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안현진의 미드앤더시티] 촌스럽고 정다운… 어떤 ‘지옥’
2010-11-19
글 : 안현진 (LA 통신원)
여자 셋과 할머니의 기묘한 동거담, <핫 인 클리블랜드>

사람들은 떠남을 전제로 쉽게 질문을 던진다. 여행을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어? 여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살게 된다면 어디가 좋겠어? 노래방에서 첫곡을 고르지 못해 노래책을 뒤적이는 나이지만, 이런 유의 질문에는 의외로 일관성있게 대답해왔다. 파리! 엄청나게 나쁜 기억이 없다면, 여자들에게 파리는 그 존재만으로 설명이 되는 도시다. 동일 순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뉴욕을 사랑해 마지않던 캐리 브래드쇼(<섹스&시티>)도 파리로 떠나자는 연인의 제안에 설렘 가득 안고 가방을 꾸렸듯이 말이다.

그리고 여기,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세 여자가 있다. 시트콤 <핫 인 클리블랜드>의 주인공들이다. 일일드라마에 27년간 출연했으나 쇼가 취소되면서 캐스팅 콜만 기다리는 신세가 된 여배우 빅토리아(웬디 말릭), 연예인 전문 스타일리스트 조이(제인 리브스), 그리고 <여자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200가지>라는 자기개발서를 출판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전업 주부 멜라니(발레리 버티넬리)는 일등석에 앉아 샴페인잔을 부딪히며 ‘여자친구들만의 여행’을 자축하는 중이다. 후회만 남은 결혼생활을 정리한 멜라니는 하고 싶은 200가지 중 112번째인 “친구들과 파리로 여행가기”를 실천하려고 마일리지까지 그러모았다. 한데 비행기가 미국 하늘을 미처 벗어나기도 전에 난기류가 닥쳐 세 친구의 파리 여행은 산산조각이 난다. 그것도 하필이면 클리블랜드에서.

우연한 하루,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이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한다면 내 모든 허영을 버리겠어!” 허공에 헛된 약속을 했던 빅토리아와, 비슷하게 울부짖었던 친구들은 이 악몽에서 벗어나려고 바를 찾는다. 그런데 그곳에서 세 여자는 천국을 만난다. 신문을 읽으려면 안경이 필요한 40∼50대 언니들, LA에서는 뒷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클리블랜드에 오니 상종가를 치는 것이 아닌가! 들어서기 무섭게 꽂히는 끈적한 시선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곧 추파를 즐기며 이렇게 말한다. “우린 지금 남자들이 자기 또래의 여자들에게 추근대는 이상한 세상에 온 거야.” (조이) “그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서 10년 젊게, 10파운드(5kg) 날씬하게 보이려고 했는데, 그냥 클리블랜드에 오면 되는 거였다니!”(빅토리아)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만끽한 클리블랜드에서의 하루는 멜라니를 충동적인 결정으로 이끈다. “클리블랜드에서 좀 살아볼래. 파리에서 로맨틱코미디 같은 사랑을 찾으려던 건데, 여기서 찾았지 뭐야.” 물론 그 사랑은 시작도 못해보고 바로 끝이 났지만, 그래도 멜라니는 클리블랜드에 기회를 주기로 하고 커다란 집도 임대한다. 당장 일거리 없는 빅토리아와 조이도 친구 곁에서 이 수상한 도시를 즐기기로 한다. 한데 멜라니가 빌린 저택에는 따라오는 덤(짐)이 있었으니, 바로 엘카라는 폴란드 출신의 80대 관리인이다. 세 여자를 보자마자, “왜 창녀들한테 집을 빌려줬어!”라고 호통을 치는데도 미워할 수 없는 이 귀여운 할머니는, 미국 TV쇼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아이콘인 베티 화이트가 연기한다. 올해 88살이 된 노장 베티 화이트의 출연은 장안의 화제였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핫 인 클리블랜드>와 화이트가 1980년대에 출연했던 시트콤 <골든 걸스>를 비교하곤 한다. <골든 걸스>는 마이애미의 한집에 모여 사는 할머니들의 일상을 그린 TV시리즈로, 좀 ‘젊은’ 세대로 연령대가 이동하고 장소가 클리블랜드로 바뀐 격이기 때문이다.

<핫 인 클리블랜드>는 재방영을 주력 프로그래밍으로 설립된 케이블 네트워크 <TV랜드>에서 처음 제작한 오리지널 시트콤이다. <윌 앤 그레이스>를 만든 숀 헤이스와 <프레지어> <엘렌>의 수잔 마틴이 제작자인데, 이런 이유로 <핫 인 클리블랜드>에 대한 평가는 ‘고전적인 코미디’ 쪽으로 수렴된다. 촬영도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했다. 방청객이 꽉 찬 라이브 스튜디오에서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원해 촬영한 뒤 편집하는 방식으로, 박수소리와 웃음소리를 비롯해서 키스장면에서의 나지막한 한숨 등 관객의 생생한 반응이 그대로 담겼다. 이 방식의 장점은 캐릭터가 한번 완성되면 그 배우가 등장하기만 해도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다는 건데, <핫 인 클래블랜드>에서는 베티 화이트가 그 주역이다. “20대에는 남자를 위해, 40대에는 성공을 위해, 80대에는 화장실을 위해 옷을 입는다”며 언제나 트레이닝복 차림인 이 할머니는 촌철살인의 한마디와 뒤통수치는 개그로 빵빵 터뜨린다.

죽음보다 못한 장소?

야구선수 추신수가 클리블랜드에서 활약했다고는 하지만, 스포츠 전반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름뿐, 실제로 이 도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NBC> 시트콤 <30록>에서 소재로 다뤘기 때문이다. 24시간 터지는 방송국 사건사고를 뒷수습하다 지친 리즈(티나 페이)는 남자친구와 클래블랜드행 버스에 오른다. 지리상으로 뉴욕에서 멀지 않은 그곳에서 리즈는, “혹시 모델이 아닌가요? 당신 심각하게 말랐군요, 좀 먹어야겠어요”라는 찬사를 듣는다. 생활의 척도가 뉴욕과 판이함을 아이러니하게 비꼬았지만,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친절하고, 음식을 먹으며 칼로리를 계산하는 스트레스도 없다. <핫 인 클리블랜드>가 그려낸 도시의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편안하고 푸근한, 그러나 덜 발전되고 덜 세련된 이미지, 다시 말하면 촌스럽고 정다운 이미지다.

사실 클리블랜드는 천국보다는 지옥에 견주어진다. “죽음보다 못한 장소”, “이리호(Lake Erie)의 실수”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이 도시는, 2010년 2월 <포브스>가 실시한 “미국에서 가장 비참한 도시”라는 순위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조사항목은 고용, 세금, 기후, 경영 등을 포함해 9가지였는데, 클리블랜드가 모든 항목에서 바닥을 쳐 멤피스, 디트로이트 등 차점자가 따라올 수 없는 큰 격차를 벌였다고. 오명의 역사는 유구하다. 1969년이 마지막이지만 도시의 수맥인 카야호가 강은 오염 때문에 잦은 화재사고를 유발했고, 암울했던 대공황 극복 뒤 다시 빚더미로 돌아간 최초의 도시가 되어 세율은 자연히 높아졌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머물기보다는 떠나고 싶은 장소가 됐다. 2000년 실시한 센서스 결과에 따르면, 50년 전과 비교해 거주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최근 5년 동안 7만1천명이 이 도시를 등졌다. <핫 인 클리블랜드>의 세 손님이 뉴스거리가 되는 것도 이런 배경을 알고 나면 개연성있는 설정이다.

멜라니는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격으로, 괜찮은 남자 피트를 만났다. 물론 유부남과의 원 나이트 스탠드도 겪고, 전남편과 잘해볼까 잠깐 고민도 하고,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 남자와 소개팅도 하고, 엘카와 더블데이트에 나갔다가 85살 노인의 산소마스크로 기분전환을 하는 등 시행착오가 있긴 했다. 자꾸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핫 인 클리블랜드>는 좀 늙거나 현실적인 <섹스&시티>일지 모른다.

시즌1의 파이널 에피소드는 폭풍우 치는 클리블랜드의 하루를 담았다. 그날, 전기도 전파도 없는 지하실에 대피한 네 여자는 각기 다른 이유로 마음을 졸인다. 악천후 때문에 에미 시상식에 가지 못하는 빅토리아는 술만 들이켜고, 조이는 10대 시절 입양 보냈던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답장을 하지 못해 애를 태운다. 태풍에 겁이 난 멜라니 역시 만난 지 얼마 안된 피트에게 “사랑해”라고 말해놓고 혹시 민망한 행동을 한 건 아닐까 안절부절못한다. 시즌 내내 ‘경찰’이라는 단어에 수상하게 반응했던 엘카도 태풍이 지나가야 자신의 비밀도 안전할 걸 알고 조바심을 낸다. 결국 시즌1은 엘카의 체포장면에서 다음을 기약하는 ‘클리프 행어’로 막을 내렸다. 2011년 1월 방영 예정인 시즌2는 에피소드 편수도 두배로 늘어난 20편으로 구성된다고. 여자 셋과 할머니의 기묘한 동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적어도 그들에게만큼은 클리블랜드가 천국에 가깝게 기억될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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