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4일
<피나 바우쉬의 댄싱드림즈>는 무용극 <매음굴>(Kontakthof)의 2008년 공연 메이킹 다큐멘터리다. 1978년 초연된 <매음굴>은 2000년에 65살 이상 아마추어 연기자들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올려졌는데 30주년을 맞은 2008년에는 14살 이상 청소년들이 공연하는 세 번째 판본으로 부활했다. 인간과 인간이 살을 맞댔을 때 일어나는 그리움과 착취의 풍경을 무용수들의 육체로 보여주는 <매음굴>의 세계에, 10대 소년 소녀들이 머뭇머뭇 걸어 들어가자 이성과의 첫 관능적 접촉을 상징하는 첫사랑이 새로운 주제로 깃들었다.
“울려던 것이 아니었어요.” 소녀 연기자 중 한명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맞아, 저런 것이었어. 스크린 위의 그녀를 보다가, 연기를 배우고 싶었던 10대 마지막 해 여름의 나를 퍼뜩 기억해냈다. 당시 나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행여나 있을지 모르는 내 안의 좋은 것을 누군가 끌어내주길, 내가 찾을 수 없는 뇌관을 외부의 손길이 터뜨려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연극과 무용을 하나로 만든 피나 바우쉬의 탄츠시어터(Tanztheater)는 고난도의 동작을 성취하는 예술이라기보다 우리가 잊었던 본연의 몸짓을 회복하게 하는 싸움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모두가 도달해야 할 최고의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배우마다 이상적인 자세가 다르다는 점이 특히 멋지다. 한 소년이 지혜롭게 핵심을 지적한다. “제겐 여자친구가 있지만 연애를 할 때에도 피나의 작품에서처럼 서로를 만지지는 않아요.” 안경을 낀 소녀, 뚱뚱한 소년, 트레이닝복을 입은 소녀, 헐렁한 정장을 걸친 소년. 다큐멘터리 속 10대 배우/무용수들은 달리면서 웃기를, 마주 보며 한 꺼풀씩 옷을 벗기를 연습한다. 자유롭게 움직이면 생각이 뒤따라 자유로워진다. 무대에 선 배우/무용수들 사이의 간격과 우연한 표정과 충돌, 모든 임의로운 것들이 의미로워진다.
1월16일
적어도 메이킹 다큐멘터리는 완성된 작품에 비추어 무의미한 기록을 생략하고 창작의 인과관계에 집중해 편집할 수 있다. 즉, 메이킹의 결과물과 상충할 염려가 적다. 반면 창작자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텍스트의 해부와 편집에는 어딘가 민망한 구석이 있다. 예컨대 오래전 죽은 화가의 그림을 엑스레이와 적외선으로 촬영해 원래 밑그림의 형상을 투시하고 어떤 망설임을 거쳐 수정했는지 낱낱이 밝힐 때, 작가가 생전에 출판하지 않기로 결심해 서랍 깊숙이 묻어두었던 원고를 유족이 뒤늦게 책으로 펴낼 때 그러하다. 최근에는 <돌아온 꼬마 니콜라>를 읽으며 혼자 괜히 스스러웠다. 한낱 가벼운 기사에 불과하지만 내가 마감하기까지 원고를 조몰락거린 과정을 독자들이 낱낱이 들여다보게 되면 얼마나 민망할까, 무심코 대입하면 더욱 그렇다.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진 않지만 이토야마 아키코의 소설 <바다에서 기다리다>에는, 현대사회의 진정한 친구는 갑작스런 사고가 닥쳤을 때 서로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조용히 파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어찌나 세차게 공감했던지!
1월21일
여태 디즈니가 <라푼젤>을 만든 적이 없었나? 신작 소식을 듣고 1초 동안 갸웃했더랬다. 하긴 그림 동화의 라푼젤은 공주도 아닌 평민인데다 사연도 엽기적이다. 임신한 채 머리칼을 잘려 벌판으로 내쫓기고, 애인은 가시덤불로 추락해 눈이 멀다니. 그럼에도 디즈니의 50번째 장편 애니메이션은 미키 마우스의 놀라운 소화력을 입증한다. <라푼젤>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부터 <미녀와 야수>에 이르는 고전 각색 전통의 복원이며 1990년대 디즈니 클래식 뮤지컬의 귀환이다. 패러디의 제스처는 배제되었다. 넓은 세상을 꿈꾸는 소녀의 아리아가 나쁜 계모/마녀의 위협하는 노래와 맞서고 주인공을 응원하는 합창과 군무가 울려퍼지며 왕좌의 적통(嫡統)은 기어이 회복된다. 심지어 공주의 머리 위를 맴돌며 지저귀는 파랑새들까지 돌아왔다. ‘사악한 계모’ 캐릭터라면 디즈니 라이브러리에 차고 넘치지만 <라푼젤>의 마녀 고델은 허브를 재배하듯 라푼젤을 가둬놓고 주기적으로 그녀의 몸에서 이익을 취한다는 점에서 남달리 무시무시하다. 일부 장면에서는 <캐리>의 광신도 엄마까지 연상시킨다. 외딴 탑에 감금된 라푼젤이 머리를 풀어 마녀를 끌어올리는 장면을 거듭 보며 거꾸로 창틀에 머리칼을 묶고 내려간 다음 단짝친구 파스칼(카멜레온)에게 매듭을 풀어달라고 하면 안 될까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황급히 묻어두었다.
<드래곤 길들이기>처럼 도드라지진 않아도 <라푼젤>에는 3D 기술을 선용한 장면이 두셋 있다. 하나는 라푼젤이 처음 바깥세상의 흙을 밟는 환희의 순간. <아바타>에서 걷지 못하던 샘 워딩턴이 아바타의 신체를 빌려 처음으로 맘껏 달리는 장면과 극적인 맥락도, 돋보이는 이유도 같다. 다른 하나는 주인공 커플이 배를 젓는 동안 4만6천개의 초롱불이 날아오르는 장면이다. 하마터면 코앞으로 둥둥 떠오는 연등에 손을 내밀 뻔했다. 주로 액션의 빠르기와 낙차를 실감시키는 데 집중해온 3D 기술이 섬세한 정서를 자극하는 목적으로 어떻게 구사될 수 있을지 힌트를 얻을 만하다.
1월22~25일
박완서 선생님께
“그해 겨울은 혹독했다”고 뒷날 쓰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때론 사방이 죽음인 양 느껴집니다. 잠을 청하려 누웠다가 드센 외풍에 이불을 턱까지 끌어당기면, 멀리 땅에 묻히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얼마나 더 오래 건너야 봄의 기슭이 보일까요. 우리가 선생님을 여의었다는 소식을 오전에 접했습니다. 암을 안고 계신 줄 전혀 알지 못했고 근년의 문장에도 쇠한 기색이 없어 연세도 잊고 있었습니다. 인터뷰로 뵌 일이 다섯해 전이니 여든이셨구나 멍하니 헤아려 보았습니다. 둔해진 머리로 오늘 하기로 정해진 일들을 순서대로 해내는 동안 낮이 가고 밤이 왔습니다. 다시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자 의자가 불편했습니다. 습관대로 좁은 방의 네 모서리를 뱅뱅 걸어 돌았습니다. J. D. 샐린저, 에릭 로메르, 그리고 선생님. 언젠가부터 날아드는 부고의 음색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자라는 동안 제 안으로 흘러들어와 저의 일부가 된 세대가 이 별을 총총히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건 이 우주에서 제가 속한 대륙이 서서히 풍화되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소설을 읽지 않는 시간에도 선생님을 점점이 떠올리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큼직한 반지를 끼면, 부군께 선물받고 50년을 떼놓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 손가락이 여위는 통에 잃어버리셨다던 선생님의 귀한 반지가 생각났습니다. 뒹굴며 끼적거리는 휴일 오후면, 서재가 없던 시절 앉은뱅이 책상과 팔꿈치로 짚고 누운 바닥에서 원고를 쓰곤 했다는 선생님의 회고가 기억나 살며시 웃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기회가 생기면, 깍둑썰기하듯 “…습니다”로 단정히 떨어지던 선생님의 말투를 본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제가 뵌 선생님은 부드럽지만 거역하기 힘든 분, 누구든 만나면 그 추녀 밑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분이었지만 또한 쉽게 어머니연하지 않는 깔끔한 여인이셨습니다.
제가 지닌 선생님 책의 대부분은 몇해 전부터 부모님 머리맡의 협탁으로 옮겨져 작은 탑을 이루고 있습니다. 엄마와 저는 앞으로도 선생님 소설이 뒷산 미루나무라도 되는 양 종종 그것을 붙들고 함께 웃고 눈물을 찍어낼 것입니다. 제 책장에 남아 있는 책 가운데 <그 가을의 사흘동안>과 <환각의 나비>에는 ‘저자와의 협약에 의한 생략’ 대신 흰 종잇조각에 ‘완서’ 두 글자를 붉은 도장으로 눌러찍은 인지가 붙어 있더군요. 선생님의 조그만 흔적이라 여겨져 기뻤습니다.
유난히 웃는 사진이 많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잘 웃진 않아요. 여러 장 찍으면 개중 웃는 게 실려서 그래요. 결심을 하고 안 웃은 적도 있어요”라며 또 웃으셨죠. 하지만 다시 찾아본 그날의 사진들 속에서 선생님은 역시 온통 웃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선생님의 뒷모습을 골랐습니다. 저는 이 사진이 좋습니다. 선생님의 등을 살짝 내리누른 세월의 무게가 좋고, 아끼며 돌보셨던 서재와 정원이 잇닿아 있는 풍경이 좋고, 저와 선생님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서 좋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