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그 엔딩, 갸웃하면서 정감있네
2010-12-23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이층의 악당>에 아쉬워하면서도 손재곤의 다음 영화가 더욱 기다려진다
<이층의 악당>

손재곤의 두 번째 작품 <이층의 악당>은 전작이었던 <달콤, 살벌한 연인>과 꽤 다른 느낌을 준다. 물론 히치콕식 서스펜스를 기본 틀로 하면서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는 스크루볼코미디를 결합시키는 방식이야 전작과 공유하는 것이지만, <이층의 악당>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정련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이 (그것이 히치콕식 서스펜스이든 스크루볼코미디의 로맨스와 웃음이든 간에) 전체적으로 ‘넘쳐흐르는’ 과잉의 작품으로서 매력이 있었다면 <이층의 악당>은 전작의 그러한 과도함과 대결하려는 듯 영화의 전체적 상황을 의도적으로 통제하면서 웃음과 서스펜스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넘쳐흐르지 못하도록 스스로 차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층의 악당>이 <달콤, 살벌한 연인>과 같은 영화적 폭발력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훨씬 더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손재곤이 전작에 비해 한결 더 성숙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일정 수준으로 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장르의 이종교배에 성공

영화에서 가장 재밌는 장면 중 하나는 소녀의 안경과 관련해서 <록키>의 대사를 뒤집어버리는 순간이다. 손재곤은 이처럼 ‘미지의 것’에 이끌리는 감독이라기보다는 ‘기지의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적절히 활용하려는 감독에 가깝다. 실제로 <이층의 악당>은 <레이디킬러> 같은 범죄코미디뿐만 아니라 히치콕의 여러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지하실에 무언가 감춰져 있다는 설정이나 그곳에 숨어들기 위해 열쇠를 훔치는 등의 설정은 <오명>을 상기시키고, 맞은편 집에서 연주(김혜수)의 집을 늘 내다보고 있는 한 중년 여인은 <이창>의 제프(제임스 스튜어트)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손재곤 영화에서 히치콕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는 그가 히치콕의 여러 영화를 인유적 방식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의 서사적 진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하나의 틀로서 히치콕적인 장치를 활용하기 때문이다. 손재곤에게 히치콕식 서스펜스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하나의 그릇이거나 내러티브가 흥미를 잃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창인(한석규)이 어떤 음모를 숨기고 연주의 집에 동거하게 된다는 설정에서 나타나듯, 영화에서 범죄와 관련한 사건이나 상황은 인물과 인물, 그리고 인물과 관객간의 ‘정보의 불균형’을 초래한다. 하지만 손재곤은 이러한 장치를 단지 서스펜스의 창출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재능이 돋보이는 순간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하실 숨바꼭질 시퀀스에서 적절히 드러나듯이) 서스펜스적인 상황을 구축한 뒤 이를 상황극적인 코미디를 일으키는 장치로 능수능란하게 전환할 때다(다소 다른 맥락이지만 <이층의 악당>이 CCTV를 활용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손재곤은 히치콕이 서스펜스의 창출을 위해 곧잘 활용했던 ‘익명(공중)의 시선’을 CCTV로 변형하여 활용하는데, 그것은 서스펜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코미디를 위한 것으로 변주되어 있다).

<이층의 악당>의 매력 중 하나는 장르의 이종교배를 꽤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이층의 악당>은 <시실리 2km>나 그의 전작이었던 <달콤, 살벌한 연인>보다 이러한 혼합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즉, <달콤, 살벌한 연인>이 한 작품 속에 존재하는 개별 장르의 특징이 서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영화에 힘을 불어넣는 쪽에 가깝다면 <이층의 악당>은 서로 다른 장르를 한 작품으로 꿰맨 흔적이 겉으로 잘 표출되지 않고 적절히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각 장르가 공유하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적절히 장르를 교환하면서 영화적 흐름을 끌고 간다는 측면에서 비롯된 것도 사실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혼합된 개별 장르들이 서로 상대 장르를 규제하면서 그 잠재력을 억누르거나, 또는 한 장르의 진행을 위해 다른 장르의 특징이 움츠려들면서 발생한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령, 어느 바에서 창인과 연주가 술을 마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손재곤은 스크루볼코미디에 해당하는 이 장면을 꽤 길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때 ‘이를 가능하게 한’ 열쇠에 얽힌 서스펜스적인 상황은 자신의 힘을 적절히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순간의 출현마다, <이층의 악당>은 단순해지고 평범해진다.

그것은 바로 맥거핀!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이층의 악당>은 많은 장점을 지녔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다 활용했는가, 하는 점에서는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이다. <이층의 악당>이 맥거핀을 활용하는 방식 역시 그러하다. 영화는 시가 20억원짜리 골동품 찻잔뿐만 아니라, 여러 맥거핀을 영화 곳곳에 배치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텅 빈 존재로서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만 그럼에도 내러티브와 관객의 관심을 빨아들이면서 극을 전개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맥거핀의 중요성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층의 악당>은 너무 자잘한 맥거핀을 남용한 나머지, 그것이 극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거나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상으로 영화를 산만하게 한다는 문제를 노출시킨다. 더군다나 다수의 맥거핀이 내러티브에 유기적으로 제대로 밀착되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대표적인 것이 마당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이층의 악당>의 초반부에 연주의 집이 처음 비추는 순간, 관음증적으로 연주의 집을 훔쳐보던 이웃집 여인은 마당에 주목할 것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히치콕 마니아들이 이 마당을 보며 <이창>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연주가 마당 있는 집을 주장했던 사별한 남편을 이야기하는 장면까지 더해지면 골동품 찻잔이 마당에 묻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다. 물론 비밀은 땅속에 묻혀 있지 않다(어떤 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히치콕 자체가 하나의 맥거핀으로 활용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마당 주변에서 인물들은 여러 번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지만, 골동품이 묻혀 있을 수도 있는 그 공간이 상황의 긴장감을 더해주는 것으로까지 활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웃집 중년 여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창>의 제프와 그 시선의 대상이었던 ‘미스 고독’을 결합한 듯한 느낌을 주면서 히치콕의 변주라는 잔재미와 더불어 그녀의 시선이 창인의 행동을 제약하면서 어느 정도 서스펜스를 창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러티브 안에 그녀가 단단히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이층의 악당>은 서스펜스물이라기보다는 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아쉬움이 주변적이라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손재곤 영화의 방점이 (스크루볼)코미디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탱시켜줄 수 있는 전체적 틀은 범죄와 관련한 서스펜스적인 장치가 제공한다는 점에서 사소하게 치부할 문제는 아닌 듯하다. 그릇이 깨져버리면 그 안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손재곤의 영화적 재능은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차기작을 기대하게끔 하는 매력이 있고, <이층의 악당> 역시 그 단점을 상쇄할 만한 많은 장점을 가졌다. 무엇보다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전작의 제목처럼) 일반적으로 부조화스러운 것을 능청스럽게 조화시키는 손재곤의 재능은 <이층의 악당>을 돋보이게 하는 힘이다. 또한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 한바탕 벌이는 코믹 소동극은 정겹고 사랑스럽다 못해 코미디 장르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어떤 절실함까지 묻어나는 매력이 있다(특히 늙는다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한석규의 연기에서). 문득 <이층의 악당>은 참으로 영화의 엔딩을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엔딩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으면서도,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엔딩은 밉지 않다. <이층의 악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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