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용 감독의 전화는 수도 없이 울렸다. “한동안 연락을 안 하고 지냈던 지인들이 ‘아내가 현빈을 좋아한다’며 시사회 표를 구해달라고 하더라. <가족의 탄생>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웃음)” 지금은 웃고 있지만, <만추>가 그리 쉬운 프로젝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만희 감독의 원작이라는 타이틀이 가진 무게, 외국의 배우와 함께한 해외 로케이션 등 <만추>는 부딪혀야 할 벽이 많은 영화였다. 그와 함께 고민의 과정을 더듬어보았다.
- 어떻게 제안받은 영화였나.
= 그냥 전화가 왔었다. (웃음) 글로벌한 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이 만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원래 <그녀가 사라졌다>란 멜로영화를 3년 넘게 준비했었다. 내가 사랑 이야기를 못하는구나 싶었는데, <만추>는 정해진 틀거리가 있기 때문에 조금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 그래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다.
= 멋모르고 시작했다가, 만들어가면서 힘들어졌다. 이만희 감독님의 작품이 가졌을 법한 느낌을 찾아가야 하는 게 숙제였다. 원작의 느낌이 확연하면 어떻게 다르게 갈까를 생각했겠지만, 감독님의 원작은 현재 무형의 존재에 가깝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건 언어의 문제였다. 그게 재미이기도 했지만. 영어는 다른 나라의 영어와 우리나라의 영어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영어를 아예 못하는 사람들은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자기 언어처럼 쓴다. 하지만 영어를 잘 쓰는 아시아인은 자기 언어인 척 흉내를 내는 게 있다. 어떻게든 좀더 원어 느낌에 가깝고 싶다는 일종의 허세가 있는데, 그런 느낌이 훈에게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원작과 틀은 같지만, 전제가 다르다. 원작의 혜림에게는 휴가가 상이었지만, 애나는 타의에 의해 불려온 외출이다. 원작과 리메이크의 관계에서 볼 때 가장 다른 점이다.
= 가장 많은 고민을 했던 부분이었다. 조금 유치한 이야기인데, 영화가 마음의 실체를 담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원작의 시나리오에서 가졌던 느낌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서의 어떤 마음이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이 여자가 어떤 상태에 놓여야 할까가 고민스러웠다. 혜림에게는 잠시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선물이고, 움츠려 있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만약 사랑 자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누군가가 자신을 아끼고 예뻐하는 것 자체에 불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 애나가 겪은 상처는 나약하고 비겁한 남자들 때문이라는 점에서 전작의 여성들이 가진 상처와 통한다. 평소 남자란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했다.
= 크게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옛날에는 성차가 큰 것 같았는데, 요즘에는 나이차, 혹은 세대차가 더 커 보인다. 젊은 남자들의 경우는 조금 비겁하기도 하고 바보 같은 데가 있는 것 같다. 극중에서 훈이 가진 힘도 그런 데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훈은 매우 젠틀하거나, 힘이 있거나, 친구 같은 남자는 아니다. 어딘가 삶이 어색한 사람이다. 거짓말이 익숙한데, 사기꾼처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어색함 뒤에 있는 쓸쓸함이랄까. 옛날 영웅들이 어느 정도 불행을 예측하고 그에 대해서 책임지고 가는 사람들이었다면, 훈은 그런 불행조차 모르고 가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애나나 훈처럼 견디고 있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고통을 견디는 게 아니라 자기의 또 다른 면을 누르고 있는 거다.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런 견디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봤을 때는, 애나가 계속 무표정인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술시사를 통해 두 번째 봤을 때, 탕웨이는 계속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더라.
= 영화로 마음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해보고 싶은 거였다. 아무런 감정을 지니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 세상에 이런 감정도 있었구나, 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나름의 가설을 세웠다. 그렇다면 그 순간을 언제 포착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지금과 같은 분위기에 집중한 거다. 이 영화가 자칫 지루해 보일 수 있는 게, 이야기가 진행이 안된다기보다는 각 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기의 전과 후가 길다. 이때 배우가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다이내믹하게 보일 수 있었으면 했다. 재밌는 건 실제의 탕웨이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였다. 매우 사교적이고 명랑하고 담대한 사람이다. 촬영을 하는 동안 탕웨이는 여기서는 더 따뜻해야 하지 않냐, 화를 내야 하지 않냐고 했었다. 무엇보다 애나가 그 하루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힘을 갖게 됐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 크더라. 그녀의 바람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무표정으로 연기를 해도 드러날 것 같았다.
- 시애틀이란 공간을 담을 때 생각한 원칙이 있었나. 막상 갔을 때 바뀐 내용과 분위기의 차이가 큰 편인가.
= 김우형 촬영감독, 류성희 미술감독과 이야기한 건, 이방인이 이곳을 바라보는 눈을 지키자는 거였다. 외국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영화를 찍을 때 보통 남대문시장을 찍는데, 그런 방식이 나쁘지 않은 것 같더라. 이방인의 눈에 흔히 비치는 장소 안에서 우리가 다른 걸 볼 수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공간이 제3의 주인공이나 다름없기 때문인지,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점점 감정적으로 변하더라. 공간을 파악하는 방식이 점점 쓸쓸해졌다. (웃음)
- <만추>는 리메이크영화이지만, 여러 부분에서 감독의 전작이 떠올랐다. 일단, 혹시 달리는 여자의 모습에 페티시가 있는 건 아닌가. (웃음)
= (웃음) 그런가? 하긴 <달리는 차은>이란 영화도 만들었고. <가족의 탄생>에도 달리는 장면이 있나? (극중의 선경(공효진)이 동생과 함께 뛰는 장면이 있다.) 그러네. 100%네 진짜. 예전에 만든 단편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왜 끌리는지 생각은 안 해봤는데, 누가 뛰는 걸 보면 좋은 것 같다. (웃음) 기본적으로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숨어 있던 자신과 만나는 순간들은 몸과 관련이 있다. <만추>에서 애나가 뛰는 장면도 그렇고, 범퍼카를 탈 때 살짝 웃는 것도 그렇고,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웃는 거다. 훈이 애나의 몸을 움직이게 하면서 마음을 열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 판타지가 등장하는 부분도 전작과 비슷한 국면인 것 같다. 한편, 전작들의 장면이 감독의 시선이라면 <만추>에서는 애나의 속마음 같더라.
= 뜬금없었나? 그냥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접근했다기보다는 <가족의 탄생>의 엔딩을 조금 앞으로 당겨오면 어떨까 했다. <가족의 탄생> 때는 감정이 연장되는 순간을 생각했다. 너무 좋아서 몸이 뜨는 느낌 같은 거다. <만추>는 UFO나 유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면 했다. 애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줄도 모르는 걸 보게 되는 상황인 거다. 이게 뭐지?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옆에 있는 얘도 같이 보는 거야? 그러다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러워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 먼저 제작된 다른 <만추>와 달리 두 남녀는 정사를 나누지 않는다. 하지만 고민은 해봤을 것 같다.
= 어떤 관객은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다. (웃음) 찍을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애나에게 적극적인 표현 자체를 지운 이상 그 지점까지 밀고가는 게 맞지 않아 보였다. 결과적으로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처럼 됐는데, 어떤 면에서는 30세 이상 관람가인 것 같기도 하다. 정사신이 아닌 다른 풍경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만추>에서 그들의 감정을 스스로 찾으려 할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