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배우가 또 있을까. ‘대발이 아버지’와 ‘야동 순재’라는 서로 다른 유형을 오가며 그는 그야말로 ‘국민배우’로서 천의 얼굴을 보여줬다. 그 특유의 끓어오르는 듯한 저음은 이제 한 작품을 든든하게 받치는 보증수표와도 같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이순재는 무심한 척 한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는 ‘까도남’이다. 냅다 반말부터 하고 거추장스런 몇 마디 말보다 일단 여자의 손을 잡아끌어 어딘가로 걷고 보는 그는 한국영화에서 근래 보지 못한 남자다. 여자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가죽장갑을 하루 종일 끼고 다니며 으스대는 그 모습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TV드라마의 황제였던 그가 영화계로 복귀한 것은 <모두들, 괜찮아요>(2005)의 치매 노인 역할이었다. 그 스스로 주연의 자존심이 새겨진 마지막 작품이 최인현의 <집념>(1976)이라고 하니 거의 30년 만의 복귀나 다름없다. 그로부터 5년여의 세월이 흘러 마주하게 된 본격 멜로영화가 바로 <그대를 사랑합니다>다. 어쩌면 그는 이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30년 만의 복귀를 꿈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이순재를 만나 영화 얘기로 시작해서는 신나게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다. 그 특유의 음성으로 정력적으로 이야기하는 그 모습이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이순재, 당신의 음성과 얼굴, 그리고 주름 모두를 사랑합니다.
-강풀 원작의 작품인데 어떤 점에 끌리셨나요.
=원작부터 본 건 아니고 처음에는 시나리오를 읽게 된 건데, 어려운 대목 없이 잔잔하면서도 깔끔해. 바로 한번에 오케이했지. 분량상 주인공이라는 것도 큰 이유였고. (웃음) 이렇게 진솔한 감정을 담아내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애가 된다는데 투덜거리고 심통내고 그러는 게 너무 즉각적으로 와닿더라고. 디테일은 물론이고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것도 억지스럽지 않고 또 구성원들이 너무 좋아.
-관록있는 노년배우들의 클로즈업을 보는 게 좋았습니다. 선생님의 메이크업하지 않은 클로즈업만으로도 뭔가 ‘짠’하게 다가오는 감정이 있더라고요.
=나도 영화에서 클로즈숏을 좋아해. 그것만으로도 영화 하나 완성할 수 있지. 미세한 표정의 떨림만으로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클로즈업이거든. 바로 그게 영화야. 얼핏 쉬워 보여도 시간이 꽤 걸리고.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는 다들 역할이 그러니까 모공 다 드러나는 걸 각오했지. 드라마 찍을 때는 내 볼 위에 있는 이 큰 반점, 메이크업으로 가리거든. 그래서 아내는 옛날부터 얼굴에 큰 점, 작은 점 다 빼자고 난리였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아주 잘 써먹었어. (웃음)
-집에서 TV로 야한 프로그램을 보는 장면에서 배꼽 잡았습니다. 선생님 아이디어라는 얘기도 있고요.
=뭐 하자고 해서 한 건데, 시트콤 인상이 너무 강하니까 과하게 하고 싶진 않았고 지금 그 정도쯤 하면 재밌겠지 싶었어. 그리고 컴퓨터로 보는 야동과 케이블TV에서 나오는 야한 영화의 수위는 전혀 달라. (일동 대폭소) 다행히 반응이 괜찮아서 기분 좋았지. 근데 사실 내 유명한 대사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잖아? 얼마 전 연극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를 연기했는데 나한테 그 대사를 줬더라고. 그래서 내가 CF에서 했던 대사를 연극에서 재현하고 싶지는 않다고 해서 안 했어. 그런데 연출자가 아쉬웠는지 나 말고 신부한테 그 대사를 줬어. (웃음) 객석에서는 빵빵 터졌지. 그런데 전에 모 국회의원이 그런 대사를 하지 말라고 했대. 그래서 내가 법이나 잘 만들고 정치나 잘할 것이지, 어떤 놈인지 전화로 욕이나 한 바가지 해주겠다고 한 적 있어. (웃음)
-영화에서 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여러 신들이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입니까.
=역시 라스트신이지. “한번 안아볼까?”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감정을 누르고 누르다가 그렇게 표현되는 거야. 이 영화는 그 장면 하나 바라보고 달려가는 영화이기도 하고. 초반부에 자연스레 웃음을 주다가 한번 들어오면 확 밀착할 수 있는 영화지. 연출상의 쇼킹한 효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희로애락이 적절하게 녹아들어가 있어. 후반부에 동네 꼬마가 골목길에 불 켜주는 그런 장면도 참 예쁘고. 그러니 마지막에 울 수밖에 없지. 요즘 시사회나 극장에서 영화 봤다고 연락들이 많이 오는데 하나같이 다들 펑펑 울었대. (웃음)
-젊은 감독과 호흡을 맞추고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양보하지 못하거나 하는 부분도 있으셨나요.
=송이뿐(윤소정)의 집에 갔을 때 사실 그녀의 노모가 있거든. 다들 ‘원작에는 있는데 영화에는 없다’고도 얘기하는데 실제로 배우를 데려다가 그 장면도 찍었어. 최종적으로는 편집이 됐지. 그래서 내가 그 장면이 없으면 내 시선이나 대사가 설명이 안된다, 풀숏이라도 그 피사체가 없으면 어떡하냐고 좀 잔소리를 했어. 그런데 감독도 그게 더 낫다고 하고 원작자인 강풀도 그게 더 나을 거 같다고 했대. 그래서 “어, 원작자가 그랬어?” 그러고는 돌아섰지.(웃음)
-추창민 감독은 생일파티하는 장면에서 윤소정 선생을 보며 한번에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고 했습니다.
=연기상의 눈물은 자연스러워야 해. 아무래도 역동적으로 보이려면 오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 편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적절치 않아. 그런데 눈가에 맺히는 정도로만 하라고 해도 꼭 흘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거든. 예전 대선배 배우들도 그런 건 잘 안됐어. 오히려 그런 과도하게 감상적인 연기를 잘하셨는데 절묘하긴 했지만 좀 오버하는 느낌이었지. 워낙 거물 배우들이라 젊은 연출자가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어. 그래서 우리 같은 후배들이 좀 다른 식의 연기를 하게 된 것이기도 하고. 거기에는 TV방송의 영향도 커. 무대에서 그렇게 과한 연기를 하던 배우들이 빡빡한 방송국 일정 속에서 “선생님 대본대로 해주세요”라는 주문을 받게 됐으니까.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는 배우가 꺽꺽 다 울고 웃으면 관객의 몫이 없다고 봐.
-그런 점에서 선생님은 연기 중 애드리브를 극도로 꺼리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편이지. 함께 출연한 김수미씨는 반대로 애드리브를 정말 많이 하거든. 그런데 그게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는 애드리브야. 가령 내가 오토바이 뒤에 김수미를 태우고 가는 장면에서, 하도 답답해서 내가 내 이마를 탁 치는 장면이 있거든. 근데 그걸 그대로 따라서 자기도 ‘아이쿠’ 하며 이마를 치더라고. 치매 노인 역할이다 보니 그 애드리브가 너무 어울렸어. 그럴 땐 나도 기분 좋지. 그런데 내가 그런 원칙을 가지게 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 1960년대 이낙훈, 오현경, 여운계 같은 친구들과 ‘실험극장’을 만들면서 대학극을 시작했는데 주로 번역극이었거든. 그 주옥같은 대사들을 우리 실정에 맞게 번역을 하는 거니까 한 마디 한 마디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어. 자음, 모음, 정말 철저하고 적확하게 대사를 만들었어. 그러다보니 애드리브란 걸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지. 옛날 같으면 요즘 박철민, 임현식 같은 애들 완전히 박살냈을 거야. (웃음) 가령 임현식 연기하는 거 보고 있으면 정말 웃겨. 무슨 대사의 절반 이상이 애드리브야. 그런데 그런 게 잘 맞아떨어지고 상승효과를 낼 때가 많으니까 잘 흘러가는 거지. 대본하고 너무 동떨어지게 형편없이 하는 경우를 싫어하는 거지.
-그럼 여러 면에서 영화배우로서 인정하는 선배배우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최무룡 선배지. 당시에는 후시녹음 시절이었는데도 그 선배는 자기 대사의 템포가 있고 그에 대한 애착이 컸어. 후시녹음이니 그런 주연급 배우들 중에 대사를 안 외워오고 그냥 입만 벌리거나 조감독이 옆에서 읽어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 읽는 경우가 허다했어. 뭐 나중에 성우가 다 하니까. 그런데 최무룡 선배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내실을 다지는 사람이었지. 메소드 연기의 대가였고 늘 끊임없이 새롭게 변신하는 배우였어. 물론 다른 좋은 선배 배우들이 많았지만 자기만의 확고한 원칙과 ‘폼’이 잡혀 있는 최고의 배우였지. 그래서 한번은 최민수를 만나 진지하게 얘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 내가 민수 백일잔치도 가고 어렸을 때부터 쭉 봐왔거든. 이제 작품으로 만날 일은 없고, 전에 무슨 행사장에서 만난 적 있는데 머리에 두건 쓰고 수염 기르고 요란한 청바지 입고 왔기에 ‘야, 너 허리에 도끼만 차면 딱이겠다’고 한 적 있어. (일동 대폭소) 연기자로 치면 ‘성골’ 출신 배우고 또 한때 얼마나 잘했어? 멈추지 말고 좀더 하면 정말 최고의 배우가 될 수 있을 텐데. 마스크도 얼마나 좋아. 참 아쉬워, 한번 만나서 얘기해야지.
-예전부터 워낙 영화애호가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들을 좋아하셨나요.
=<인생유전>(1945)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 사실 감독인 마르셀 카르네는 ‘똘마니’고 주인공을 연기한 장 루이 바로야말로 진짜지. 마임의 최고 권위자이기도 하고 실험극 연출가로도 유명한데 영화에서 곤경에 처한 여주인공을 마임으로 도와주는 장면은 거의 마술이야. 그리고 캐롤 리드의 <심야의 탈출>(1947)은 극장에서 7번이나 봤어. 무슨 이런 영화가 있나 싶었지. 한국영화는 유현목 감독 등이 나오기 전이라 우리 안목으로는 사실 욕구 충족이 안됐어. 그 가운데서도 이강천의 <피아골>(1955)은 아주 좋았어. 김진규, 허장강 같은 캐릭터들의 매력도 잘 살아 있고. 또 처음 하는 얘기인데, 당시 있던 무슨 영화잡지에서 객원기자 비슷한 것도 했었어. 선배가 일하던 잡지인데 일손이 부족하면 번역도 해주고 일도 도와주고 그랬지. 그래서 전창근의 <단종애사>(1956)에 출연한 엄앵란씨를 인터뷰한 적도 있었어. (웃음)
-외국 배우들 중에서 좋아하는 배우를 꼽으라고 한다면요.
=단연 로렌스 올리비에지. <햄릿>(1948)은 물론이고 <리차드 3세>(1956)는 일본어로 된 시나리오집을 가지고 있어. 그땐 <영화예술>이나 <스크린> 같은 일본 영화잡지들을 보면서 그런 갈증을 풀었지. 일본과 문화적 교류가 없을 때지만 일본영화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챙겨봤지. 구로사와 아키라나 이치가와 곤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좋아했어. 구로사와 아키라는 물론이고 이나가키 히로시의 <사무라이>(1954) 등에 나온 미후네 도시로나 다카쿠라 겐은 정말 대배우지. 그중에서도 셰익스피어 원작을 영화화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1980)와 <란>(1985)에 출연한 나카다이 다쓰야를 정말 좋아해. 사무라이 영화는 물론이고 그런 연극적인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기품과 위엄이 있으면서도 연기폭이 넓은 배우야. 지난해 영상자료원에 초청받아 온 것도 알고 있었는데 만나보고 싶긴 했지만. (웃음)
-선생님을 일컬어 상복 없는 배우라는 얘기를 합니다. 아직 연초긴 하지만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김만석 역할로 연말 영화상 시상식에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르는 게 보고 싶습니다.
=정말 상을 많이 못 탔어.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1967) 같은 경우 그해 <한국일보>에서 한국영화 베스트 1위로 꼽았던 영화야. 임영 등 정통 평론가들이 제대로 평가할 때였지. 그런데 영화예술대상 후보로 경쟁이 붙었는데 관계자인 한 서울대 선배가 일종의 뇌물로 ‘베팅’을 좀 하라는 거야. 그래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누구요?” 하고 물었더니 이만희 감독의 <싸리골의 신화>(1967)의 최남현 선배야 글쎄. 그분은 대선배인데다가 실제로 연기를 너무 잘했고 또 나이 때문에 마지막 상을 타실 수도 있는 분인데 도저히 그런 베팅을 할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형, 아무리 그래도 최남현 선배한테 내가 그럴 수는 없잖수” 그러고 말았어. 결국 최남현 선배와 <막차로 온 손님들>의 내 상대역이었던 문희씨가 여우주연상을 탔지. 그리고 임원식 감독의 <어머니>(1977)라는 작품으로는 대종상을 탈 뻔했어. 주연배우인 윤연경의 남편으로 나왔는데 술주정뱅이에 개망나니야. 내 생애 최고 악역이었어. (웃음) 그땐 대종상을 수상하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줄 때니까, 영화사 사장이 심사위원 중에 국회의원이 한명 있는데 한번 가서 만나라고 하더라고. 너무 기분이 나빠서 “내가 무슨 제비야? 그건 사장님이 가세요” 그랬지. 나중에는 뭐 탤런트 출신은 상을 못 준다고도 했었나, 하여간 말이 안돼. 그런데 연기로 보자면 내가 상을 타는 분위기였거든. 그래서 뭐가 미안했는지 ‘특별남우상’이라는 이상한 걸 만들어서 주더라고. (웃음) 참 암울했던 시절이었어.
-영화 얘기부터 옛 얘기까지 너무 많은 얘기 잘 들었습니다. 이후 계획을 말씀해주신다면요.
=난 이런 영화가 나오게 된 게 너무 기뻐. 노배우로서의 보람도 컸고. <그대를 사랑합니다> 같은 영화가 꼭 흥행이 됐으면 좋겠어. 아 저렇게 노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만든 멜로영화도 흥행이 되는구나, 하면 또 다른 영화도 투자를 받을 수 있지 않겠어? 게다가 나 스스로도 너무 만족하는 작품이니까. 그리고 좀 있으면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했던 장진 감독하고 새로 찍은 <로맨틱 헤븐>이 개봉할 거야. 그 영화도 좀 기대돼. 잘 봐줬으면 좋겠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