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선택은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화부)가 예정대로 조희문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을 해임했다. 조희문 위원장은 전임 강한섭 위원장과 마찬가지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불명예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해 9월 영진위 위원장이 된 지 14개월 만의 일이다. 문화부는 “2010년 상반기 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 심사 등과 관련해 조희문 위원장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등 관련 법령을 위반했다”면서 이처럼 결정했다. 11월5일 조 위원장의 청문회를 실시한 것과 관련해 문화부는 “추가로 고려하거나 반영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절차를 종결하고 해임을 확정했다”고 덧붙였다. 조희문 위원장의 해임에 따라 영진위는 새 위원장을 뽑을 때까지 김의석 부위원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된다.
조희문 위원장의 발목을 잡은 건 잘 알려졌듯이 지난 5월에 있었던 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 심사 개입이다. 문화부가 처분사전통지서에 명시했듯이, 조희문 위원장은 “5월14~15일경 독립영화제작지원 사업 1차 심사 기간 중 프랑스 칸에서 국제전화로 심사위원 총 9명 중 5~7명에게 ‘내부조율’ 등의 언어를 사용하며 <꽃파는 처녀> 등 특정 작품을 거론해” 물의를 빚었다. 당시 문화부 신재민 차관은 조 위원장에게 ‘유감 표명 이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자진사퇴를 요구했고, 이어 영화계 제 단체들 또한 국민권익위원회에 부당하게 직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조 위원장을 신고했다. 하지만 조희문 위원장은 문화부와 영화계 안팎의 비난 여론에도 버티기로 일관했고, 이후 6개월 동안 조 위원장의 거취 문제는 영화계 바깥에서까지 끊이지 않는 논란의 대상이 됐다.
문화부는 이후 조희문 위원장에 대한 시비가 일 때마다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신중하게 처리하겠다는 말만 강조했다. 허언은 아니었던 듯하다. 문화부의 양해(?)가 없었다면 영화인들의 신고를 접수한 국민권익위원회가 실제 조사에 착수했을지는 의문이다. 결국 8월24일 국민권익위원회는 문화부에 “특정 접수 작품을 강요한” 행위가 일부 ‘공직자 행동강령’ 위반에 해당한다는 판단을 내놓았다. 새 문화부 장관으로 내정됐던 신재민 전 차관이 낙마하고, 유인촌 현 문화부 장관이 유임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조 위원장에 대한 논란 또한 묻히는 것 아닌가 하는 예측도 있었다. 하지만 국정감사에서 조 위원장이 화를 자초하면서(<씨네21> 774호 국내뉴스 ‘조희문 영진위원장 국감에선 레드카드’) 비난 여론이 다시 급증했고 결국 문화부로선 칼을 빼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보다 중요한 건 정책
문화부와 현 정부를 상대로 자신을 해임하면 이적행위라는 내용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던 조 위원장의 해임 결정 직후 기자회견에 대해서도 영화인들의 비난이 높다. 조 위원장은 11월8일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고 이념적 편향에 젖은 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훼손하려는 영화인들의 편에 서야 공정한가… (중략)… 이 일로 인해 혹시라도 영화계에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장관은 그에 대한 정치적·정무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영화단체연대회의 최현용 사무국장은 “여전히 낡은 이데올로기 공세로 자신의 부패행위를 가리려고 한다”며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 결정을 통해 문화부가 조 위원장으로 인한 영진위 파행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을 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희문 위원장 해임이 곧바로 영진위 정상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조 위원장의 ‘신념’에 따라 파기된 ‘똘똘한’ 진흥사업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제작지원을 영진위가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은 관련 부처와 논의를 거쳐 현재 국회 예산 심의가 진행 중이다. 현 시점에서 영화인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정부나 영진위가 계획을 재고하거나 수정할 의지나 방법은 많지 않아 보인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최근 100만 관객 이상을 동원한 <방가? 방가!>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술영화제작지원 사업의 성과가 이제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영진위의 진흥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부의 품을 벗어나 현장과 소통하라
2011년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에 대한 영화계의 반발은 특정 사업의 존폐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현용 한국영화단체연대회의 사무국장은 “현재 영진위의 지원정책은 문화의 영역을 허물어뜨리고 산업 일변도로 향해 있다”면서 “다양성 영화 제작 지원을 없애고 이를 인건비 지원으로 돌린 것은 결국 시장마저 교란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독립영화 배급사 시네마 달의 김일권 대표도 “영진위가 예술영화·독립영화 제작지원을 없애는 대신 10억원 미만의 저예산 영화를 대상으로 장비나 인건비 지급 형식의 간접 지원을 한다고 들었다”면서 “이는 영진위가 문화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9인 위원회 회의에서조차 영화발전기금 운용계획에 대한 상세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은 데 따른 당연한 결과다.
영진위의 정상화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제기된다. 한 영진위 관계자는 “영진위가 문화부를 대신해서 정부의 영화정책을 구체화할 수 있으려면 거버넌스 기능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한섭, 조희문 전 위원장 시절, 영진위는 문화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됐었다. 최현용 한국영화단체연대회의 사무국장도 “문화부와 영진위의 9인 위원회가 긴장과 협조를 바탕으로 한 생산적인 파트너 관계로 서로를 인정해야만 영화계 현장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되어 진흥정책에 반영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진위 정상화를 위한 두 번째 전제는 현장과의 소통이다. 영진위 관계자는 “과거에는 정책 소위원회를 통해 현장 영화인들이 영진위에 생산적인 제언을 내놓았으나 지난 2~3년 동안 모두 사라졌다”면서 “소위원회를 통한 현장 영화인들과의 소통에 대해선 문화부도 적극적인 의지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누가 영진위를 정상화할 것인가. 지금 시점에서 영진위 정상화의 키를 쥐고 있는 건 일단 문화부로 보인다.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단정할 수 없으나 조희문 전 위원장의 잔여 임기가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문화부가 새 위원장을 인선하기란 쉽지 않은 듯 보인다”며 “이 경우 현 직무대행 체제가 얼마만큼 정부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업무를 추진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한 프로듀서는 “10년 전 자율적 진흥기구인 영진위가 탄생할 수 있었던 건 충무로 포럼, 영화인회의 등을 통해 영화계 현안에 대해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영화인들 덕분이었다”면서 “지금이야말로 다시 그러한 논의의 틀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전임 위원장들의 연이은 실책 때문에 오명으로 얼룩진 영진위, 과연 탈바꿈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