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적인 마스크와 재치있는 입담, 그리고 현란한 춤솜씨로 한국영화에 웃음을 선사했던 원로배우 트위스트 김(본명 김한섭)이 11월30일 오전 10시 서울 쌍문동 한일병원에서 74살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떴다. 고인은 2006년 9월 공연 도중 넘어져서 머리를 다친 뒤 3차례의 뇌수술을 받았고, 이후 4년 동안 힘든 투병 끝에 결국 뇌출혈로 눈을 감았다. 영화평론가 김종원은 “트위스트 김은 연기 이외에 노래, 춤 등에도 능했고 대중도 그를 배우라기보다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아꼈다. 나이에 비해 항상 앞서 있는 패션 감각,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닌 성격파 배우로서의 마스크 등 그가 지닌 독특한 자질들은 기성 질서를 깨는 요소였고, 이러한 점들이 <맨발의 청춘>에서 폭발적인 대중의 반응을 끌어냈던 것 같다. 항상 신성일이라는 배우에 가려 있었지만 항상 신성일을 빛나게 해준 배우였다”고 말했다.
1936년 부산에서 태어난 트위스트 김은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배우가 되고 싶었다”. “길거리에서 영화 촬영하는 것을 볼 때면 시선을 끌기 위해 소리도 지르고 연기 흉내도 냈던” 그의 끼를 알아본 것은 신상옥 감독.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청년 트위스트 김은 신필름 연구생으로 들어갔고, 1962년 <동경에서 온 사나이>로 배우의 삶을 시작했다. 고단한 무명배우 생활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트위스트 김은 <맨발의 청춘>(1964)에서 “청색 진을 입고 트위스트를 추며” 단박에 청춘 아이콘으로 발돋움했다. 애초 극중 영식이라는 캐릭터 이름은 신상옥 감독이 붙여준 예명 트위스트 김으로 바뀌었고, 그는 “기상천외한 춤”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트위스트 김이 <아름다운 수의>(1962)에서 슈 샤인 보이(shoe shine boy)로 나왔어. 근데 보니까 마스크가 그렇게 재미가 있더라고. 지금도 특이하잖아?… (중략)… 그래서 촬영없을 때 내가 데리고 다녔어.” <맨발의 청춘>을 연출한 김기덕 감독의 말이다. 전문 댄서 뺨치는 춤 솜씨는 언제나 화제였다. 김기덕 감독과 함께 <맨발의 청춘> 출연 전 다방을 돌며 신식 젊은이들이 추는 춤을 몸으로 익힌 그의 댄스는 “종래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역동적인 장면”이라는 평가까지 들었을 정도다. <맨발의 청춘>의 흥행에 힘입어 1960년대 중반 청춘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트위스트 김 또한 <불타는 청춘> <위험한 청춘> 등에 출연하며 ‘최고의 청춘물 조연배우’라는 수식어를 들었다. 당시 청춘영화에서 춤이 절대로 빠질 수 없다는 공식을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그였다.
언제나 청춘이고픈 트위스트 김이었지만, 언제나 청춘일 순 없었다. 1960년대가 끝나면서 트위스트 김의 전성시대 또한 서서히 막을 내린다. 1970년 <항구무정>을 비롯해 한해 7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 뒤엔 매년 1편 정도 출연하는 것에 그쳤다. 1980년대 들어 쇼 무대에서의 트위스트 김의 인기는 여전했지만 과거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다. “지금까지도 그 사람은 ‘맨발의 청춘’이야. 어딜 가서도 자기 쇼 하잖아. 트위스트 김처럼 <맨발의 청춘>으로 평생을 먹고산 사람이 없어” 김기덕 감독의 말은 실은 1970년대 이후 더이상 대중에게 어필하지 못하고 추억으로만 존재했던 트위스트 김에 대한 쓸쓸한 회고이기도 하다. 1980년대 말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됐던 것도 더이상 되찾을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이 드리운 널따란 그늘 때문일 것이다. 늘 가죽잠바와 청바지를 입고 다니며 청춘을 노래했던 배우 트위스트 김은 이제 빛바랜 기억으로만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