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블루레이로 출시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보다가 캐리 그랜트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어떤 순간에는 정력적인 남성으로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깊은 주름이 드러나(HD TV의 위엄!)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 찾아보니 이 영화가 발표될 당시 그랜트의 나이는 무려 55살이었다. 의외였다. 대충 40대 후반 정도라고 예상했는데. 그 나이에 나름의 액션(?)까지 포함된 이 영화를 소화했다니 그랜트도 참 대단한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55살에 자신의 대표작을 찍은 배우는 행복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층의 악당>과 <페스티발>을 보면서 흐뭇했던 점 중 하나는 한석규, 심혜진의 존재감이었다. 그 정도 경력의 연기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원숙함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안도감도 들었다. <이층의 악당>의 한석규는 우리에게 친숙한 기존 이미지를 이용하지만 그것을 교묘하게 뒤틀기도 한다. 품이 완연히 넓어진 인상의 그가 스크린을 꽉 채워준 덕에 영화의 즐거움도 배가된 듯했다. <페스티발>의 심혜진은 더욱 반가웠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그로테스크한 웃음을 자아낸 그녀지만 <페스티발> 속 심혜진은 더욱 과감한 변신을 꾀했다. 한복을 입은 채 살아가는 일상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야한 옷을 입고 채찍을 휘두르는 은밀한 사생활 사이의 갭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심혜진의 타고난 포스와 오랜 경력 덕분일 것이다.
마치 노장 배우들이 오랜만에 연기혼을 발휘한 양 말하고 있지만 사실 두 배우의 나이는 그리 많은 게 아니다. 한석규가 우리 나이로 47살, 심혜진은 44살이니까. 할리우드의 동급 배우들과 비교하면 답이 딱 나온다. 조지 클루니는 한국 나이로 50살이고 조니 뎁과 브래드 피트는 한석규보다 한살 많은 48살이다(한석규와 동갑은 니콜라스 케이지와 러셀 크로다). 그런데도 세 배우 모두 전세계 여성에게 섹시하다는 칭송을 듣고 있지 않은가. 반면 한국에서는 30대 후반만 되어도 ‘섹시’는커녕 아저씨, 아줌마급 대우를 받게 마련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기 관리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하지만 중년배우에 대해 인색한 한국영화계 풍토에서는 아무리 자기 관리를 잘한다 해도 캐리 그랜트 같은 사례를 만들기 어렵다. 부디 <이층의 악당>과 <페스티발>이 그런 부당한 선입견을 바꾸는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그리고 이번에 기획기사로 다룬 류승범과 표지를 장식한 유아인 또한 장수하는 배우가 되길 바란다. 물론 두 배우 모두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는 터라 알아서 길을 잘 열어나갈 것이다. 류승범은 정말 물이 올랐다. 이젠 더이상 천재적인 감각의 소유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연기자로서의 고민이 깊어진 느낌이다. 데뷔 초부터 생각이 많은 배우로 알려진 바대로 유아인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는 인상이다. 이들 뿐 아니라 많은 재능있는 배우들이 촬영현장에서 회갑연을 열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