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는 ‘부정, 노여움, 협상, 우울, 수용’이라고 한다. 출처에 따라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라고도 해서 슬픔이라는 감정과 죽음이라는 사건을 동일선 위에 놓기도 한다. 미국 케이블 채널 <쇼타임>에서 지난 여름 방영을 시작해 11월15일 시즌1의 막을 내린 <더 빅 C>는 이 다섯 단계 중 앞의 네 단계는 이미 지나간 암환자의 삶을 그려낸 드라메디(Dramedy: 코미디-드라마를 말하는 다른 말)다. 주인공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고등학교 역사교사인 캐시 재미슨(로라 리니)으로, 멜라노마(흑색종) 4기에 이르러서야 암을 발견한 캐시는, 남부러울 것 없는 교외의 행복한 주부이고, 무한히 캐시를 사랑하는 남편 폴(올리버 플랫)에게는 소중한 부인이며, 슬슬 반항기에 접어든 아들 아담에게는 ‘나를 미치게 하는 엄마’다.
그런데 캐시는 이 행복과 사랑에, 암을 숨기는 것으로 보답한다. 타이틀이 <더 빅 C>인 이유도, 암을 의미하는 Cancer가 캐시에게는 아직은 숨기고 싶은 비밀이기에 지어진 이름이다. 부정부터 우울에 이르는 과정이 어땠는지 몰라도, 시청자에게 소개되는 캐시는 이미 ‘수용’의 단계에 접어들었다. 죽음은 예상했던 것보다 부지런하게 찾아올 것이고, 그전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기에 몸도 마음도 바쁜 상태다. 그리고 그 바쁜 마음은 가장 행복한 순간들을 재연하려는 결심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아들과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초코칩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던 날, 마당의 수영장에서 다이빙하고 놀았던 날 등 단편적인 기억의 조각들이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부자는 아니었지만 여름이면 뒷마당 수영장에서 오빠와 하루 종일 다이빙을 했어요. 내가 제일 잘한 건 ‘바나나 스플릿 다이빙’이에요.” 그래서 캐시는 손바닥만한 마당에 수영장을 만든다. 여름 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아름드리 나무도 베고, 파티오에서 바로 수영장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공사를 시작한다. 혹독한 3개월의 겨울이 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여름을 만끽하려는 생각에서다.
한국 기후 꼭 닮은 ‘호반의 도시’에서
“1년 중 3개월(겨울)을 빼면 그럭저럭 견딜 만한” 미니애폴리스는 미네소타주에서 가장 큰 도시다. ‘물의 도시’를 의미하는 미니애폴리스라는 이름은, 네이티브 아메리칸 수(Sioux)족의 언어에서 물을 의미하는 ‘mni’와 그리스어에서 도시를 의미하는 ‘polis’가 만나 만들어졌다. ‘호반의 도시’(City of Lake)라는 별명도 가졌는데, 미니애폴리스 안에만 호수 12개, 연못 3개, 습지대가 5곳이며, 미시시피 강의 두 둔덕 사이에 위치한 덕분에 물에 있어서만큼은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부족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위치상으로는 미국의 중북부에 위치하지만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대륙 기준으로 보면 중앙에 자리잡은 터라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에 속하고, 4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다시 말하면 여름엔 몹시 덥고 습하며, 겨울엔 몹시 춥고 눈이 많이 온다는 말이다. 꼭 한국처럼.
<더 빅 C>의 창조자이자 제작자인 여배우 달린 헌트는 40대의 몇년을 미네소타에서 보냈다고 하는데, 이 드라마가 특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도시 미니애폴리스를 무대로 정한 까닭은 바로 헌트의 입김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에게 닥친 불행을 일상 속에 그려내기에 적합하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이 느끼는 시간의 부족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계절의 전환이 눈에 보일 만큼 분명해서 인생의 끝자락에 선 사람의 아쉬움과 조급함을 화면에 잡아낼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긴 여름을 살고 싶은 캐시의 바람 때문인지 <더 빅 C>의 시즌1의 에피소드 13편은 모두 여름을 관통하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시간은 흘러간 뒤 돌아오지 않기에 캐시는 이 여름 동안 분주했다. 6주 동안 축구캠프를 가려는 아들과의 시간을 놓칠 수 없어서 못 가게 했고, (당연히 아들은 캐시를 원망했다) 벗은 옷을 걸어놓는 버릇, 막힌 변기를 뚫는 법, 안전하게 운전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개인적인 신념 때문에 노숙자의 삶을 선택한 별종 오빠와 잘 지내려고 노력했고, 소원했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서먹했던 이웃과 친해졌고, 15년간 연락 없던 친구 레베카(신시아 닉슨)와 화해했다. 자기가 손쓰기도 전에 틀어져버린 것들을 더 늦기 전에 고쳐보려는 노력이다. 담당의사의 권유에 따라 암환자 모임에 나가도 보지만 “암은 행복”이라는 지나친 낙천주의에 질려 “암은 분노”라고 시원하게 쏘아붙이고 나왔다. 나체로 일광욕을 했고, 컨버터블 스포츠카를 사서는, 졸업식, 결혼식, 20번째 생일 등 자기가 놓치게 될 아들의 중요한 날들에 주려고 준비한 선물들로 가득 찬 창고에 넣어놓았다. 난생처음 브라질리언 왁싱을 받고는 노팬티로 교실에서 벽화가 레니(이드리스 엘바)를 유혹하기도 한다. 이렇게 한쪽에서는 ‘바른 생활’ 캐시가 분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고 싶은 거나 해보고 죽자’는 충동에 몸을 맡긴 ‘즐거운 생활’ 캐시가 인생을 산다. 그리고 그 두 모습 모두에서 캐시는 늘 진심이고 솔직한지라 관찰자의 입장에 있는 나는 매번 에피소드를 볼 때마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닦느라 바빴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잘해내는 로라 리니 덕분에, 43살 캐시에게서는 소녀가 보이고 여자가 보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과 함박웃음을 담은 보조개를 가지고 고개를 살짝 젖히거나 입술을 무는 정정도의 별것 아닌 제스처뿐인데도, 이미 미디어는 2011년 에미 시상식에서 로라 리니가 유력한 수상자가 될 거라고 점칠 정도다. <더 빅 C>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미약(媚藥)은 ‘슬픔’이 아닐까 생각했다. 특히 캐시는 슬픔에 정복당하지 않고, 슬픔을 누리는 여유를 보여준다. 병 앞에 무력할지라도 삶에는 강한 태도의 그녀이기에 <더 빅 C>에 등장하는 많은 남자들이 매력을 느끼고 다가서는 것이리라. 심지어 띠 동갑은 될 듯한 담당의사 토드, 캐나다에서 대안의학으로 벌침을 놓는 비맨(리암 니슨)도 캐시에게서 드러나는 광채를 알아차리고, 다가올 그녀의 죽음을 미리 아파하고 슬퍼한다. 캐시의 매력은 내일이 없다는 걸 알기에 오늘을 불태우며 살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인지도 모른다. 사그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불씨 같은 것. 그리고 그건 캐시의 삶과 운명을 같이할 이 TV시리즈에도 마찬가질일 거다. (다행스럽게도) 시즌2가 예고됐기는 했지만, 여느 드라마들처럼 시즌4, 시즌5까지 바라볼 수는 없다.
“슬퍼하지마”
수영장 안에서 인어처럼 헤엄치며 물 밖에 선 가족들과는 소통하려고 하지 않는, 혹은 소통할 수 없는 캐시의 모습을 담아낸 오프닝과 달리 그녀의 수영장은 여름이 끝난 지금도 공사 중이다. 길 건너 사는 기분이 언짢은 이웃 말린(필리스 소머빌)이 경찰에 불만을 신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시의 마당에는 수영장이 되지 못한 구덩이가 깊이 파여 있다. 파일럿 에피소드의 마지막, 수영장 구덩이에 놓인 소파에 말린의 개 토마스와 나란히 앉은 캐시가 읊조렸던 독백은 이제와 다시 보니 앞으로 시즌2에서 펼쳐질 이야기의 예고나 다름 없었다.
“슬퍼하지마,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좀 나아지더라. 그거 알아? 아이가 있으면 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부모라면 아이들보다 먼저 죽는 걸 소망할 거야. 내 말은, 그런 생각은 안 하려고 해도 적어도 그러기를 바라잖아.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 소망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거야. ‘멜라노마’라는 연극의 스테이지4를 연기하고 있는 거지. 웃기지 않아? ‘죽음 코미디’(Death Comedy)라니, 하하. 경고하는데 이 웃음이 좀 있으면 울음으로 바뀔지 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