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안현진의 미드앤더시티] 아내, 엄마, 누나, 며느리, 변호사, 동료… 언니는 멋졌다
2011-03-04
글 : 안현진 (LA 통신원)
‘TV 시청자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굿 와이프>와 시카고

“시카고에서는 친구가 세번 필요하지. 결혼식, 장례식, 그리고 처음 기소당했을 때.”
-<굿 와이프> 시즌2 에피소드8, 윌 가드너

“이 TV시리즈는 시청자를 위한 종합선물세트다. 고위층의 섹스 스캔들, 서바이벌 설정의 리얼리티 TV쇼, 로맨스, 섹스, 음모, 성공과 실패, 오만한 젊은 남자, 그리고 더 오만한 나이든 여자, 게다가 짜증나게 하는 시어머니까지 다 갖췄다.” <CBS>의 TV시리즈 <굿 와이프>가 2009년 9월 첫선을 보였을 때, 법률잡지 <시카고 로이어 매거진>의 한 필자가 드라마를 소개하며 부연한 설명이다. 설명만 읽고 본다면 <아내의 유혹> 같지만, 이 복잡한 드라마는 막장드라마처럼 그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한 가지 장르를 정하기 어려운 다면적 속성이 우선 그렇다. 법정물이라기엔 정치극 색채가 두드러지고, 가족드라마라고 하려니 늦깎이 신참 아줌마 변호사의 로맨스가 어디로 흐를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굿 와이프>를 TV 이전에 버스 정류장 광고판의 포스터로 처음 만났다. 와인빛 원피스를 입은 신중한 표정의 여자가 어두운 색 정장을 입은 남자를 등지고 서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포스터 속의 주인공은 ‘The Good Wife’이기에 남자가 보여주는 것은 뒷모습과 왼쪽 옆얼굴이 전부지만, 포스터 안에서 군중의 관심을 받는 이는 남자다. 여자의 등 뒤 저 너머에서는 남자를 향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질문 세례가 쏟아진다. 여자는 침묵한 채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돌리고, 남자는 군중을 앞에 두고도 여자에게 신경을 집중한 눈치다. 아주 정교하게 내러티브를 조각해 넣은 한장의 이미지였다.

‘정교한 서사의 구성’은 <굿 와이프>의 많은 미덕 중 하나다. 처음 이 드라마가 시작됐을 때 ‘가십’에서 출발한 설정이 어떻게 발전할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굿 와이프>는 서두르지 않고 23개 에피소드에 걸쳐, 마치 건축물을 세우듯, 공을 들여 드라마 안팎의 두 가지 현실을 반영하는 독특한 세계를 완성했다. <굿 와이프>는 뉴욕주 주지사 엘리엇 스피처의 실제 매춘 스캔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공교롭게도 엘리엇 스피처의 부인도 변호사다). 2008년 3월 스피처의 기자회견을 보던 제작자 미셸 킹은 문득 궁금해졌다. “저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노련한 배우들의 앙상블 빛나

스캔들, 그 이후를 그려낸 <굿 와이프>의 파일럿도 기자회견장에서 시작한다. 공적 자금을 매춘에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의 지방검사직을 사임하는 피터 플로릭(크리스 노스) 곁에 돌을 삼킨 표정으로 버티는 아내 알리샤 플로릭(줄리아나 마굴리스)이 서 있다. 그리고 시간은 6개월을 뛰어넘는다. 조지타운 법대를 졸업한 뒤 2년간 변호사로 일했던 알리샤는 남편의 성공과 자신의 경력을 맞바꾼 전형적인 ‘내조의 여왕’이었다. 하지만 피터가 구속돼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가장의 의무는 그녀에게 지워진다. 당연하겠지만, 15년 가까이 전업주부로 지내다 돌아간 법조계는 쉽지 않다. 로스쿨 동기 윌(조시 찰스)은 수석변호사이자 경영파트너가 됐고, 새파랗게 어린 변호사 캐리(맷 추커리)와 정규직 자리를 놓고 경쟁을 붙인다. “여자끼리 도와야 한다”며 멘토를 자청한 또 다른 경영파트너 다이앤(크리스틴 바란스키)은 사진 속 힐러리 클린턴을 가리키더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말을 첫인사랍시고 건넸다. 하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건 ‘플로릭’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표정들이다. 동정, 괄시, 시샘이 뒤섞인 표정들 앞에서 알리샤의 입은 무거워지고 눈은 허공을 향한다.

사법체계를 그려내는 드라마의 태도도 눈여겨봄직하다. 권모술수, 자가당착, 정의구현의 삼각관계에서 법조인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신입 변호사가 된 알리샤가 “이의있습니다”와 “기각합니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플롯에 법정물의 성격을 불어넣는 동안, 피터의 스캔들도 한겹씩 베일을 벗어간다. 시즌1이 피터가 감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줄거리를 중심에 두고 알리샤의 적응기를 그려냈다면, 시즌2는 레퍼토리가 된 법정 에피소드 안에서 피터가 혐의를 벗고 지방검사 선거에 출마해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으로 정치극의 색채를 더했다. 하지만 <굿 와이프>의 많은 장르적 면모 중에서도 최고는 피터와 윌 사이에서 쉽게 방향을 정하지 못한 알리샤의 아슬아슬 이어지지 않는 로맨스다.

그래서 알리샤라는 캐릭터는 특별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럴 만한 이유와 함께 복잡한 상황에 놓인다. 나는 어떤 드라마에서도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역할을 이토록 자세하고 공정하게 그려낸 걸 본 적이 없다. 알리샤는 부인이고, 엄마이고, 누나이고, 며느리이고, 변호사이며, 직장 동료이고, 짝사랑의 상대가 되기도 한다. 그 모든 역할에서 알리샤가 만점은 아니지만, 어느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굿 와이프>의 성공을 두고 사람들은 알리샤를 연기하는 줄리아나 마굴리스의 연기를 극찬한다. 하지만 줄리아나 마굴리스의 호연과는 별개로 나는 알리샤라는 캐릭터의 견고함을 말하고 싶다. 그녀의 도처에는 유혹이 널려 있다. 결심만 했다면 남편에게서 벗어나 윌과 로맨스를 완성했을 수도 있고, 지방검사였던 남편의 도움을 받아 법정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섹스 스캔들을 문제 삼아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이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알리샤는 비겁하거나 이기적인 결정을 하는 대신, 매사에 심사숙고한다. 그러고 보니 알리샤는 제법 굵직한 결정도 계속해왔다. 특히 피터와의 관계가 그렇다. 쉽사리 용서하거나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매정하거나 매몰차지도 않았다. 필요한 순간에 알리샤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플롯, 캐릭터에 이어 <굿 와이프>의 미덕으로 꼽히는 마지막 한 가지는 캐스팅이다. 고정 캐스팅의 앙상블도 훌륭하지만, 미디어는 일회성 조연들에게도 갈채를 보냈다. <뉴욕타임스>는 <굿 와이프>를 두고 “노련한 배우들을 위한 부업의 장”이라고 했는데, 매번 다른 사건을 다루는 법정물의 특성상 다양한 캐스팅이 필요하고, 그 자리를 실력있는 배우들이 채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지도 않은 진통을 호소하며 할 말 다 하는 임신부 변호사 역에는 마사 핌플턴이, 실제로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인 마이클 J. 폭스가 장애를 이용해 동정심을 얻는 변호사로 출연해 각각 인상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냈고, 앨런 커밍, 아니카 노니 로즈 등이 각각 피터의 선거 캠페인 매니저와 경쟁 후보로 출연해 호평받았다.

점점 더 시카고색을 찾아갈듯

하지만 이처럼 훌륭한 배우들을 위해 포기한 것이 로케이션이다. <굿 와이프>는 설정된 배경이 시카고인 데 반해 촬영은 뉴욕에서 진행된다. 그래서인지 시즌1에서 시카고라는 배경이 드러나는 통로는 대사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시카고가 일리노이주에서도 가장 큰 도시이며, 미국에서 인구수로는 3위인 메트로폴리스이고 보니 특정 인종이나 종교 등의 지표도 무대가 되는 도시를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제작자 로버트 킹은 시즌2가 시작될 무렵 <시카고 선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시즌1에서 지역적 배경에 부족했던 점들을 시카고 전문가들을 팀에 영입하는 것으로 개선하려 하고 있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디테일이 추가될 것”이라고 변명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칼럼 타이틀이 ‘미드 앤 더 시티’인데 시카고와 법률회사 사이에 끈끈한 관계라도 있을까 재미 삼아 찾아본 이야기를 하면, 미국 사법 통계 사이트(Bureau of Justice Statistics)를 뒤져본 결과, 도시 단위까지 범위를 좁히지는 못했지만 일리노이주가 각종 법정 소송 관련 통계에서 상위 10위 안에서 빠지지 않는 도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구수로나 소송건수로나 전체 1위 캘리포니아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전체 순위에서 7위를 차지하는 걸 보니 시카고 시민들이 로펌 몇개는 거뜬히 먹여살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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