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다이하치의 <퍼머넌트 노바라>를 말하기 위해 좀 돌아가고자 한다. 최근 일본영화를 보며 피로를 느꼈다면 일본영화의 미덕이 무엇이었는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에 대해(영화든 무엇이든), 최종적으로는 그것과의 합일을 거절해야 하는 정치적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져 있음이 작용한 결과다. 그래서 ‘불경스러울지라도’ 그 안쪽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예로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 짝사랑 선배를 따라 지방에서 도쿄로 대학을 온 우즈키는 친구 때문에 흥미도 없는 낚시서클에 가입한다. 그녀는 운동장 ‘나무’를 향해 ‘낚시’하는 시늉을 한다. 이후 고교생 그녀가 활로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이 이어진다. 다시 연주는 자전거를 타는 그녀의 배경음악이 되는데, 현의 구슬픈 음은 선배를 향한 사랑의 신음 같다. 자전거길 양옆에는 햇볕을 받은 풀밭이 펼쳐져 있다. 모두 막대와 줄로 이뤄진 낚싯대와 (바이올린)활, 두 장면의 연결은 필연이다. 막대를 들고 그녀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햇볕에 풀처럼 싹트는 사랑을 연주하는 것이다. 반대로 도쿄에서 막대로 하는 일은 정확히 ‘연목구어’다. 곧 이곳에서 사랑은 점점 불가능해진다(이 영화에서 선배와의 재회가 영화의 시작이 아니라 끝인 것은, 이후 그녀가 사랑을 위해 회색빛 도쿄를 견디는 것에 대해 영화가 비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그녀가 고향에서 도시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와이 순지 영화는 대부분, 장소를 옮기는 ‘이사’에 관한 영화다. 그것은 정말 그냥 이사거나(<고스트수프>), 학교를 옮기는 전학/진학의 형태다(<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프웨이> 등). 실패는 항상 이사에서 비롯된다. 극단적으로 <러브레터>에서 남자 이쓰키가 전학(이사)을 간 결과는 그의 죽음이며, 여자 이쓰키 가족이 마당에 나무를 심은 낡은 집에서 콘크리트 아파트로의 이사를 중단하는 것은 할아버지가 눈보라 속에서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불꽃놀이, 아래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에서 나즈나는 부모의 이혼으로 전학을 가야 하지만 필사적으로 도망다닌다. 여기엔 자신이 성장하던 공간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 있다. 역으로 어떤 갇힌 상황이 이사라는 이스케이피즘, 곧 ‘도피’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와이 순지가 ‘일본영화’인 이유
이 도피는 일본영화의 슬픈 미덕이다. 이와이 순지를 길게 푼 것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그에게조차 이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일본의 치명적 실패, 거품경제 붕괴 뒤의 상황을 안고 있다. 그의 드라마 데뷔작 <본 적 없는 내 아이>(1991)는 낯선 아이가 딸처럼 집에 들어와 원래 가족을 유령처럼 사라지게 하는 이야기다. 이상적 행복이 하루아침에 꿈처럼 거품이 되어 앙상한 현실을 직면해야 했던 일본의 90년대와 이 작품은 함께 시작한다. 그의 영화들은 자살의 비유로 가득하며, 인물들은 햇빛이 만든 환영이나 유령처럼 ‘가볍게’ 부유하며 폐쇄상황에서 죽음으로의 도피를 시각화한다(그를 ‘가벼운 감성영화’로 설명하려는 흔한 시도는 이 도피의 맥락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햇빛과 풀은 동시에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곤 원래 장소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든 견디며 성장하는 풀과 같은 생명력을 증명케 한다. 이와이 순지를 탈정치 아이콘이라 종종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진술이다. <퍼머넌트 노바라>는 일본영화의 폐쇄상황과 도피의 미학이 아직 유효함을 방어하는 최근의 가장 직접적 방패다. 또한 거기서 단지 머무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신음한다.
다시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
머리 모양이라곤 그저 오래가는 아줌마 파마가 전부인 당신은 이제 늙어서, 성적으로 혹은 연애에서 소외된 여자다. 때문에 하얀 눈속에서 섹스가 동결된 <겨울연가> 같은 순결판타지에서나 사랑의 욕망을 가짜로 채운다. 젊었던 과거와 다가올 죽음 사이의 진퇴양난, 거기서 현상유지적 체념과 판타지로의 도피. 그런 당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하는가? <퍼머넌트 노바라>의 대답은 그 갇힌 상황에 맞서 당신이 사랑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퍼머넌트 노바라>는 일본영화의 폐쇄상황 도피와 그로부터의 구원 문제에 ‘기다림’의 태도를 추가한다. 요시다 다이하치는 장면장면 그 확신을 찍는다.
(이후 스포일러 있음) 나오코(간노 미호)는 이혼 뒤 어린 딸과 고향 해변 마을로 돌아온다. 그곳 미용실의 손님은 항상 할머니들이다. 영화의 제목인 미용실은 마을의 중심이므로 결국 그 마을은 노년들의 세계다. 그 세계는 땅의 끝인 해변이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삶이 끝으로 가듯 그녀들이 해변으로 점점 밀려난 것처럼 된다. 이 영화에서 죽는 것은 항상 남자들인데, 그들이 떠난다기보다 여자들이 성적으로 남자보다 ‘먼저’ 버려질 숙명에 있음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 아직 젊은 나오코는 이혼으로 버려짐으로써 그곳에 일찍 도착한다. 그 끝엔 바다가 있다. 바다는 삶의 끝에 닿아 있기 때문에 물론 죽음을 의미한다. 역시 이곳까지 밀려온 그녀는 죽음의 바다를 향해 걸어갈 수도 없고, 반대방향으로 마을을 떠날 수도 없다. 그건 시간의 흐름을 되돌려 과거로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딸 모모를 만나러 온 전남편은 초점이 흐려진 영역에서 나오지 않고, 그녀는 흐려진 과거의 사람쪽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이 폐쇄상황에서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시간의 흐름대로 늙어 죽어갈 것인가, 다시 사랑을 시작할 것인가? 슬프게도 그녀의 선택은 과거 환상으로의 도피다. 그녀는 이미 죽은 가시마의 환영과 연애를 하며 거리를 떠돈다. 미쓰에의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예전처럼 전신주를 벤다. 이는 과거로 도피해 정신이상이 된 나오코의 다른 모습이다.
할머니들은 파마를 풀거나 하길 반복하며 여자와 노년의 정체성 사이에서 싸운다. 이 영화에서 바다는 곧 죽음이므로, 그쪽으로 일부러 걸어가는 것은 죽음을 무릅쓴 결심이다. 그게 다시 사랑을 하려는 결심이라면 단지 늙어 죽어가는 것만이 남은, 갇힌 삶으로부터의 구원이 된다. 실연한 할머니가 울면서 물로 걸어가는 장면은 우스꽝스럽지만, 이는 노년의 앞에 놓인 죽음의 바다에 맞서 ‘여자’의 자리와 사랑을 되찾으려는 투쟁과 구원의 축소판본으로 오히려 통쾌하다. 영화가 나오코에게 삶의 태도를 이들처럼 바꾸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때 딸 모모는 화면에 개입해 할머니들에게 다가간다. 미쓰에는 모모에게 “떨어져, 남자운이 나빠져”라고 외친다. 겉으론 모모의 장래운이 나빠진다는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사실 모모로 인해 할머니들의 운이 나빠진다는 의미다. 아이는 여자를 엄마의 자리로 되돌려 연애의 시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모모는 나오코가 ‘여자’로서 머리를 풀 때는, 결코 한 프레임 안에 있지 않거나 그 프레임에서 즉시 퇴장한다. 이는 어린 시절 나오코가 자기 엄마의 연애를 인정하지 않았던 과거가 자기 딸에게서 반복된 것이다. 그녀는 딸의 존재와도 싸워야 한다. 그러나 정신이상이 된 그녀에게 이는 승산없는 싸움이다. 여기서 영화는 그녀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으로 그녀를 끌어안는다.
이케와키 지즈루가 연기한 도모는 남자들에게 학대받는다. 사실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피학적으로, 근친강간/10대 임신/장애인 등 고통받는 신체 역할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신체 대신 정신으로’ 존재한다. 그런 그녀는 정신이상이 된 나오코를 이해하며, 계속 기다릴 것임을 말한다. 그 순간, 영화는 도모를 클로즈업한다. 이 클로즈업은 그녀의 기다림과 이해심의 정신을 얼굴이라는 신체로 현현하기 때문에, 그녀는 이때 비로소 자신의 신체성을 되찾는다. 거꾸로 그 신체성으로 인해 실체화된 이해심의 크기를 느끼게 한다. 이는 <퍼머넌트 노바라>에서 가장 눈물겨운 순간이다. 요시다 다이하치는 이 신체성을 적절히 활용한다. 뭔가 불안한 느낌의 간노 미호의 얼굴은 정면/정측면 모두 평면적이다. 그녀의 얼굴 구도는 정면/정측면에 주로 맞춰진다. 이는 얼굴 입체가 두개의 평면으로 분절돼 펼쳐지면서 신체가 분열/조립되는 듯한 착시를 만들기 때문에, 보는 이의 신경을 긴장시킨다. 그녀는 <돌스>에서처럼 불안이 현현된 신체로서 이 영화 안에 들어온다.
모모는 해변으로 엄마를 찾아간다. 길에서 모모는 자동차에 막히지만 이를 잘 비껴 앞으로 나아간다. <퍼머넌트 노바라>는 삶의 큰 벽에 막혀도 계속 앞으로 걸어갈 수 있나를 묻는 영화다. 또 그 결심이 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다짐이 있다. 이는 온화한 이해지만, 도피에 대한 가장 강력한 부정이다. <퍼머넌트 노바라>는 버려진 여자들에게 죽을 때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말라고 울부짖는다. 탈출구 없는 폐쇄상황에서 스스로 찾아야 할 구원이 무엇인가 정면으로 던지는 질문, 이는 아직은 포기하지 말아야할 일본영화의 미덕이다. 지금 한국영화의 미덕은 무엇인가? 그 대답 역시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다.
오세형 아오이 유우의 손을 잡아본(악수) 국내 유일의 평론가. 부산영화제에서 여학생 자원활동가로부터 “평론가 같아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뒤, 편집부에서 원하지도 않은 감독/배우 인터뷰를 알아서 하는 등 움직이는 평론가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