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를 앞둔 현장은 조심스럽다. 촬영장에서 약 20m 떨어진 스테이션 안에서 지휘하던 임순례 감독이 카메라 옆에 바짝 붙었다. 스탭들은 말수를 더욱 아낀다. 분위기만 보면 키스신 정도 될 법한데, 어째 좀 이상하다. 슛 들어가기 전부터 카메라 앞을 지키고 있는 배우 전국환, 최보광과 달리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할 또 다른 배우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작은 곰인형을 자신의 대역으로 내세우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을 드러냈다. 배우가, 아니 고양이로소이다. 지난 11월12일 밤 수유리의 한 주택가, 동물보호 옴니버스영화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 중 한편인 임순례 감독의 <고양이 키스>의 4회차 촬영현장이 공개됐다.
“오늘 연기 중 ‘고양이 키스’가 가장 신경 쓰인다.” 무대 경력만 수십년인 베테랑 배우 전국환의 엄살 아닌 엄살이다. 사람이 눈을 감으면 고양이 역시 그 사람에게 지그시 눈을 감는 고양이 키스는 “서로 신뢰가 통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찍어야 할 컷은 이렇다. 두 모녀가 사이좋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잃어버렸던 고양이를 만난다, 고양이를 싫어했던 아버지(전국환)가 고양이를 향해 다가서면 고양이는 아버지와 딸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사람’에게는 단순한 장면이지만 고양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고양이가 놀라 달아날 것을 대비해 스탭들은 낚싯줄로 고양이 몸을 단단하게 묶는 것은 물론이고, 현장 사방팔방에 검은 그물을 설치했다. 무엇보다 수차례의 리허설 동안 매번 고양이가 앵글 밖을 나간 게 문제다. 드디어 “슛”이 들어갔다. 이번에도 앵글 밖을 나갈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고양이는 제자리를 지켜 묵묵히 ‘연기’했다. “컷” 소리와 함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스탭들은 전부 고양이를 향해 감탄사와 박수를 보냈다. ‘마술적인 순간’이다.
일주일 동안 서울에 있는 딸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시시때때로 딸과 티격태격거린다. 딸이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꾀죄죄한 차림으로 밤마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러 다녀서다. “이게 한국 사람들의 고양이에 대한 편견이다. 사람들은 밤에 시끄럽게 울고 쓰레기 봉투를 뒤진다는 이유로 고양이를 싫어한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버려서 생긴 문제잖나. 당연히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임순례 감독의 연출 의도다. “길고양이 보호와 아버지와 딸의 화해”를 그린 <고양이 키스>는 다른 세편의 영화와 함께 <동물과 함께 사는 세상>이란 제목으로 내년 상반기에 개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