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할리우드의 잃어버린 어떤 글래머를 맛볼 수 있는 성찬 <투어리스트>
2010-12-15
글 : 김도훈

앨프리드 히치콕은 스릴러를 만드는 모든 감독의 꿈이다. 히치콕의 분위기를 은근한 척 노골적으로 오마주하는 할리우드 스릴러를 우리는 끊임없이 봐왔다. 가장 반복적으로 오마주되는 영화는 역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다. 이 전설적인 걸작에는 우리가 스릴러에서 기대하는 거의 모든 것이 숨어 있다. 음모에 빠진 남자, 팜므파탈, 이국적인 배경. 올여름 개봉한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의 <나잇&데이>를 생각해보라.

<투어리스트> 역시 일련의 히치콕 오마주 리스트에 이름을 박아넣을 수 있는 영화다. 베니스로 가는 기차에 오른 미국인 투어리스트 프랭크(조니 뎁)는 영국인 미녀 엘리제(안젤리나 졸리)를 우연히 만난다. 그녀를 따라 베니스의 초특급 호텔에 짐을 푼 프랭크는 발코니에서의 진한 키스를 맛보지만, 엘리제는 키스 이상의 어떤 것도 허하지 않는다. 엘리제가 떠나버린 다음날 프랭크는 인터폴과 러시아 마피아에 동시에 쫓기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엘리제는 마피아의 돈을 수십억달러나 횡령한 뒤 성형수술을 하고 잠적한 남자친구 알렉산더의 지령을 받고 있었다. 알렉산더의 지령인즉 자신과 몸집이 비슷한 남자를 골라서 인터폴과 마피아로 하여금 대신 쫓게 만들라는 것이다.

<투어리스트>는 소피 마르소가 출연한 프랑스영화 <안소니 짐머>(2005)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전과 이야기는 거의 동일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꽤 다르다. <안소니 짐머>가 프랑스영화 특유의 모호한 정취를 품고 있다면 <투어리스트>는 히치콕 영화처럼 여유롭게 달린다. 종종 지나치게 유유자적해서 할리우드영화 주제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인데, 그 이유는 독일영화 <타인의 삶>을 연출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이름에서 찾는 게 좋겠다. 도너스마르크는 외부인(그러니까 ‘투어리스트’)의 눈으로 할리우드 고전 스릴러의 기운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 같다. 제이슨 본의 속도감을 기대하지 않는다면야 <투어리스트>는 할리우드의 잃어버린 어떤 글래머를 맛볼 수 있는 성찬으로서 나쁘지 않다.

<투어리스트>는 또한 안젤리나 졸리와 조니 뎁의 영화다. 성적인 화학작용이 생각만큼 큰 건 아니지만, 각자의 페르소나를 마음껏 발휘하는 두 스타는 후반부로 가면서 조금씩 처지는 서스펜스와 리듬을 온몸으로 밀어세운다. 특히 졸리는 그레타 가르보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같은 고전 여배우의 기운으로 관객에게 최면을 걸어댄다. <투어리스트>가 클래식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안젤리나 졸리는 클래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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