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아버지는 살해되어야만 하는가. <트론: 새로운 시작>을 보고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 중 ‘아들, 혹은 최초의 인간’에 실린 문장이 떠올랐다. ‘아이란 그 자신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고 부모가 그를 대표하는 것이다.’ 확실히 <트론: 새로운 시작>은 1982년 최초의 CG영화로서 지대한 영향력을 남긴 <트론>에 비해 허술한 구성과 실망스러운 이야기로 인해 단점을 먼저 찾고 싶어지는 영화다. 반대로 말하자면 <트론>이 이룬 빛나는 성취는 고스란히 <트론: 새로운 시작>의 짐이자 극복 과제가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아버지를 뛰어넘지 못한 이 못난 아들을 위해 몇 마디 변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과연 <트론: 새로운 시작>에 <트론>은 극복의 대상이었나. 이 단순한 질문은 현실과 가상세계의 거울관계처럼 몇 가지 평행세계 위에 겹쳐진다. 주인공 샘(가렛 헤드런드)과 아버지 케빈 플린(제프 브리지스), <트론: 새로운 시작>과 <트론>, 가상과 현실, 그리고 디지털과 필름.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 동경과 거부. 동경하되 괴로워하거나 미워하지만 닮아가거나.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항상 함께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이 감정의 교차는 결국 필연적으로 정체된 아버지 세계에 대한 파괴를 요구한다. 아버지의 세계라는 연마된 선로 위에서 쉬지 않고 굴러가는 동경과 거부의 철륜은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향해 질주한다. 하지만 <트론: 새로운 시작>에서 샘에게 아버지는 동경과 모방의 대상으로 그려질 뿐 거부의 철륜은 좀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영화에서 단 한번 크루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 인내하라는 아버지의 지혜를 샘이 거부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이내 실수를 깨닫고 아버지의 세계로 다시 포섭되고 만다. 멈춰버린 세계에 대한 극복이 생략된 동경과 모방의 결과, 아들(샘 혹은 <트론: 새로운 시작>)은 결국 최초의 인간이 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될 의지가 없어 보인다.
쉼표 아닌 도돌이표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저’와 ‘프로그램’에 대한 나름의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냈던 1982년의 <트론>에 비해 <트론: 새로운 시작>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적통 전승이라는 디즈니표의 원형적 혹은 전형적 영웅서사를 반복, 답습하는 데 그친다. 영화의 출발이 ‘이야기’가 아닌 ‘디자인’이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모방의 욕망을 위해 선택된 이같은 빈약하고 긴장감없는 서사야말로 이 영화를 두고 실망하는 목소리들의 근거이며 동시에 <트론>의 영광을 좇고자 하는 <트론: 새로운 시작>의 욕망이 드러난 지점이다. <트론: 새로운 시작>은 이야기상으로는 30여년이 지난 <트론>의 속편에 해당하지만, <트론>의 ‘다음’ 영화가 아닌 예전 <트론>의 완벽했던 세계 속에 편입해 다시 하나되기를 갈망하는 듯 보인다. ‘거부’라는 한쪽 바퀴를 잃은 샘 혹은 <트론: 새로운 시작>의 세계는 아버지의 영광을 해체하는 대신, 과거 1982년에 이루지 못했던 완벽에 대한 환상을 재현하는 데 몰두한다. <트론: 새로운 시작>의 욕구는 아버지의 세계-<트론>의 완벽한 구현이 있기에 이를 위해서라면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긁어모으는 작업에도 일말의 거부감을 품지 않는 것이다.
혼종성이라는 안이한 해답
사이버 펑크 운동의 시작을 알린 <트론>은 그 혁명적 등장 이후 숱한 영화감독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매트릭스>부터 <공각기동대>까지 직접적으로 사이버 스페이스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제는 익숙한 가상공간, 가상현실이라는 말은 <트론>의 등장을 통해 비로소 그 구체적인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된 CG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 역시 <트론>이었다. 이렇게 <트론>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던 빛나는 창작물의 결과를 <트론: 새로운 시작>은 적극적으로 다시 재수용한다.
1982년의 <트론>은 비록 흥행에서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당대의 반응과 CG의 기술적 파급력으로 미뤄볼 때 여러 측면에서 지금의 <아바타>와 3D를 떠올리게 한다. 이제 <트론>의 연장선에서 완벽한 세계의 완성을 꿈꾸는 <트론: 새로운 시작>은 거꾸로 <아바타>가 보여준 디지털 혼종성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아니, <아바타>마저 모방한다. 완벽이라고 착각되었던 가상세계 그리드의 진정한 결과물로 사람과 프로그램이 섞인 중간형태, 자생 프로그램인 ISO 쿠오라(올리비아 와일드)를 내세움으로써 모든 갈등의 봉합을 시도하는 서사의 태도는 영화 바깥에서도 손쉽게 발견된다. 차가운 기계 몸에 따뜻한 심장. 섞일 수 없는 것이 섞일 때 문제가 해결된다는 믿음. 이 영화에서 <스타워즈>의 광선검을 연상시키는 무기와 그대로 차용해온 몇몇 대사들은 물론이거니와 플린의 모습에서 <스타워즈>의 오비완 케노비 같은 스승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상세계의 구원자라는 설정 역시 <매트릭스>에서 이미 접했던 것이며 샘을 전적으로 돕는 여성 파트너 쿠오라는 <매트릭스>의 트리니티와 어딘가 닮아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혼합과 차용은 아마도 그 모든 소스의 원천이 <트론>에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겠지만, 기저에는 다시금 스스로 완성시키지 못했던 신화의 원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감지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중요한 오류를 범한다. <트론>이 구현한 가상세계의 매력은 충돌하는 두 세계의 넘을 수 없는 이질감에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님에도 스스로 그 경계를 손쉽게 무화시켜버리는 것이다. <트론: 새로운 시작>이 세계의 완성을 위해 긁어모은 아버지의 유산은 도리어 이 영화의 독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타락한 클럽 주인 주스는 <매트릭스>의 메로빈지언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어딘지 빌려온 듯한 인상의 캐릭터는 이야기에 밀착되지 않아 원작만큼 매력적이지 못하다. 그 뿌리가 한때 <트론>에 있었다 해도 이미 많은 변화, 변형을 겪은 ‘빌려온 아들들’은 어디까지나 타인의 자리에 머물며 결코 ‘최초의 인간’이 되지 못한다.
완벽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디지털은 완벽의 세계다. 비록 그것이 8비트의 게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그 안에서 완벽함을 지닌다. 영화의 마지막 케빈 플린의 죽음은 아들이 투쟁의 대상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닌, 오랜 사유 뒤에 완벽한 세계는 정지된 세계에 불과함을 깨달은 아버지 스스로의 마감이다. 세계를 여는 것에도, 닫는 것에도 아들의 의지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트론: 새로운 시작>은 <트론>이 남긴 유산과 흔적들을 흉내내기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못난 아들을 긍정하고 싶다. 왜 굳이 지금 <트론>을 다시 만들어야 했을까. 단순히 당대에는 구현하지 못했던 상상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술이 비로소 축적되었기 때문에 만든 것이라도 좋다. 적어도 여기엔 표현의 욕구, 완벽에 대한 갈망이 있다. 사실 놀라운 CG의 발전이 구현한 ‘완벽’한 가상세계는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현실세계와 크게 구분되지 않을 만큼의 육중한 질감이 가상의 기계미를 앗아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순간 <트론: 새로운 시작>이 구원받는 것은 <트론>이 탄생시킨 CG 기술이 아니라, 3D의 평면 감각이 주는 이질감과 현실인 동시에 현실 같지 않은 공간감을 자아내는 효과적인 사운드의 힘이라는 점이다. ISO의 탄생처럼 어쩌면 의도와는 다를지도 모를 아름다움의 탄생. 어떤 경로를 통해서 도달했건 이 영화가 가상세계의 재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이루어낸 독보적인 가상의 공간감은 또 다른 표현의 성취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어쩌면 완벽이란 결코 도달할 수도 없고 도달해서도 안되는 신기루일지 모르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완벽이 아닌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다. 끝내 전작의 그늘을 극복하지 못했을지라도, 설사 다른 영화에 영감을 주는 ‘최초의 영화’가 될 수 없을지라도, <트론: 새로운 시작>의 발버둥, 그 움직임마저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송경원 여전히 영화 공부 중. 내가 영화를 응시할 때 영화도 나를 응시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고 쓰고 말하지만 영화의 입을 열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