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성장은 고통의 다른 말인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것 <윈터스 본>
2011-01-19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가진 것이 없는 이에게 세상은 잔혹하다. 겨울은 그런 잔혹함을 물리적으로 더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런 잔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이 스크린 위를 피로 물들이거나 신체를 난도질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 요즘, 데브라 그래닉의 절제에 가까운 <윈터스 본>의 연출 방식은 신선하다 못해 도덕적으로 느껴진다. 감독은 육체에 대한 폭력을 선정적으로 전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절실히 통감하게 하고 정신적인 공포로까지 전이시키기 때문이다. 학생 시절의 단편영화 <스네이크 피드>(Snake Feed)부터 장편 데뷔작 <다운 투 더 본>(Down to the Bone)까지 선댄스의 주목을 차곡차곡 받아왔던 그녀는 이 작품으로 각본상과 심사위원대상까지 거머쥐었다.

미주리주의 오자크 지역, 열일곱살의 리 돌리(제니퍼 로렌스)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어머니와 어린 동생 둘을 돌보며 살고 있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그들에게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마약 제조 혐의로 입건되었다 보석으로 풀려난 아버지가 여전히 어디선가 마약을 제조하고 있으며, 그가 재판 날짜에 맞춰 출두하지 않으면 보석금 담보로 잡힌 집과 땅이 모두 경매에 넘어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날부터 리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마을의 어른들을 찾아다닌다. 마을 전체는 마약에 찌들어 있고 모두 마약 제조업에 가담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행방은 묘연하다. 제발 마을을 쑤시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큰아버지 티어드롭(존 호키스)의 경고를 무시한 리에게 동네 어른들은 무서운 얼굴로 신체적, 정신적 위협을 가한다.

흥미로운 것은 리가 찾아다니는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귀환’이나 ‘정상 가족의 회복’ 같은 낭만적 명제는 이 영화의 관심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버지는 죽었다. 완전히 소멸되었다. 그러므로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리 돌리가 찾아다니는 것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이다. 그래야만 법원에 출두해야 할 의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남은 세 가족이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모두 아버지가 죽었다고 말하지만 그가 어디서 어떻게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리는 그것을 알려다가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간다. 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배하고 있는 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모두 어떤 법칙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행위는커녕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행위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리가 알게 된 사실이라고는 아버지는 그 룰을 어겼고 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는 것뿐이다.

이 영화는 진실을 꽁꽁 숨겨두었다가 주인공의 영웅적 탐험에 의해 그것이 밝혀지고 진실의 회복에 안도하며 극장문을 나서게 만드는 종래의 미스터리/스릴러물과는 전혀 다른 길 위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두 가지 이유에서 끊임없이 긴장하게 된다. 하나는 언제 누가 나타나 리를 어디로 끌고 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리의 가족이 언제 집 밖으로 쫓겨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리는 매번 등장한 이들에게 ‘내가 당신을 따라갈 정도로 바보인 줄 아냐’고 물어보지만 따라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고 그녀의 가족을 지켜줄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녀가 다람쥐 가죽을 벗기기를 주저하는 어린 동생에게 했던 말인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는, 정확하게 그녀가 처한 상황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녀에게 성장은 고통의 다른 말인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성장을 통해서 그녀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세상은 좀처럼 알 수 없는 곳이란 사실뿐이다.

평생 오자크 지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왔던 대니얼 우드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데는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그 산골 마을에서 장작을 패고 사냥을 하며 동생들을 돌보아온 믿음직한 맏이로서 살아온 듯 움직인다. 어른들의 위협에도 움츠러들 줄 모르는 리의 당찬 눈빛은 어쩌면 14살에 배우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모를 설득해 켄터키에서 뉴욕으로 올라왔던 제니퍼 로렌스의 몸에 이미 각인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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