가연 놀음이 아닌 보편의 가락으로 디민다(<낭뜨의 자코>). ‘이 얘기가 흥행이 될 것 같아요’, ‘이 형식이 나를 띄워줄 거예요’가 아닌, 이 사람이 예쁘고 저 마음이 궁금해서 종횡으로 담아놓은 아녜스 바르다의 필름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작가는 기획된 신도시를 조마조마하게 묘사하는 새 시대의 가짜 전령이 아니라 자신과 지인들의 삶 자체를 두근두근 겪어낸 아녜스 바르다 할머니처럼 여행할 줄 아는 농민, 머물 줄 아는 유목민 아닐까.

* 이 원고에는, 필자가 다른 매체에 기고한 글을 ‘우라까이’한 단락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라까이’의 정의는 그 어휘를 알려준 김도훈 기자에게 패스.

일러스트레이션 이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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