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박해일에게는 아들이 생겼다. 상상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그의 해사한 외모가 지닌 연인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다혈질 백수였던 <괴물>의 남일, 성욕을 사랑으로 포장하지 않은 채 성욕 자체로 드러내는 <연애의 목적>의 유림, 그리고 집 나간 엄마를 찾듯 사라진 연인을 찾아 헤매던 <모던보이>의 해명까지. 돌이켜보면 박해일이 깊은 인상을 남겼던 캐릭터의 대부분이 성장하지 않은 남자였다. 개봉을 앞둔 <심장이 뛴다>에서 연기한 휘도 또한 그들과 같은 계보에 놓일 법한 캐릭터다. 그는 강남의 호스티스를 실어나르는 속칭 ‘콜떼기’로 도시에 기생하는 남자다. 어느 날, 자신을 버렸던 엄마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에게 원망과 죄책감이 동시에 찾아온다. 막연히 엄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설 때, 한 여자가 나타난다. 심장병에 걸린 딸을 살리려는 여자 연희(김윤진)다. 휘도의 엄마가 가진 심장을 딸에게 이식하고픈 그녀에게 휘도의 아픔이 보일 리 없다. 엄마를 살리려는 아들과 딸을 살리려는 엄마의 갈등을 그린 이 영화에서 박해일은 앞서 연기한 남자들보다 더 다혈질이고 직설적이며 거친 남자를 묘사하고 있다. 박해일은 “이제 머지않아 아이 아빠를 연기하게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래도 아직은, 박해일을 통과한 철들지 않은 남자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이끼> 이후, 최근까지 가장 화제가 된 박해일의 뉴스는 인터넷에 떠돈 ‘박해일 피콜로’ 사진이었다. (웃음)
=그 사진을 보고 혹시 정말 내가 학교 다닐 때 술 먹고 이렇게 논 적이 있었나 의심했었다. (웃음) 그 사진 말고도 ‘박해일 초년병’이란 제목으로 돌아다니는 사진이 있다. 남자가 조랑말을 타고 웃는 사진인데, 모두 내가 아니다. 그런데 박해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또 없더라. (웃음)
-<심장이 뛴다>는 특정한 장르를 가진 영화가 아니다. 관객 입장에서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선뜻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점이 걱정스럽지 않았나.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때부턴가 특정 장르를 생각하고 가는 방식이 불편하고 힘든 상황이 오더라.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어떤 영화로 보였나?
-말을 만들자면 질병을 다루는 멜로영화의 서스펜스 버전이랄까.
= 그럴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나리오에서 감정의 호소를 느꼈다. 무엇보다 휘도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었다. 연극 <청춘예찬>에서 연기한 청춘의 느낌이었다. 똑같은 건 아니지만 나름의 희망을 가진 방황하는 청춘이라는 점에서 공감했던 것 같다. 지금보다 몇살이라도 더 어릴 때 연기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어느덧 결혼도 했고, 영화를 찍는 도중에 아이도 생겼으니까. 더 나아가서 말하면 휘도가 나에게는 청춘의 방점을 찍는 캐릭터이기도 할 거다.
-휘도는 지금까지 연기한 남자 중에서 가장 거친 성격과 짧은 학력을 가졌고, 가장 열악한 삶을 사는 남자다. 배우로서 상당히 재밌지 않았나.
=윤재근 감독님은 함께 만들면서 하나씩 팁을 던져주는 스타일이었다. 나 역시 훨씬 능동적인 태도가 가능했다. 휘도가 ‘콜떼기’라는 직업으로 출발하는 것도 경쾌하게 보이더라. 그렇다고 내가 예전에 연기한 캐릭터와 아예 이질적이거나 무관한 것도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연애의 목적>의 유림이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거다.
-휘도가 자신을 버린 엄마에게 가진 감정을 정의하는 게 어렵지 않았을까 싶었다.
=일단 결핍이 많은 친구인데, 그런 상처를 엄마에게 화풀이하고 싶었을 것 같다. 차라리 낳지를 말지, 낳았으면 책임을 지든가… 이런 감정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결국 엄마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는데, 이 간극 또한 같은 선상에서 고민했다. 사람의 톤이 그렇게 쉽게 변할 것 같지 않더라. 이 친구도 엄마의 생명에 대해 뚜렷한 답을 가진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한테도 감정이 심하게 요동치면서 변하는 식으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휘도가 가진 습관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가지고 이야기의 종점까지 끌고 갔다.
-김윤진과 함께 연기하는 건 어땠나.
=에너지가 너무 좋더라. 양쪽이 정말 절실한 상황인데 장르적인 상황에 기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적인 톤으로 접근해야 하는 거라 진짜 힘들었을 거다. 사실 <심장이 뛴다>가 처음에는 남자 둘의 대결이었다. 엄마를 살리려는 아들과 딸을 가진 아빠가 갈등하는 거였고, 그때 나온 가제가 ‘대결’이었다. 남자 투톱을 내세운 스릴러영화가 많던 시기가 있었지 않나.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보다는 엄마가 등장하는 게 훨씬 재밌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의 개념 자체가 확 바뀐 거다. 덕분에 스릴에만 매몰되지 않고 사람 사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가진 영화가 된 것 같다.
-<심장이 뛴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실제의 박해일은 어떤 아들일까 궁금했다.
=평범한 아들이었다. 그런데 또 엄마를 평온하게 해드렸나 생각하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좋은 대학에 나와 대기업에 취직하는 아들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부모님도 나한테 크게 욕심을 내지 않으셨다. 어릴 때 경기를 좀 앓았다. 초등학생 때는 편도선 수술도 했고,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모님으로서는 건강하게만 자라주었으면 하는 입장이셨을 거다. 그렇다고 생활이 풍족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나를 애지중지하신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살던 곳이 신정동 일대였다. 그때 아버지가 목장을 하셨다. 소, 돼지, 개를 키웠는데 당시 살던 주변 환경이 전원에 가깝다 보니 부모님도 극성스럽게 뭔가를 강요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사고쳐서 부모님을 학교에 오시게 한 적도 없었나.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난 적은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내가 좀 놀았다고 본다. (웃음) 그런데 정말 오토바이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침마다 388번 버스를 타고 화곡고등학교로 가야 하는데, 애들이 많아서 30분 동안 버스에 매달려 다녔다. 그걸 3년 동안 하려니 미치겠더라. 자전거로는 너무 머니까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한 거다. 그러다 하필 수능시험 보기 전날에 사고가 난 거지. 그때 난 사고가 <한겨레>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좌중 웃음) 결국 수능시험은 학교 양호실에서 누워서 봤다. (웃음)
-아버지로서의 박해일은?. 아들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잘 모르겠더라. 나중에 낳아보면 알 거다. (웃음) 남자마다 다를 텐데, 난 나를 닮은 아이가 정말 신비로워 보이거나 좋아 미치겠다 이런 과가 아닌 것 같다. ‘아이고, 미안하다. 어쩌다보니 이런 힘든 세상에 널 내보냈구나’, 이런 생각이었다.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 집에서 놀고 있는 아빠를 보여주기는 싫다. (웃음)
-아이 이름이 뭔가.
=‘그림’이다. 박그림. 내가 지었다. “네 멋대로 세상을 그려나가라”는 뜻이다. (웃음)
-아직 영화에서 아이 아빠를 연기한 적은 없었다.
=<국화꽃 향기>에서 아이가 있는 상황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 적은 있었다. 이제 곧 슬슬 넘어가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는 않나 보다.
=나이의 경험으로 볼 때, 한 템포 늦게 가고 싶은 게 맞다. 간만 보고 가는 것보다는 좀 못 미치더라도 천천히 가는 게 좋으니까. 그런데 또 내가 그렇게 계산적이지 못한 게 막상 지금 나더러 70대 노인을 연기하라면 또 그렇게 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한 작품씩 방점을 찍고 넘어가는 게 쉽지 않다. 어떤 때는 내 자신이 대견스러울 때도 있는가 하면(웃음), 내가 과연 잘 헤쳐나가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사실, 답이 없는 거다.
-조성희 감독의 <짐승의 끝>에도 출연했다. 이미 과거에 독립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기운을 얻고픈 마음이 있었을 것 같더라.
=그런 거다. 처음에는 PD님한테 메일을 받았다. 영화아카데미에서 이런 작업을 하는데, 교수님이 케빈 스페이시 같은 배우를 캐스팅하라고 하셨다고. 그래서 꼭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바로 “그럼 전 아니잖아요?”라고 답장을 보낼까 했다. (웃음) 어쨌든 시나리오를 읽어보았는데, 어떤 영화에도 기대지 않은 작품이었다. 내가 이걸 완성된 영화로 보고 싶더라. 사실 지금까지 출연했던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런 궁금증으로 출발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배우로서 매번 하던 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을까.
=물론 온전히 100% 좋아할 수 있는 작품만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박해일이란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내가 한번 버틸 수 있는 자리가 있겠다 싶은 작품들일 것이다.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형식에 맞춰야 하는 상황이 있고, 그건 존중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내가 마음이 편하지 않은 선택을 하기보다는 조금 고생하고 감수할 게 많더라도 마음 편하게 가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인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