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이독자에게]
[에디토리얼] Imagine 존 레넌
2010-11-29
글 : 문석

존 레넌이 마이크 채프먼의 총격으로 사망하던 1980년 12월8일 나는 중학교 입학을 앞둔 처지였다. 동요와 가요를 오가는 음악취향을 갖고 있던 나로선 그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얼마 뒤 세살 위인 형이 잡지책 한권을 사왔다. <월간팝송> 1981년 1월호(2월호일 수도 있다)였다. 그 호는 표지부터 존 레넌을 내세워 거대한 특집기사를 싣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그의 유작인 <<Double Fantasy>>의 <Starting Over> <Woman> <Beautiful Boy>가 계속 흘러나왔기 때문인지, 총격 사망이라는 사건 자체의 충격 탓인지, 아니면 형언하기 어려운 포스의 흑백 표지 탓이었는지, 하여간 <월간팝송> 그 호는 달달 외다시피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그 이후 <월간팝송>은 매월 발매일을 챙겨 사야 하는 필수 아이템이 됐고, <황인용의 영 팝스>와 상호보완관계를 이루며 팝음악에 대한 지평을 넓혀줬다. 그렇게 따진다면 존 레넌은 나를 대중문화로 이끈 첫 번째 고리라 할 수 있겠다.

‘현대 팝음악의 시원은 비틀스’라는 <월간팝송>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는 비틀스의 팬임을 자처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 나와 있는 비틀스의 음반은 ‘금지곡’이 구멍처럼 뽕뽕 뚫린 베스트 앨범 몇장뿐이었다. 자존심상 음질이 최악인 ‘빽판’을 들을 순 없었던 우리의 구원자는 오퍼상을 했던 친구 아버지였다. 그분이 외국을 오가며 사다주신 비틀스의 앨범 중 우리를 가장 감격시킨 것은 흔히 ‘화이트 앨범’이라 불리는 <<The Beatles>>였다. 실제 LP까지 하얀색으로 찍혀나왔다는 전설의 초판본은 아니었지만 거대한 브로마이드가 슬리브 사이에 끼어 있는 이 앨범은 우리를 비틀스의 광신도로 만들었다. 존 레넌과 비틀스에 관한 이번 특집기사를 읽다보니 그런저런 추억들이 새삼 돋아났다. 특히 ‘인상적인 20장면’을 보면서는 비틀스에 열광했던 기억을 가진 영화인도 한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만 되면, 계기만 생기면 비틀스와 존 레넌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기획음반을 만드는 상술이 얄미우면서도 꼬박꼬박 구입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추억 때문일 것이다.

특집기사에도 등장하지만 비틀스 팬의 오랜 논란거리는 ‘존이냐 폴이냐’다. 나는 당연히 존이다. 비틀스 시절이나 솔로 시절이나 존 레넌이 폴 매카트니보다 한수 위였다는 생각이다. 음악적인 차원뿐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삶이라는 차원에서도 말이다. 그는 당면한 베트남 전쟁에 맞서 올 누드로 아내 오노 요코와 함께 침대에서 시위를 벌였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위해 일어설 것을 노래로 선동했다. 평화를 주창했던 존 레넌의 30주기, 한반도에서는 위기감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전쟁은 끝날 거예요/ 당신이 원한다면’(<Happy Xmas(War Is Over)>)이라 외치던 존 레넌이 더욱 생각난다. Give Peace A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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