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머리에 수척한 인상의 남자가 스튜디오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수십번의 인터뷰를 겪어내며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한 스튜디오를 둘러보는 모습이 새삼스럽게 낯설어 보인다. 하정우는 아직 배우 하정우보다 <황해>의 구남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런 그를 이해해야 한다. 2009년 12월부터 올해 11월까지,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정우는 촬영현장에 머물며 구남 그 자체로 살았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 구남의 까칠한 얼굴과 수염과 짧은 머리”가 보였고, 생존을 위해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는 옌볜 조선족 구남의 애처로운 정서와 짙은 피로는 그대로 하정우의 것이 되었다. “어떤 작품을 할 때마다 여기는 영화현장이고 이것은 비현실이라고 늘 생각하지만, 유독 <황해>는 그 경계선이 모호했다. 그냥 <황해> 속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서쪽의 혼탁하고 모진 바다는 그곳에 몸담았던 배우를 여전히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황해>라는 “지독한 영화”에서 빠져나온 하정우는 또 하나의 난관을 상대해야 한다. <황해>가 나홍진-김윤석-하정우 조합의 또 다른 <추격자>일 거란 세간의 예상이다. 물론 이 짐작에도 이유는 있다. <황해>는 <추격자>만큼 거친 남자영화임이 틀림없고, 김윤석은 구남에게 빚 갚는 명목으로 살인을 청부하다 어떤 계기로 구남을 쫓는 ‘추격자’ 면가를 연기하며, 하정우는 사람을 죽이러 한국에 갔다가 오히려 그 사람의 살해장면을 목격하며 살인자 ‘누명’을 쓴다는 점이 <추격자>와 다르지만 여전히 정체를 숨기고 도주하는 인물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슷한 짐작으로 극장을 찾으려는 이라면 하정우의 반전과 같은 대답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아마 관객은 <황해>에서도 <추격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센 인물과 센 행동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드라마, 멜로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딸이 있고 부인은 한국에 돈 벌러간 평범한 옌볜의 택시기사 이야기. 그 평범한 남자가 다만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서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거다.” 모두가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센’ 인물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디테일을 살리는 것이 하정우의 과제이자 <추격자>를 예상하는 관객에 대한 영리한 배반이었다. 때문에 마작이나 조선족 사투리와 같은 구남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생소해 어설프게 대처하는” 아마추어 범죄자로서의 액션 또한 <황해>의 관전 포인트다. “성질은 더러운데 겁은 많고, 살아남기 위해 방어적이지만 한편으론 운이 좋아 살아남은 거고. 한마디로 가제트 형사 같은 느낌이다.”
한편 하정우는 <황해>로 “이전에 연기한 모든 캐릭터가 초기화되는” 경험을 했다. 영화가 구남이라는 조선족 남자의 여정인 만큼 홀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시간이 그 어떤 작품보다 길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되짚어보면 하정우는 상대배우와 함께 등장했을 때 저력을 발휘하는 배우였다. <멋진 하루>나 <추격자>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의 그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의 타이밍을 순발력있게 간파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익숙한 장기인 리액션이 멀어진 대신, 배우로서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찾아왔다. “이번엔 온전하게 내 것을 꺼내봤다.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정신적으로 고되고 힘들었던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을 통해 ‘연기자로서의 큰 산을 하나 넘은 것 같다’는 하정우의 다음 작품은 <의뢰인>이다. 살인사건에 연루된 미심쩍은 의뢰인을 변호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황해> 촬영으로 지칠 대로 지쳤을 텐데 곧바로 신작 준비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부담을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손꼽아 기다렸어요.” 그건 지독하고도 진득한 작품에 임하며 한 고비를 넘긴 배우로서의 해방감일까, 혹은 이번 작품으로 일궈낸 새로운 지평을 다른 작품에 임하며 확인하고 싶다는 의미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림 그리며 내 안에 물주기
11개월 동안 홀로 쫓기는 자를 가슴속에 품고 사는 건 고단한 일이다. 하정우는 구남을 연기하며 소진되는 기운을 그림을 그리며 보충했다고 말한다. 위의 사진은 하정우가 현장에서 틈틈이 그려 두달 만에 완성했다는 그림이다. 제목은 무제. 점과 선이 일사불란하게 오가는 것이 마치 지도를 보는 듯하다. “구글맵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한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냥 선이고 점인데 그걸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그 안에 많은 디테일들이 있잖나. 그런 점에서 맵을 닮은 이 그림은 <황해>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한편 하정우의 다른 그림 세점은 <황해>의 소품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극중 인물인 주영의 집을 조명할 때 등장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