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이제까지 8번의 원고를 <씨네21>에 보냈고 이번이 9번째, 잘도 영화 얘기를 꺼내지 않고 버텼다 싶었는데 아아 이번주는 진짜로 할 얘깃거리가 없다. 이 일을 어째! 설마 드디어 그때가 드디어 온 것인가….
영화잡지에서 영화 얘기를 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데, 그것은 마치 소설가 앞에서 요즘 재미있게 읽은 소설 얘기를 꺼냈다가 어딘가 꿰뚫리는 기분에 중간에 어영부영 말을 흐리는 그런 기분과 비슷한… 이해해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연휴를 스펙터클하게 보냈다면 그거라도 쓰겠다만 이번 연휴는 참 어중간했다. 친척집에 갔다면 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부쩍 나이가 든 나, 그런 나보다 훨씬 나이가 든 친척 어르신들, 나이가 든 사촌들, 아직 어린 동생들, 하루 종일 일하는 사람, 술만 마시는 사람, 모두모두 한집에 모여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그 사이를 오가는 온갖 쓸데없는 얘기들, 그 사이로 불쑥불쑥 보이는 날카로운 뼈들, 너는 언제 결혼할래, 사귀는 사람은 있나, 니 가수가? 그른데 와 TV에 안 나오노? 인디가 뭐꼬, 거 장기하 비슷한 거 아이가? (이럴 때 기하한테 고맙다. 이 예시가 가장 이해가 빠름) 밥은 먹고사나, 집은 월세가, 학교 졸업은 했나, 자가 책을 썼다꼬? 하이고 니가 어릴 때 그리 책을 많이 보드마….
아 얼마나 쓸 거리가 많았을까. 심지어 내가 만약 시집이라도 갔다면 마치 <체험 삶의 현장>과도 같은 본격 며느리 고생담을 쓸 수 있었을 텐데. 4시간 허리 안 펴고 전 부치기에 도전! 20인분 설거지에 도전!
친척집에 가지 않고 일주일간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은둔을 했다면 그도 나름 정취있었을 텐데 말이다. 연휴 직전에 양팔 가득 음식을 사서 냉장고에 쟁여두고. 연휴가 시작되면 한손에는 음식, 한손에는 리모컨, 그러다 지치면 책(과 만화책), 그러다 지치면 영화, 그러다 사람이 고프면 비슷한 처지의 친구나 친오빠를 만나서 식사(연휴에도 반드시 문을 여는 식당은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
그렇게 사우나에서 땀 빼듯 축 늘어져서 있다보면 밤에 잠은 안 올 테고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시간은 많고 우울이라는 소금에 절여지는 오이처럼 그렇게 따가움에 흐물흐물해지다가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한 얼굴에 스니커 꺾어 신고 잠바(점퍼 말고) 둘러쓰고 거리에 나가봤더니 이곳은 유령도시. 도시 독신자의 찝찌름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서울에 남은 독신의 우중충한 연휴
이번 설은 마치 약간의 잔업이 있었던 주말 같은 연휴였다. 이건 뭐 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한 것도 아녀. 밀린 잠을 자다가 허둥지둥 일어나서 공연 연습을 하고 좀 멍하게 있었더니 벌써 하루가 다 가고. 그렇게 뿌옇게 한주가 흘렀다. 마감날은 다가오는데 마음과 머리 다 텅 비어 있고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구입했네. <대책없이 해피엔딩>(김중혁, 김연수 작가님께서 이 지면에 연재하시던 에세이). 이 책은 전래동화에 나오는, 위급할 때 하나씩 풀어보는 주머니처럼 지금 같은 때 읽으려고 일부러 사지도 않고 있었다.
책을 사자마자 펼쳐서 3시간 만에 완독. 말해야 입 아픈 얘기지만 참말로 재미있었다. 한 사람이 천천히 쓴 에세이가 아니고,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마감에 쫒겨가며), 정해진 지면에 맞춰서 쓴 에세이다 보니 쉴새없이 잽이 날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케첩 조금 찍어 감자튀김 한줄 먹는 게 아니고 케첩, 또 케첩, 또 케첩 이런 느낌이었다. 아우 진해! 그리고 고명하신(!) 작가님들답게 슬렁슬렁 이야기 시작했다가 슬렁 끝내지 않고 꼭 따끔하게 한번 꼬집고 가는 기술까지. 캬아.
그리하여 결국 그분들의 엄청난 필력에 그만 의욕을 잃고, 아 나 따위가 무슨 이 거룩한 지면에 글을 쓴다고… 이번주에 그만하겠다고 얘기해야겠다, 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았고(우헤헤) 오히려 ‘아 좀더 편하게 써도 되겠구나’라는, 편집부에서 들으면 미간을 찌푸릴 법한 깨달음을 얻었다.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 편한 대로 해석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지 않나.
그래서 나 또한 눈부신 필력, 깊은 사고 등의 부분은 ‘흠 멋지셔요, 역시 작가님들!’ 하고 눈 찡긋하고 넘어가고 내 눈에 보이는 헐렁함만 배움의 소재로 삼았다. 물론 내가 배움이 짧아 그 깊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잘못 해석한 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김중혁님의 ‘지면 안에 그래프 넣어 분량 줄이기 신공’이라든지
… 하하하… 작가님… 어째 그러셨어요… 정말 대단하셔요… 아하하….
여하튼 그 책을 읽은 덕에 나는 이제 <씨네21> 필자 버전 2.0의 반열에 올랐거나(아무런 내용이 없이 벌써 원고지 14매임) 또는 중대한 버그가 생겨서 버전 0.5로 떨어졌을지도(원고지 14매인데 여태 아무런 내용이 없음). 음, 아무래도 내가 관두겠다고 얘기하기 전에 ‘짧은 시간이지만 감사했습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편집부쪽에서 이 원고를 반송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그만 까불고 드디어 영화지에 영화 얘기를 해보자.
영화 보며 ‘병맛’ 해피엔딩이라도
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도그빌>입니다. 그런데 라스 폰 트리에의 전 작품을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어둠 속의 댄서> 같은 영화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너무 정신없어서 보지도 못했고요, 주인공이 불행해지는 영화는 보고나면 너무 불행한 기분이 들어서 잘 못 봐서…. 소문에 의하면 비욕이 되게 팔자가 드센 내용이라는데 ‘비욕X팔자’의 조합이라니 그건 너무 세잖아요.
아참, <도그빌> 얘기 해야지. <도그빌>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 니콜 키드먼이 개목걸이를 하고 묶이는데 어떻게 재미가 없을 수가 있어요? 앗, 그게 아니고 사실 폴 베타니를 좋아해서… 앗, 그게 아니고 저는 평범한 사람이 자기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그런 작품을 전부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절대선이 아닌 것도 마음에 들어요. 오만한 여자 같으니! 여하튼 너무 재미있어서 보고 또 보고 그랬네요. 그나저나 제가 아까부터 말을 높이고 있네요?? 긴장이 돼서… 아! <사랑의 블랙홀>도 좋아합니다! 한글 제목이 별로라는 의견도 많지만 전 나름의 깊은 맛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영화는 빌 머레이보다 앤디 맥도웰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저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으면 내 팔자도 좋아질까? 실연당했던 시기에 하루에 몇번이고 그 영화를 돌려보며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그리고 겨울이 배경인 영화는 일단 기본으로 50% 먹고 들어가요. 아, 요즘 본 영화요? 얼마전에 <크리스마스 스타>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에게 음악적 재능이 없어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 나름의 귀여움이 있으니까’라는… 어 제겐 아주 큰 깨달음이었는데….
어떤 시대에나 그 시대에 맞는 미학이 있다. 예를 들어 숭고미, 우아미, 골계미? 나는 21세기를 관통하는 미학 중 하나가 ‘병맛’이 아닐까 한다. 그 관점에서 이 원고를 읽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더 드릴 말씀은 많으나 아쉽게도 지면관계상 이만.
이 또한 대책없이 해피엔딩에서 얻은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