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발레가 무서워요.
=발레는 아름다운 예술이에요. 그게 왜 무서운가요?
-토슈즈 말입니다. 그걸 신고 무대에 서서 종종대고 깡충대는 걸 보고 있으면 발가락 열개가 저마다 아악! 아악!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내털리 포트먼도 그랬다죠. “토슈즈는 중세적인 고문기구”라고요.
=오랫동안 발레를 하다보면 적응이 되더라고요. 전 이제 새끼발가락 하나로도 꼿꼿하게 서서 까브리 올르를 할 수 있답니다. 까브리 올르가 뭐람. 그랑 까브리 올르도 할 수 있어요.
-까브레… 아니. 까르보나라 올라… 그게 뭡니까.
=아유. 기자님이 알아서 뭐하시게요. 그냥 제가 까브리 올르 한다 그러면 까브리 올르 하는구나, 데가제 앙 뚜르낭, 그러면 데가제 앙 뚜르낭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하나하나 설명하자니 복잡하네요.
-그럼 어려운 용어는 이미 익스쿠제된 것으로 생각하고 듣겠습니다. 하여간 저는 백조와 흑조를 다 잘해야 한다고 막 윽박지르고 그러는 게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둘이서 번갈아가면서 연기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진정한 프리마돈나가 되려면 양극단의 연기를 모두 잘해내야 하는 거죠.
-에이. 영화배우들도 자기가 잘하는 게 있게 마련이잖아요. 카메론 디아즈는 껄껄껄 잘 웃고 떠드는 캘리포니아 처자를 잘하고, 니콜 키드먼은 병적으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여자를 잘하고, 자기 색깔만 정확하게 가져도 충분히 훌륭한 배우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왜 발레리나는 꼭 흑조, 백조 다 잘해야 한담. 마돈나가 청순한 척하면 알마나 재수없겠어요?
=아뇨. 저는 프리마돈나를 말한 거고요 마돈나랑은 다르죠….
-에이. 그게 그거죠 뭐.
=그건 왜냐면요… 아...답답해… 원래 성격은 안 그런데 착한 척 아양떨면서 상콤하게 설명하려니까 너무 답답하고 짜증나… 야 이 기자놈아. 내가 언제부터 발레를 시작했는지 알아? 다섯살이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발레만 했어. 진정한 친구도 한명 없었어. 주변 사람들 짓밟고 이 자리에 올라선 내 마음을 니가 알아? 발레를 위해 출산도 금지된 발레리나의 설움을 알아?
-유명한 발레리나들 보니까 친구도 많고 다들 성격도 괜찮던데.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임혜경씨는 여덟살짜리 딸도 있는데요? 그 설움이야 다 니나씨 성격 탓 아닌가요?
*니나. 갑자기 등에서 검은 털이 쑥쑥 자라고 입이 보톡스를 과다주입한 것처럼 길어지더니 오리 부리가 된다.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버리는 니나. 멀리서 구슬픈 외침 들려온다. “난 완벽해… 난 완벽해… 난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