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범은 최근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림 앞에 서면 갑자기 온전히 혼자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거기에서 오는 희열이 있다고 했다. “며칠 전에 우연히 인사동을 돌아다니다가 어떤 작품을 봤다. 대리석에 사진과 미술을 합쳐놓은 작품이었는데, 그 작품 앞에 가만히 서 있을 때 갑자기 세상이 빡, 하고 끊기는 느낌이 오더라. 지구상에서 이 시간에, 이 그림을 나 혼자 보고 있다는 느낌. 그 순간이 굉장히 가치있게 다가왔다.”
그런데 류승범이 지금 이 시점에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배우는 최근 연기의 본질을 고민하며 점점 자신의 핵심을 향해 파고드는 중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데뷔했고, 배우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만끽하는 시간도 있었고, 그 시절 정확하게 감지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서른이 넘은 지금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이라고 했다.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생각의 변화들이 조금씩 움트고 있는 것 같다. 사물을 보거나 뭔가를 생각할 때 확실히 예전과 다른 방향으로 보게 된다. 예전에는 나를 어떻게 하면 완성할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나에 대한 들끓는 야심과 야망이 있었고, 지금은 그 껍데기를 벗어버린 것 같다. 이젠 난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해야지, 또는 난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이 내 안에서 조금씩 없어지고 있다.” 혼자 있을 때면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고 류승범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류승범에게는 온전히 홀로 되어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절실하다.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배우라는 존재의 중심에 닿기 위해.
서른한살, 생각의 변화가 움트다
류승범의 그런 고민들은 필모그래피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올해만큼 스크린에 자주 얼굴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1월 <용서는 없다>로 시작해 <방자전>을 거쳐 <부당거래>와 <페스티발>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려 네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처럼 출연작이 늘어난 데에는 제작상의 스케줄 문제도 있었지만, 확실히 작품 선택을 위한 고심의 기간이 짧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그는 말한다. “<방자전> 끝나고부터였을까. 내가 고민하고 이러저러한 계획을 세운다고 해서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오더라. 작품은 어쨌거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운명을 내가 너무 거부하거나 스스로 만들려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류승범은 올해부터 자신의 성향에 맞는, 혹은 맞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오래 기다리는 걸 멈췄다. 류승범의 성향이 무엇인지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 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예전엔 나를 너무 믿었다. 난 이런 사람이니 이런 작품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이젠 나와 조금 다른 성향의 작품을 만났을 때에도 그 성향이 내 안에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류승범은 작품 선택에서 더 유연한 마음을 지니게 됐다. 그가 올해 출연한 영화 네편의 장르와 캐릭터의 색깔이 각각 판이했다는 점이 그 증거다. 그중에는 배우 류승범의 이미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는 작품도 있었다. <방자전>의 이몽룡이나 <부당거래>의 검사 주양은, 평소 관객이 류승범이라는 배우에게 기대하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를 단순히 작품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연인의 변심을 알고 순식간에 싸늘해지는 이몽룡이나 그 속을 도통 알 수 없는 비리 검사 주양의 모습에서 20대 류승범의 전매 특허였던 넘치는 끼와 용암처럼 들끓는 에너지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오히려 그의 연기는 숙련된 전문가가 만든 정장처럼, 영화의 적재적소에 맞춤옷처럼 들어맞는다. 힘이 빠진 자리를 기술이 채운다고 할까. “최근 내 영화를 본 지인들에게 들은 얘기 중에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건 내 연기에 ‘과장의 화법이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가장 기분 좋았다.” 그렇게 류승범은 20대의 강렬함을 내려놓는 대신 30대의 한층 성숙한 눈빛을 얻었다.
과장의 화법이 사라지고
<부당거래>는 지금 막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배우 류승범의 변화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 변화는 상황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부당거래>를 촬영하며 덜컥덜컥 막히는 장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부하직원인 공 수사관과의 갈등장면. 나는 조직생활을 한번도 안 해봤기 때문에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지랄맞게 대한다’는 게 어떤 건지 이해가 잘 안되더라.” 검사는 경찰에게, 경찰은 스폰서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말하자면 대한민국 사회생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조직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부당거래>의 주양을 연기하는 핵심 키워드였다. 그리고 배우라는 직업을 갖기 이전부터 DJ, 댄서 등으로 활동하며 ‘독고다이’로 살아온 류승범에게 주양을 이해하는 건 하나의 도전이었다. 결국 류승완 감독이 구원투수가 됐다. “청소년 시절부터 수많은 아르바이트와 조직을 거친 사람이잖나.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많이 물어봤다. 듣다보니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 사람을 굉장히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더라. 어제는 잘해줬다가 오늘은 지랄맞고, 한 시간 전의 입장을 갑자기 바꾸고. 그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된다는 걸 무의식중에 알아서 그런다더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이 뭘까를 고민했다.”
영화 현장의 풍경도 주양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한 힌트가 됐다. 현장의‘권력자’인 류승완 감독이 스탭들을 대하는 모습은 류 감독이 <씨네21>과 인터뷰(776, 778호 참조)에서 밝힌 대로 상당 부분 주양의 모습에 반영되어 있다. “부탁드리겠습니다!”나 “사랑합니다”, “명목?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난 꼭 좀 확인하고 싶은데”와 같은 대사는 평소 류승완 감독의 현장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오랫동안 협업한 감독과 배우, 그 이전에 형과 동생 사이라는 점에서 형의 모습을 캐릭터에 반영하는 것이 흥미로운 경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류승범은 그게 핵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대사도 중요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더 중요했던 건 상대 배우의 연기에 대한 리액션이었다. 공 수사관 (정)만식이 형이나 기자로 나왔던 (오)정세 형의 연기를 역이용해 내가 반응하는 거지. 그러니 그 배우들이 잘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안됐을 거다. 아무래도 나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스타일이 아닌가보다.” 그러므로 <부당거래>는 류승완 감독에게 얻은 힌트와 황정민, 정만식, 오정세 등 노련한 주·조연 배우들의 연기가 류승범의 에너지와 조우해 강렬한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 경우다.
반면 <페스티발>은 류승범 개인의 역할이 중요했던 작품이다. <품행제로>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의 각본을 쓰고, 지금은 중단된 프로젝트 <29년>을 함께 준비하며 류승범과 친분을 쌓게 된 이해영 감독은 배역도 정하지 않은 채 그에게 “한번 읽어보라”며 <페스티발>의 시나리오를 던져줬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오프닝신의 자막처럼, 류승범에게는 <페스티발>은 무척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내 주변에도 성적으로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난 아직도 왜 사회가 그들을 변태이자 루저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만들어져야 하고, 소중히 다뤄져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캐릭터라도 상관없었고, 그저 내가 이 영화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만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 생각 끝에 맡게 된 상두는 물음표가 많은 캐릭터였다. ‘인형하고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 외에는 이렇다 할 ‘각’이 없는 인물이라고 할까. 류승범은 이 모호한 캐릭터에 “정확한 키워드”(이해영 감독)를 부여했다. “상두가 인형을 사랑하는 이유를 고민하다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 사람은 혹시 사랑이 변한다는 것에 공포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어느 영화에서처럼 ‘사랑은 변하’니까. 인형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잖나. 상두가 가지고 있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공포를 표현하는 게 관건이라 생각했다.” 그 고민의 결과로 나온 대사가 바로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너 나 사랑하냐, 그래서 좋냐”다. 상두가 자혜(백진희)가 질투심에 고장낸 인형을 들쳐업고 집으로 향하다 자혜와 마주치는 이 장면은 원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류승범은 상두의 상황을 요약해주는 장면이 필요하다고 봤고, 이해영 감독에게 자신이 생각했던 대사를 제안했다. “준비한 걸 들고 갔더니 처음엔 ‘어, 이게 뭐야’ 하시더라. 시나리오의 분위기와 너무 다르니까. 그런데 생각을 말씀드리니 그럼 그대로 가자고 하시더라. 찍고 나서 나중에 영화로 보니 그 장면, 짠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상두가 무덤덤한 말투로 자혜에게 물음을 던지는 장면은 <페스티발>을 그저그런 코미디영화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영화 속 몇 장면 중 하나다. “보는 사람들에게 영화를 통해 뭔가를 던져주면, 그들이 또 다른 개개인의 이야기를 만들어갔으면 한다”는 그의 바람은, 아마도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어째 한 작품, 한 작품을 거칠 때마다 컨디션이 점점 더 좋아진다”는 류승범은 이제 2010년의 다섯 번째 작품의 촬영(11월19일 크랭크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조진모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가제)에서 그는 어떤 사건을 겪은 뒤 그라운드를 떠나 보험설계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전직 야구선수 병우를 연기한다. “<페스티발>에서 오며가며 부딪히는 기가 장난이 아니었던” 성동일과 선수-매니저 관계로 다시 만나는 것도 기대하고 있다. 당장은 야구 연습이 시급하지만, 큰 부담을 가지진 않으려고 한다.
배우라는 나의 운명을 믿는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배우라는 나의 운명을 믿어보자고. 나 자신을 좀더 좋은 쪽으로 믿고 작품에만 집중하자고. 나는 지금이 정말 중요한 시기라고 본다. 지금부터 정말 시작이다. 씨를 뿌릴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언젠가는 뿌리가 되고 열매를 맺겠지.” 류승범이 이렇게 ‘시작’이란 단어에 방점을 찍었던 적은 없었다. 어쩌면 2010년의 류승범이 기록된 다섯편의 영화는, 훗날 류승범이란 거대한 괴물 배우의 탄생을 예고하는 속편처럼 기억되지 않을까. 확실한 건 알은 깨졌고, 서른한살의 류승범은 더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