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전전긍긍, <도약선생>의 마지막 티켓!
2010-12-31
글 : 김혜리
<도약선생>의 배우들은 극중 의상인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무대 인사에 나섰다. 왼쪽부터 박혁권, 박희본, 나수윤 배우, 그리고 윤성호 감독.

12월10일

경험있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은연중에 깨닫는 사실. 배우에게 있어 외모의 매력은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운 불균형에서 나온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면 조형적 불완전함을 변명 따위 첨부되지 않은 자족적 아름다움으로 느끼도록 하는 막무가내의 설득력이야말로 비범한 배우의 요건이다. 현실적으로는 그 역도 성립한다. 우연히도 표준형 미모를 타고난 배우라면 그 안에 잠재된 균열과 일그러짐을 노출하는 순간 몇배나 아름다워진다. 단, 많은 미남 배우들이 누아르와 갱스터 장르의 작품을 선택하며 기대하는 바와 달리 일부러 거칠게 꾸민 분장이나 ‘망가지는’ 캐릭터는 대다수의 경우 이와 같은 도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이없지만, 결국 우리가 희구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고작? 송강호 배우가 선배 문성근의 말을 인용했던 인터뷰가 기억난다. “조직에서 교육받고, 규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동안 사람들이 잃어버린 얼굴이 있다. 배우의 일은 그 잃어버린 얼굴들을 찾아주는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슬프게도, 오늘날 자연스러움이란 보통 사람이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는 자질과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과거 인류가 신을 구하고 동경하듯, 훼손되지 않은 감정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을, 희귀한 ‘쌩얼’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사제(司祭)인 배우에게서.

미인이건 아니건 배우의 얼굴은 어딘가 ‘이상해야’ 한다. 그래서 자꾸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도록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이번주에는 기사를 준비하느라 내내 정유미 배우의 영화를 다시 보았다. 다분히 순정만화적인 눈동자와 경직된 턱이 그녀가 가진 매혹적인 불협화음이다. 감정의 덩어리가 복받치는 순간 그녀의 얼굴 근육은 그것을 유연히 감당해 표현하지 못하고 정직하게 일그러져버리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숨기지 못하는 눈동자는 천진한 호소를 멈추지 않는다. 볼 때마다 신기하고 이상스러운 한 가지. 정유미의 눈은 말끄러미 뜨고 있어도 깜박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동공 안쪽에서 뭔가가 타올랐다가 스러지기를 거듭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첫사랑 소녀를 연기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몇달 전 그 눈을 마주보다 무심코 흘러나온 나의 말에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많이 때묻었어요. 보실래요?” 짙게 화장하고 차려입은 레드카펫 사진이라도 보여주려는 걸까 기다렸지만, 막상 그녀가 휴대폰에서 찾아 보여준 이미지는 5년 전 <사랑니> 촬영 당시 열일곱 살 조인영으로 분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정유미조차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어떤 얼굴을.

12월11일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1>을 보면서 힘겨웠던 이유를 다시 생각한다. 7부에서 광야로 은신한 주인공 3인조 해리와 헤르미온느, 론은 일종의 텔레포트라 표현할 수 있는 마법을 빌려 다양한 공간을 순식간에 이동한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쉽다는 데에 있었던 게 아닐까. 적어도 내게 영화는 지금까지 한 공간에서 다음 공간으로 인간의 이동을 말이 되게 만들도록 애쓰는 과정에서 흥미로워진 매체였다. 자, 이 인물을 어떻게 이 장소에서 빠져나가게 만들 것인가? 영화감독이란 그런 문제로 만 1년을 고민할 수 있는 미친 사람들이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구사한 언어를 영상으로 뺨치는 <제리>를 내놓았고, 두기봉 감독은 턱 빠지게 황홀한 온갖 정밀한 허풍을 고안해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움직이는 방식, 그것을 창조적으로 고민하지 않을 때 영화는 과연 무슨 의미인가? 공기나 물의 고마움을 가끔 알아차리듯, 나는 새삼 깨닫는다.

12월12일

<L 매거진>의 평론가 벤자민 스트롱이 빈센조 나탈리(<큐브> <싸이퍼>)의 <스플라이스>를 10위에 올린 것까지는 참신하고 줏대있는 선택이었으나 그는 그만 “나탈리의 데뷔작은 크로넨버그적 테마의 위트 넘치는 업데이트다”라는 칭찬을 보태는 바람에, 네 편째 장편을 만든 나탈리 감독에게 길이 고마운 인물로 기억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연말결산의 계절에 모든 기자, 평론가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12월13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윤성호 감독의 신작 <도약선생>을 보다. 상영시각보다 1시간 이상 이르게 도착했건만 딱 한장의 표가 남아 있었다. 20여분을 기다리며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할까봐 매표소 모니터와 눈싸움을 벌인 끝에 승리. 영화제 스탭에게 매진 인증 사진을 증정받았다. 대구세계육상선수권 대회가 제작지원한 <도약선생>에는 등 돌린 애인에게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장대높이뛰기 훈련에 돌입하는 여자(나수윤)와 정체불명의 코치(박혁권)가 나온다. 영화 도입부는 앞으로 보게 될 영화가 여러 사람이 꾸는 꿈이 중첩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흘리는데, 이어지는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비약과 여담에 대해 관객을 채비시키는 ‘일러두기’가 아닌가 싶었다. 윤성호 감독의 영화와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형식은 랩이다. 메시지는 직설적이고, 지엽적 문제에 꽂혀 사설조로 늘어지기를 즐기며, 슬랩스틱이 스크래치를 넣기도 한다. 그의 영화를 지배하고 움직여나가는 요소는 운율이다. 여기서 대사는 종종 캐릭터와 주제를 드러내고 다듬는 통상의 서사 기능보다 장면에 리듬과 압운을 넣는 음악적 기능이 크다. <도약선생>의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노래 가사 한 소절은 다음과 같다. “도약은 패턴, (중략) 유턴, 오바마가 사는 워싱턴, 이청용이 뛰는 볼턴….”

상영이 끝나고 무대인사에 나선 감독님은 이 영화가 본인의 100%를 발휘한 작업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중 장대높이뛰기의 속성을 작은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 비유한 말이 재미있었다. 정확하지 않은 인용. “<도약선생>의 코치처럼 나 역시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말들로 스탭들을 설득한다. 작은 영화를 만드는 일은 풀쩍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는 행위와 비슷하다. 아주 잠깐 숨통이 트여서 호흡을 하지만 허공에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다.” 극중 코치는 점프 훈련을 시키며 공중에서 대화를 나누고 내려오라 선수에게 지시하지만, 답까지 얻어 내려오기에는 체공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12월14일

지난 십수년간 컴퓨터그래픽과 3D가 과연 영화의 미래인가라는 논의가 이루어질 때마다 나는 사람들의 대범함과 조급함에 주눅이 들곤 했다. 단일한 양식이 하나의 장르를 전적으로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가정은 실제로 대단히 공허하고 용감무쌍한 것이다. CG와 3D로 그만큼 강력한 요술이라면 좀더 재미난 화제는 CG와 3D로만 비로소 가능한 미학의 영화가 어떤 모습이냐는 상상 아닐까. 오늘 본 <트론: 새로운 시작>(이하 <트론>)이 흥분을 안겨준 건 그 때문이다. 3D와 CGI라는 양식의 순수한 잠재력을 현재로서 극단까지 활용한 영화가 마침내 도착했다는 인상이다. 보통의 경우 영화에서 CG는 실사와 봉합된 이음매가 표 나지 않을수록 높은 평가를 받지만 <트론>은 완전히 다른 발상으로 사이버스페이스를 구현하고 있다. CG를 진짜처럼 보이려고 전전긍긍하는 대신 아예 다른 진짜를 처음부터 만들면 어떨까?(알려진 대로 이는 픽사의 기본적 태도이기도 하다). 온기가 없어서 문제라면 아예 차디찬 것을 보여주면 안될까? 즉, CG와 3D로 현실을 증강하는 게 아니라, 독자적 현실을 고유한 리얼리티의 레벨에 맞춰 짓는 것이다. <트론>의 사이버스페이스가, <아바타>가 그려낸 원시적 유토피아보다 <반지의 제왕>의 중간계에 오히려 가까워 보인다면 그 때문이다. 누군가는 영화인지 미디어아트인지 모르겠다고 불평하겠지만, <트론>은 바로 그 과감함 때문에 <아바타>보다 훨씬 큰 예술적 영감을 주는 영화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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