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에서 처음 그녀를 본 이후, 우리는 내털리 포트먼과 사랑에 빠졌다. 그로부터 1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포트먼은 롤리타 이미지를 벗기 위해 끊임없이 지적이고 명석하게 자신의 경력을 통제해왔다. 그녀는 유혹하지 않고 설득했고, 남자들의 가슴이 아니라 머리를 뛰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내털리 포트먼은 점점 지루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블랙 스완>이 찾아왔다. 이 극단적으로 정신분열적이고 환각적으로 유혹적인 스릴러에서 백조는 흑조로 거듭난다. 내털리 포트먼도 그러하다.
우리는 내털리 포트먼이 조금 지겨웠다. 포트먼은 언제나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착한 소녀(Good Girl)였다. 착한 소녀를 싫어할 이유야 없지만 착하고 바르기만 한 소녀가 덜 흥미진진한 건 사실이다. 비슷하게 아역배우로 시작해 촉망받는 주연급 여배우로 성장했고 <천일의 스캔들>에 함께 출연하기도 한 내털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을 한번 비교해보자. 당신이 남자라면, 둘 중 누구랑 데이트를 하고 싶은가? 대답 안 해도 알고 있다. 당신이 여자라면, 하버드 심리학과 출신에 온갖 정치활동에 나서며 동물성 제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비건(vegan)에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내털리 포트먼과 적당히 풀어헤친 웃음으로 함께 고기를 씹으며 파티를 즐기는 스칼렛 요한슨 중 누구와 파티에 가고 싶은가. 같이 스터디를 할 게 아니라면 대답은 분명하다. 포트먼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런 착한 소녀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좀 지루해하는 것 같기는 하다. 길거리에서 방해받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털리 포트먼은 우리 눈앞에서 성장한 착한 소녀였다. 그녀는 열두살 때 찍은 <레옹>(1994)을 시작으로 <히트>(1995)와 <뷰티풀 걸스>(1996)에서 똑 부러지는 아역배우로 성장했고, 조지 루카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를 10여년에 걸쳐 통과하며 성인이 됐다.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1999)을 찍은 직후 영화에는 미련이 없다는 듯 하버드대에 입학해 심리학을 공부했고, 졸업하자마자 마이크 니콜스의 <클로저>(2004)를 통해 본격적으로 성인배우가 됐다는 사실을 증명했고, 같은 해 <브이 포 벤데타>와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에 출연했다. 여기까지가 아마도 내털리 포트먼의 ‘1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훌륭한 아역 출신 여배우였다.
착실하게 성장한 훌륭한 아역배우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고야의 유령>(2006), <천일의 스캔들>(2007),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2007), <브라더스>(2009)는 별다른 소득이 없는 영화들이었다. 이 시기 내털리 포트먼의 가장 훌륭한 연기(‘영화’가 아니다!)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2007)다. 왕가위의 이 우물쭈물한 첫 번째 영어영화에서 포트먼은 거의 유일하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카지노 딜러를 연기했다. 차라리 그녀의 캐릭터만을 따로 떼어내 영화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영화를 제외하자면 그녀의 가장 유쾌한 순간은 2006년 출연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였다. 거기서 포트먼은 "나는 하버드에서 매일매일 대마와 코카인을 하고 시험에 커닝을 하지"라며 저질스런 욕을 남발하는 갱스터 래퍼로 등장해 유튜브를 완전히 뒤흔들었다(본 적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찾아보시라. 끝내준다). 하여간 조금 지지부진한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그녀가 뭘 했느냐. 사회활동을 했다. 국제지역사회지원재단(FINCA)과 함께하는 개발도상국 여성을 위한 소액 금융 지원 활동을 했고, 오바마를 위한 민주당 기금 마련에도 뛰어들었다. <베니티 페어>는 내털리 포트먼을 다루는 기사에 "내털리 포트먼을 대통령으로!"라는 제목을 달았다.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 여배우에게 힐러리 클린턴에게나 쓸 제목을 붙이다니. 그건 여배우에게는 사실 치명적인 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블랙 스완>이 찾아왔다. 여기서 내털리 포트먼은 <백조의 호수>의 프리마돈나 ‘니나’를 연기한다. 그녀는 극도로 통제적인 엄마와 살아가는 착한 소녀다. 엄마는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한다. "넌 착한 소녀(Good Girl)야." 하지만 니나는 순결한 백조와 퇴폐적인 흑조를 동시에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육체적인 어려움은 곧 무시무시한 파라노이아로 터져나온다.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오래전부터 내털리 포트먼을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블랙 스완>의 이야기를 완성했다고 말한다. “<레옹>을 본 직후부터 포트먼의 팬이었고, 알고보니 그녀의 매니저는 나와 같은 대학 동창이었다. 매니저를 통해 만나자마자 우리는 <블랙 스완>의 초기 아이디어를 두고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자본 등 여러 문제로 영화는 지체됐다. 내털리는 종종 말했다. ‘댄서를 연기하기엔 점점 나이가 들고 있으니 서둘러줘요.” 그런데 애로노프스키는 내털리 포트먼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육체적으로 포트먼은 발레리나에 어울리지 않으며, 광기로 가득한 스릴러에 그다지 딱 들어맞지도 않는다. 대답은 <블랙 스완>이 끝나는 순간 저절로 찾아온다. <블랙 스완>은, 내털리 포트먼의 ‘전기영화’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정답에 갇힌 똑똑한 배우의 위기
<블랙 스완>의 주인공 니나와 내털리 포트먼은 서로를 쏙 빼닮은 존재이다. 어린 시절부터 발레리나로 길러졌으나 지나치게 착하고 순결하며 보수적이어서 색기를 뿜어내는 흑조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니나와 성공적인 성인 연기자로 진화하기 위해 투쟁을 거듭한 포트먼의 경력은 엇비슷하게 겹친다.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그걸 몰랐을 리 없다. 프리마돈나 자리를 니나에게 내주고 몰락하는 선배 발레리나로 위노나 라이더를 캐스팅한 것은 명확한 증거 중 하나다. 위노나 라이더는 팀 버튼의 <비틀쥬스>(1988)와 <헤더스>(1989)를 통해 80년대 만인의 아역배우로 시작했고, <순수의 시대>(1993)와 <작은 아씨들>(1994)로 연이어 오스카 후보에 오르며 성공적으로 성인배우가 됐다. 거기서 문제가 벌어졌다. 위노나 라이더는 나이가 들어도 매력을 잃지 않았지만 그녀의 연기는 매력을 잃어버렸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조숙한 매력과 연기력으로 이르게 스타덤에 오른 아역배우들의 문제는 성인 연기자가 되어서도 어린 영재 시절의 연기 방식을 좀처럼 벗지 못한다는 것이다.
<블랙 스완> 이전의 내털리 포트먼은 완벽한 성인 연기자였던가. 오히려 그녀 역시 위노나 라이더의 함정에 빠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포트먼의 연기는 종종 광채가 났지만, 역할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 땐 모든 걸 통제하려는 완벽주의자 꼬맹이의 연기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십대 시절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과목으로 언제나 ‘수학’을 꼽았다. 이유는 "언제나 답이 있으니까"였다. 하버드에 입학한 해 내털리 포트먼의 인터뷰들은 조숙하지만 미숙하다. 그러니까 이런 말들 말이다. “나는 영화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인간형은 아니다. 내 삶은 영화보다 훨씬 중요하다.” “대학에 들어갈 것이다. 그게 내 배우로서의 경력을 파멸시킨다 해도 상관없다. 무비스타보다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털리 포트먼은 어쩌면 지나치게 이른 나이에 경력과 연기를 통제하는 법을 배운 건지도 모른다. 그녀가 <여기보다 어딘가에>로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을 때 살롱닷컴의 평론가는 이렇게 썼다. "동세대 다른 배우들과 달리 포트먼의 연기는 너무 감상적이지도, 지나치게 대담하지도 않다." 하지만 당시 포트먼은 10대였다. 때로는 너무 감상적이어도, 지나칠 만큼 대담해도 괜찮은 나이였다.
내털리 포트먼의 연기는 종종 정확한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듯한 연기였다. 포트먼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블랙 스완>을 선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역배우로 출발했을 때, 나는 모두를 기쁘게 만들고 싶었다. 언제나 인정받고 싶었다. 자라면서, 나는 그런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면역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젠 스스로를 기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블랙 스완>의 니나는 아이 같은 여자다. 엄마를 만족시키고 싶어 한다. 발레 선생을 기쁘게 하고, 이 세계의 기준에 정확하게 자신을 맞추고 싶어 한다.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는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주의를 찾아낸다.”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은 “포트먼이 영화에 깊숙하게 관여했다”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영화의 엔딩을 변경하게 만들었다. 원래 대본에는 선생인 토마가 니나를 ‘나의 작은 공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끝났다. 그러나 내털리는 말했다. ‘아니야. 이 영화는 니나가 완벽한 승리를 쟁취하면서 끝나야 해!"” 그리고 그 완벽한 승리는 파멸과의 동의어다. 내털리 포트먼은 극단적으로 캐릭터를 밀어붙임으로써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방식을 터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루한 커리어를 뒤흔든 자극 <클로저> 그리고 <블랙 스완>
내털리 포트먼의 또 다른 이슈는 언제나 ‘섹스’였다. 그녀는 누드가 나오는 섹스장면을 찍지 않겠다고 오래전에 선언한 바 있다. 아마도 그건 첫 영화 <레옹>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옹>이 나왔을 때 너무 이르게 나쁜 경험을 했다. 물론 그 영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12살 나이에 성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괴상한 일이다.” 이후 그녀는 에이드리언 라인의 <롤리타>를 거부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13살의 포트먼은 이렇게 말했다. “그 영화는 정말로 추잡스러울 게 틀림없다.” 1999년 당시 내털리 포트먼은 “어린 배우들은 누드신이나 섹스장면을 찍는 결과를 종종 모를 때가 있다. 그들은 역할을 너무 따내고 싶은 나머지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데 동의하고, 결국 가족과 친구들을 부끄럽게 만든다”고 말했다.
배우에게 성인배우로서의 진입이란 종종 섹스장면의 출연을 의미한다.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가 발명되는 순간부터 섹스는 거기에 있었고, 배우라는 직업이 고안된 순간부터 섹스는 거기에 있었다. 성적인 매력과 여배우의 본질은 거의 따로 떼어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녀가 바뀌기 시작한 건 마이크 니콜스의 <클로저>부터다.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땀내 가득한 동물적 배우인 클라이브 오언 앞에서 그녀는 스트립 댄스를 추며 하반신을 흔들어댔고, 거기에는 천박함을 뛰어넘는 젊은 여배우의 야망이 있었다. 어떤 금욕주의를 뛰어넘어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려는 내털리 포트먼의 노력 말이다.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연기를 감당할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점점 누드와 섹스를 공개적으로 소화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런 장면이 나를 산산조각내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어쨌거나 이제는 더이상 ‘저 계집애 영화에서 보니까 진짜 음탕하더라’라고 말하는 꼬맹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나이는 아니니까.”
<클로저>가 내털리 포트먼을 성인 여배우로 만들었다면, <블랙 스완>은 그녀를 우리 시대 위대한 여배우의 신전까지 밀어올렸다. 포트먼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으로부터 그것들을 자유롭게 스크린 앞에 풀어젖히는 차원으로 지금 막 진화했다. 오래전의 포트먼을 다시 떠올려보자. 10대의 내털리 포트먼은 리안이 연출한 걸작 <아이스 스톰>(1997)의 웬디 역을 거절했다. 역할이 너무 어두침침하다는 이유였다. 웬디 역은 크리스티나 리치에게 돌아갔고, 리치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털리 포트먼이 거절한 역할을 맡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대의 포트먼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배우로서, 내부의 어떤 죽지 않는 불꽃 같은 게 없다. 여전히 그런 게 마음속에 들어서지 않는다.” 자신의 전기영화라고 할 만한 <블랙 스완>을 통해 내털리 포트먼은 불꽃을 되찾았다. 백조는 어둠을 끌어안아 흑조가 됨으로써 자신을 얽매던 조숙한 완벽주의자 꼬맹이의 목줄을 벗어던졌다. 내털리 포트먼은 지금 다시 타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