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루이즈는 칠레 출신 영화인으로 파리에서 가장 많은 인종이 밀집해 있는 동네에 산다. 파리 19구와 20구를 경계짓는 그 동네에선 늘 바쁜 듯이 지나가는 중국인, 젤라바 차림의 회교도나 아프리카 전통 복장인 부부를 입은 여자들을 흔히 마주친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일어나고 황홀한 취기마저 감도는 알록달록한 동네…. 라울 루이즈의 영화를 참 많이 닮았다.
루이즈에게 올 한해는 힘든 해였다. 불행한 추락사고 이후로 그는 지팡이를 짚는 신세가 됐고, 무엇보다 사고에서 죽음을 간신히 모면했다. 그 사이 루이즈는 그의 작품 중 대작 중의 대작인 <미스터리 오브 리스본>을 만들었는데, 포르투갈의 연작소설을 각색한 매혹적인 작품이다. 루이즈는 자신의 커피잔에 엄청난 분량의 설탕을 넣고 난 뒤 말을 이었다. “촬영을 시작하면서 제가 중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살아날 확률이 50%뿐이라는 것도요. 의사가 말하기를 제 간에 생긴 종양은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희귀한 종양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비평가들이 제 영화를 두고 하는 말도 바로 그거라고요. 웃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매일 저녁 촬영이 끝나면 저는 <미스터리 오브 리스본>이 제 마지막 영화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미스터리 오브 리스본>은 관객을 19세기 초의 포르투갈로 안내한다. 영화는 자신의 운명에 얽힌 파란만장한 사연을 알게 되는 고아의 이야기다. 간혹 수수께끼나 이상스런 것들이 출현하는 이야기로, 거기서 루이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클림트>에서처럼 실재와 몽상의 세계가 공존하는 작품 세계를 만들어낸다. 정교하게 복원된 건축물들은 <배리 린든>이나 <레오파드>를 떠올리기도 하는데, 그림자극의 시퀀스나 찻잔에 그림자로 비치는 실루엣, 마치 마술적인 조명에 흠뻑 잠긴 모형물인 양 자연스런 경치들과 잘 어울린다. 러닝타임이 4시간30분으로 작품이 잘리거나 편집되지 않은 시퀀스 숏으로 촬영됐다. 죽음과 싸우던 감독이 마치 시간을 길게 늘어뜨려서 결말이 나는 기한을 늦추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처음부터 작품을 시퀀스 숏으로 촬영하기로 한 거였냐고 묻는 나에게 루이즈는 “내 몸이 그렇게 결정한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미스터리 오브 리스본>은 정신이 몽롱해지는 도취의 경험이고, 일종의 여행이다. 루이즈는 관객이 지속적으로 주의를 집중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루이즈는 영화연출에 훌륭한 강의를 해준다. “우리는 미국영화와 더불어 영화예술의 주요 기능인 연루되기 효과와 거리두기 효과의 조화를 상실했습니다. 거리두기 효과는 풍경을 넓게 카메라에 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거든요. 손이나 물건 등 어떤 상세한 부분이 될 수도 있지요. 만일 연루되기와 거리두기, 이 두 효과가 조화를 이룬다면 또 다른 형태의 집중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관객은 각각 다른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연루되기에만 집중하다 보면 모든 관객이 거의 똑같은 영화를 보게 되지요. 하지만 그것이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래요, 영화예술의 모든 기술이 이제는 관객의 관심을 ‘포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분명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유의 관심은 무관심의 한 형태죠. 무기력을 유발하는 관심이라는 말입니다.” 루이즈는 무기력을 싫어하는구나…. 이제 그는 플로베르의 소설 <살람보>를 각색할 계획이란다. 날은 저물어가고 탁자 위의 녹음기는 돌아간다. 우리가 얘기를 나눈 지 1시간30분. 루이즈가 웃음 짓는다. “우리가 장편영화 하나를 만든 셈이군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