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스 본>과 <아이 엠 러브>의 가벼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월6일
<윈터스 본>(Winter’s Bone)은 극장으로 향하기 전에 집게손가락으로 가만히 제목을 쓸어보게 되는 영화다. 겨.울.의.뼈. 차고 딱딱하다. 뜻밖에 진짜 뼈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 미주리주 벽촌의 풍광은 제목을 대뜸 납득시킬 만큼 황량하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할리우드 주류영화를 통해 인식하는 미국의 이미지는 기실 뉴욕 아니면 LA의 그것임을 상기하게 된다. <윈터스 본>에 나오는 것 같은 아메리카는 10대들이 오지로 캠핑을 가서 하나씩 죽어나가는 호러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다.
열일곱살 소녀 리 돌리(제니퍼 로렌스)는 <더 로드>의 폐허와 큰 차이가 없는 마을에 산다. 마약사범 아버지는 집과 토지를 보석금으로 저당잡힌 채 종적이 묘연하며, 정신을 놓아버린 어머니는 <길버트 그레이프>의 엄마처럼 금치산자에 가깝다(<길버트 그레이프>를 떠올린 건, 제니퍼 로렌스의 얼굴에 15년 전 그 영화에 출연할 즈음 줄리엣 루이스의 표정이 있어서인가보다). 아버지를 찾아나선 소녀의 탐문에 답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안개마을>과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공동체가 그랬듯이 음침한 침묵의 규약에 꽁꽁 매어 있다. 혈연으로 얽혀 마약 장사로 생활을 이어가는 그들이 소녀에게 쥐어줄 수 있는 건 약간의 돈과 음식, 그리고 “알려고 하지 마라”는 대답뿐이다. 리의 추적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법정으로 데려가 가족이 길바닥에 나앉는 사태를 막으려는 시도지만 뒤로 갈수록 현실적 목표는 휘발되고 ‘어찌됐든 끝까지 가야만 하는’ 운명의 기운을 띤다. 리 돌리는 무서운 징벌이 내려질 것을 알면서도 노천에 버려진 오빠의 주검을 수습해 합당히 매장한 안티고네의 현신이다. 안티고네의 신념이 숙부인 왕 크레온의 실정법에 맞섰듯이 리의 윤리는 마을 공동체의 관습법에 저항한다. 소녀에겐 그것이 바로 우주를 지탱하는 뼈다. 인류의 유구한 믿음 하나. 아무리 남루한 생을 거쳤다 해도 유골을 함부로 부리면 다음 생의 부활은 없다. <윈터스 본>의 마을은 꼭 <황해>의 그곳처럼 무참한 개병이 돌 것만 같지만 영화의 결론은 <황해>보다 낙관적인 편이다. 천사나 선인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남은 어린 삼남매는 ‘대체로 나쁜’ 사람들이 이따금 허락하는 한줌씩의 선의를 모아 삶을 지탱할 것이다.
1월7일
보는 동안 덤덤했는데 보고 난 연후에 청어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영화들이 있다. 배우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리 돌리가 자꾸 밟힌다. 참 이상한 스타일의 영웅이다. 말을 많이 하지도, 격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다만 고집을 꺾지 않는다. 그녀는 어린 두 동생의 끼니를 챙길 뿐 아니라 요리법을 보고 배우게 하고 총 쏘는 법을 가르치며 다람쥐를 잡아 털과 내장을 다듬는 법까지 익히게 만든다. 극한의 빈곤과 매일 대면하면서도 “남이 권하기 전에 절대 달라고 청하면 안돼”라고 아우에게 이르고 길 잃은 동물들을 거둔다. 근래 이 소녀만큼 자존심 센, 영화의 영웅을 본 적이 있었던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그리고 나는 예술가와 마피아가 주인공인 영화를 남부럽지 않게 보았다). 더구나 그녀의 부모가 무능하거나 무책임하며 숨통을 틔워줄 만한 어른이나 친구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는 흡사 신화의 세계에서 뚝 떨어진 인물 같다. 드물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1인칭 내레이션을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건 그 때문이다. 주석이 필요했다.
<윈터스 본>에 잔뜩 웅성거리는, 낙엽같이 버석한 얼굴을 한 마을 여자들 가운데 배우 셰릴 리가 스쳐갔다. 오래전 <트윈픽스>의 첫 장면에서 생생한 꽃다발처럼 아름다운 시체로 등장했던 그녀는 살아 있는 채로 내면이 죽어버린 여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1월9일
추운 영화를 본 탓인지, 기온이 떨어진 탓인지 양지바른 그림을 보고 싶어져서 피에르 보나르의 화집을 들췄다. 그의 실내풍경에는 따뜻한 물이 찰랑이는 욕조가 있고, 방과 뜰이 맺는 관계에 대한 가장 다양한 명상이 있다. 활동 시기가 일부 중첩되는 화가 피카소는 보나르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를 이렇게 밝혔다고 전해진다. “회화는 감수성 문제가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권력을 나꿔채야지 자연으로부터 정보와 조언을 구하는 작업이 아니다.” 피카소에게 회화가 혁명이었다면, 보나르에게는 도피였다. 실제로 보나르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천직이란 말이 내게 맞는지 확신이 없다. 나를 이끈 건 예술 자체라기보다 예술가의 인생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단조로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썼다. 하지만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실로 열심히 도피했다는 점이다. 친밀하고 안온한 그림을 무수히 그려낸 이 내성적인 화가는, 실생활에서는 안락함에 익숙해지면 자유는 끝장이라는 신조 때문에 딱딱한 의자를 푹신한 의자로 바꾸라는 친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일흔이 넘도록 은행계좌를 열지 않았고 32년을 함께 살고 나서야 연인과 결혼했으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두 차례 사양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 나도 내버려둬라, 세상이 나를 가만두는 한 협조하겠다는 자세랄까. 단순한 삶을 유지하는 데에는 복잡한 노력이 필요하다.
1월11일
부와 취향의 세련된 전시가 무엇인지 본때를 보여주는 <아이 엠 러브>는 현대극이지만 불가피하게 코스튬 드라마(시대극 장르의 별칭)와 유사한 방식으로 관람하게 되는 영화다. 고급스런 가구와 미술품, 유행과 무관하게 완벽히 재단된 의상, 매혹적인 요리들- <씨네21>에 칼럼을 연재했던 박찬일 셰프에게 확인해볼 사항이지만 한편의 영화에서 새우가 이렇게 결정적 역할을 한 예가 <포레스트 검프> 이래 달리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 <아이 엠 러브>가 제공하는 스펙터클의 절반이라면, 다른 한쪽에는 고전 예술영화에 경의를 바치는 많은 이미지들이 빛난다. 이 두 종류의 ‘명품’을 감별해내고 맛보는 재미는 이 영화가 제공하는 쾌락의 큰 부분이다. 루카 구아다그니노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주인공이 결국 뛰쳐나오게 되는 레키 가문의 인테리어-혹은 가풍과 취향을 공유한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에 비견하는 찬사에 동의하긴 어려우나, <아이 엠 러브>는 대체로 유려하며 몇몇 장면에서 독창적이다. 예컨대, 루카 구아다그니노 감독이 러시아 출신 며느리 엠마(틸다 스윈튼)가 레키 가문 안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표현하는 매너는 극히 온건하고 미묘하다. 엠마는 실크 스카프 같은 미소를 두르고 흠잡을 데 없는 파티를 준비하지만, 영화는 그녀가 홀로 옷을 갈아입거나 파티가 진행되는 동안 조용한 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살짝 과도한 시간과 공을 들여 응시함으로써 석연치 않은 여운을 남긴다.
두 요소가 빠졌더라면 <아이 엠 러브>는 고답적이고 허영스런 영화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첫째는 안정과 번영의 표상처럼 보이는 풍경에 불안스런 부정맥의 박동을 불어넣는 존 애덤스의 음악. 두 번째는 말할 나위도 없이 주연 틸다 스윈튼이다. 공동 제작자라는 점은 차치하고 그녀의 아우라와 연기는 이 영화가 태생적으로 감수해야 하는 상투성을 상쇄한다. <올란도>에서도 일찍이 입증한 대로 스윈튼의 얼굴은 새로운 세상에 눈 뜨는 여인의 초상에 절대적으로 어울린다. 아니, 그녀의 얼굴 자체가 각성이다. 좋은 배우라는 객관적 조건을 넘어 틸다 스윈튼은 <아이 엠 러브>에 딱 맞는다. 후광 같은 금발과 흰 피부는 그 자체로는 예찬할 대상이 아니나, 이 영화에서는 장대한 골격, 차가운 발음과 맞물려 엠마를 이탈리아 혈통의 시집 식구들 사이에서 자연히 도드라지게 한다. 표면이 전부이며 본질인 이 영화에서, 그것은 매우 긴요한 자산이다. 틸다 스윈튼의 엠마가 시아버지의 생일 만찬에서 선물상자에서 풀어낸 리본을 손가락에 단정하게, 그러나 초조하게 돌돌 감는 장면. 나는 아마 그 순간으로 이 영화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