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에 대한 글을 이런 단정으로 시작하는 게 미안하기는 해도, 평단의 호평과 달리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는 기대에 못 미치는 영화였다. 그렇다고 영화에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게 꼭 데이비드 핀처의 탓은 아닌 것 같다. 실화를 변주하는 그의 상상력이 어딘지 틀에 갇힌 인상을 준다고 지적할 수는 있어도, 딱히 그의 연출에 흠 잡고 싶은 구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좀 이상한 지점에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가 재미없다, 고 말한다면, 그건 페이스북의 기원이 재미없다는 말일까. 페이스북이 만들어진 과정이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 건 페이스북의 메커니즘 역시 새롭지 않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을까. 결국 이 영화가 지루할 수밖에 없는 건 페이스북이 지루하기 때문일까. 하나가 다른 하나의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영화가 다루는 소재에 대한 평가를 영화에 대한 평가와 동일시하는 것도 분명 무리한 짓이다. 하지만 위의 주장들 사이에 존재할 만한 여러 단계의 사유를 건너뛴 다음, 그냥 대담하게 그 등식에 대해 묻게 만드는 것, 만약 이 영화에 유일하게 신선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 물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대다수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 영화는 페이스북을 창조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페이스북과 영화를 동일시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행여 페이스북을 만든 자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시시하다고 해서 페이스북이 시시한 건 아니며, 그게 반드시 영화를 시시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등등. 일리있는 반론이다. 그러나 <소셜 네트워크>는 (영화의 의도는 아닌 것 같지만) 이 디테일한 사항들을 뭉뚱그려 겹쳐서 생각하게 만들고, 거기서 우리가 ‘페이스북’이라고 포괄하여 부르는 어떤 세계에 대한 환상- 이를테면 영화 포스터의 한글 카피 ‘소셜네트워크의 혁명!’과 같은 문구- 을 건드리게 한다.
그들은 ‘어떤’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나
몇몇 평자는 이 영화가 페이스북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서로 다른 증언을 통해 사실관계를 따지기보다는 각기 다른 시점을 펼쳐놓는 데 힘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흥미를 찾았다(정한석 778호, 김혜리 779호). 귀담아들을 만한 지적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사안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각기 다른 버전의 이야기들이 결국 공유하고 있는 뿌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다양성에 대한 관심보다 중요한 건 그 다양성의 외피가 결국 하나의 목표를 향하고 있을 때, 그 목표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현란한 편집과 진실/거짓의 구분을 흐리는 드라마틱한 증언과정에도 불구하고 마크 저커버그, 윙클보스 형제, 에두아르도 각각의 주장이 내게는 어느 순간부터 영화적으로 소모적인 반복처럼 보였는데, 그건 그 근저에 결국 똑같은 인정투쟁의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인정투쟁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페이스북이라는 가상세계로 옮겨가는 그 경계에서 작용할 때, 그들이 ‘어떤’ 인정투쟁을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어진다. 그들의 인정투쟁은 현실에서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 기준 위에 있는가? 그들의 인정투쟁은 얼마나 참신한가?
그전에, 이 영화의 초반, 비교적 명징한 의미를 내장한 것처럼 보이는 몽타주 시퀀스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여자친구에게 차인 마크가 기숙사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은 다음부터 영화는 급격하게 빨라진 속도로 두 구역을 오간다. 하나는 하버드 여학생들의 신상정보를 해킹해서 여학생들의 미모에 순위를 매기는 ‘페이스매시’ 프로그램을 만든 마크와 이에 동참하는 남학생들의 기숙사 풍경. 다른 하나는 같은 시각, 여학생들을 초대해서 파티를 벌이는 피닉스 클럽(하버드 내, 또 다른 상류층 클럽)의 풍경. 말하자면 온라인 화면에서는 여학생들의 얼굴이, 현실 공간에서는 여학생들의 섹시한 몸이, 이들을 구경하는 남자들의 열광적인 시선 속에서 스펙터클화된다. 하버드라는 공간 내에서 두 영역의 쓰임새는, 혹은 두 영역에서 여자들이 소비되는 방식은 결국 같다. 여성의 대상화에 대해 운운하려는 건 물론 아니지만, 이 두 영역이 놀라울 만큼 동일하고 구태의연한, 남녀관계의 현실적 구도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페이스북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페이스매시와 현실이 맺고 있는 관계가 충돌적이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이 영화에서 마크 저커버그의 콤플렉스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건 하버드의 이른바 잘나가는 남자들이 속한 파이널 클럽에 그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위의 시퀀스 이후에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어쨌든, 여기서 이미 그의 온라인 작업이 오프라인의 피닉스 클럽을 대신하는, 온라인 피닉스 클럽에 다름 아님을 영화는 보여준다. 말하자면 오프라인에서 영향력을 갖지 못한 자의 현실 상쇄 수단. 윙클보스 형제나 마크의 유일한 친구 에두아르도가 틈날 때마다 ‘아버지’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과 달리 마크는 단 한번도 아버지를 비롯해 자신의 배경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아버지의 영향력에 기대거나, 아버지를 의식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물적 네트워크를 소유한 윙클보스 형제와 에두아르도에 비해 마크가 의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영향력은 스스로 온라인 네트워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 때, 그것이 마크를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현실의 구조를 깨뜨리는 무엇이 아니라, 그의 현실적 결핍을 채워줄 대체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윙클보스 형제와 에두아르도가 온라인에 눈독을 들이고 마크에게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소송을 거는 것은 현실의 풍요로운 자본의 소유자들, 마크의 말대로 ‘단 한번도 잃어본 적 없는’ 자들이 더 많은 걸 갖겠다는 야심의 표출이다. 그러나 마크의 경우는 결과가 어찌되었든 결핍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마크의 입장이 더 정당한가? 더 깊은 이해의 대상이 될 자격을 가지는가?
‘대중성’에 대한 환상
이 영화를 어느 천재 악동의 성장담으로 본다면, 그런 물음에 잠시 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윙클보스나 에두아르도, 그리고 마크는 결국 똑같은 부류로 보인다. 편견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야망과 그들이 딛고 있는 현실적 배경과 그걸 빼앗기지 않고 이용하는 능숙한 솜씨를 보고서 성장담이라고 말하는 건 너무 너그러운 처사다. 영화에서 이들이 하버드 네트워크와 페이스북의 배타성을 고안한 건 결국 현실 안 상류층의 배타성을 온라인으로 확대하려는 행위다. 이 가상세계의 질서에 현실과 단절된, 현실과 다른 그 무엇이 존재하는가, 묻고 싶다. 영화가 어디까지나 페이스북 창시자들간의 진흙싸움에 국한된다고 하더라도, 이 싸움의 바탕이 되는, 현실의 기준 위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인정투쟁이 우리가 사용하는 페이스북의 메커니즘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순진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 쉽게 인터넷 공간이 현실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관계의 모양새가 아니다. 문제는 관계를 규정하거나 서열화하는 기준이 기존의 현실적 조건들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지에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페이스북은 그 시작도, 쓰임새도 현실의 공고한 연장이거나 현실의 조건을 기준으로 세워진 허구의 창조다. 마크와 그의 친구들은 엄밀히 말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변주해서 좀더 영향력있는 공간으로 이행시킨 것이다. 그 공간을 둘러싼 이들의 권력다툼은 새로운 세계를 선취하려는 야망이기보다는 결국 이행 비용을 면하거나 보상받으려는 싸움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태생적인 한계는 페이스북을 다루면서 그것을 만든 자들의 이야기에 갇혀, 그들의 사회적 위상에서 벗어나거나 하버드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니, 그건 어쩌면 이 영화의 영리한 전략이다. 가상세계의 활력을 기대했던 우리 중 몇몇에게 이 영화는 그렇기 때문에 지루할 수 있지만, 똑같은 이유로 페이스북의 ‘대중성’에 대한 환상은 그대로 남겨지게 된다. 이 영화는 그저 귀족적인 탄생 신화일 뿐 지금 우리의 외로움을 평등하게 전시할 수 있는 그 페이스북의 민주적인 성질과는 다르다는 환상 같은 것.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 부여할 수 있는 최소의 의미가 있다면, 그건 앞서도 말했듯, 영화를 통해 페이스북의 기원과 페이스북의 메커니즘을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겹쳐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뿐이다. 영화의 초반, 마크가 여자친구에게 버림받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그 멀고 먼 길, 스산한 캠퍼스의 밤 풍경을 카메라가 한참 따라갈 때, 처참해진 청년의 자존감, 동시에 무언가로 끓어오르는 그의 심장소리를 들려주는 듯한 기괴한 음악이 불협화음으로 입혀질 때, 마크는, 영화는 뭔가 대단한 일을 꿈꾸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에 이 영화의, 영화 속 마크의 잠재력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만큼의 역동적이고 폭발력을 지닌 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그 꿈의 결과는 숫자로 환산된 207개국 5억명, 250억달러의 가치. 그 가치는 무엇일까? 소통, 외로움, 열린 세상…. 과연 우리 중 그 누가 그런 텅 빈 말들이 아닌 다른 말로 믿음을 붙잡으며 그 가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가치를 비관한다. <소셜 네트워크>는 사유의 혁명 안에서 자신을 갱신하는 위태로움보다 기술의 혁명이 안기는 위상을 선택한 실은, 사회적으로 모범적인 청년의 신화를 그대로 좇아가는 그저 모범적인 이야기였다.
남다은 페이스북을 할 바에는 그 시간에 옆에 있는 사람의 냄새를 한번 더 맡고 눈을 한번 더 마주하겠다고, 나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그런 내게도 핀처라면 뭔가 보여줄 줄 알았다. 하지만 영화는 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