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리트윗의 반복가능성
2011-03-04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반복과 차이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로 돌아가보자. 세르반테스에 필적할 만한 소설을 쓰려고 했던 피에르 메나르. 그가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소설은 공교롭게도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언어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이 단순한 반복이 세르반테스의 원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롭다”고 말한다. 가령 ‘역사가 진리의 어머니’라는 문장은 17세기에는 그저 “수사적 찬양”에 불과했으나, 20세기의 맥락에서 그 문장은 새로운 역사철학을 담은 “놀라운 생각”이 된다는 것.

반복가능성

하나의 기호가 상이한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성질을 흔히 ‘반복가능성’(iterabilité)이라 부른다. 단 하나의 맥락에서 단 한번만 사용할 수 있는 기호라면, 그것은 아예 ‘기호’가 아닐 거다. 한 낱말의 의미를 습득한 아이는 그 낱말을 그와 다소 차이가 나는 다른 맥락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아이가 그로써 제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맥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낱말이 어느 정도 의미의 ‘동일성’을 유지했기 때문일 거다. 이 의미론적 안정성이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전제가 된다.

하지만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도 있다. 가령 “낱말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맥락이 달라지면 동일한 낱말이라도 실은 의미가 달라졌다고 봐야 할 거다. 사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맥락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낱말의 의미는 자연스레 변화를 겪기 마련. 가령 ‘어리석다’는 뜻의 중세국어의 낱말이 오늘날 ‘어리다’라는 뜻으로 바뀌지 않았던가. 데리다에 따르면, 반복가능성은 이렇게 낱말의 동일성, 혹은 정체성을 해체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문제는 ‘반복가능성의 어떤 측면에 주목하느냐’ 하는 것이리라. 가령 어떤 이는 하나의 낱말이 상이한 맥락들 속에서 반복되면서도 여전히 의미의 동일성(identity)을 유지하는 조건에 주목할 거다. 이 경우 그는 한 낱말을 여러 맥락에 ‘적절히’ 사용하는 기준을 얻을 것이다. 반면, 어떤 이는 반복을 통해 발생하는 의미의 ‘차이’(difference)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사실 언어란 생물체처럼 반복을 통해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를 통해 진화하는 생물체가 아닌가. 전자가 언어의 규범성에 주목한다면, 후자는 그것의 창조성을 강조한다고 할까?

‘인용’에 대해서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인용’이란 하나의 텍스트를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다른 맥락에 옮겨놓는 작업. 이때 그 문장을 적절한 맥락에 옮겨놓지 않으면, 인용자는 해석의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맥락이 적절하다 해도, 인용문의 의미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원래의 맥락과는 다소 차이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이 차이를 ‘일탈’이나 ‘왜곡’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나, 바로 그 ‘일탈’과 ‘왜곡’을 통해 텍스트는 외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 인용은 그 극한적 예를 보여준다.

‘번역’에도 적절성의 기준이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번역이 적절해도 전혀 다른 문화에 속하는 언어로 반복될 때, 원문의 의미는 변질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게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베냐민에 따르면, 성서는 외려 반복(=번역)을 통해 완전성에 도달한다. 각 나라 말로 반복될 때마다 차이가 발생하고, 이 차이들을 통해 신이 인간에게 전하고자 했던 말씀이 그 풍부함 속에서 온전함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즉 반복을 통해 발생하는 차이는 소통을 가로막는 ‘일탈’이 아니라, 의미를 출산하는 ‘창조’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데리다가 반복가능성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현상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낱말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한 낱말을 특정한 맥락에서 반복할 때, 거기에는 과거의 반복과 미래의 반복이 흔적으로 드리워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낱말의 의미는 언제나 시간적, 공간적으로 산포되고 연기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언어 자체가 이처럼 ‘디페랑스’의 놀이라면, 반복을 통해 의미의 차이가 발생하는 현상을 그저 의미의 ‘일탈’로 보아 배제하거나, 혹은 낱말의 ‘기생적 사용’으로 간주해 주변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데리다가 오스틴과 설의 ‘화행론’(speech act theory)을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데리다와 화행론자의 입장은 차라리 시차(視差)를 구성한다. 데리다라고 텍스트를 마구 엉뚱한 맥락에 집어넣는 해석적 폭력을 옹호하지는 않을 거다. 다른 한편, 화행론자들이라고 해서 영원불변성의 염원에서 언어를 적절성(felicity)의 관 속에 모신 미라로 만들려 하지는 않을 거다. 두 담론은 각자 다른 목적에서 반복가능성의 두 측면 중 어느 하나를 강조할 뿐이지, 둘의 차이가 적어도 눈에 뵈는 것만큼 크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말의 주체인가

나를 10여년 전에 읽었던 이 논쟁으로 다시 이끈 것은, 얼마 전 김영하의 블로그에서 벌어졌던 논쟁(?)이었다. 혹자는 이 논쟁을 보고 “실망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식인들이라고 늘 격조있게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설은 데리다를 공격할 때 다소 치사하게도 푸코가 사석에서 한 얘기까지 동원했다. “푸코가 내게 말하기를, 데리다는 고의적 논점 흐리기로 악명 높다고 했다.” 꽤 수준 높은 논쟁 속에도 이렇게 유치함은 존재한다. 그러니 종종 지식인들의 논쟁이 유지해 보인다고 각별히 실망할 필요는 없다.

‘등단이 작가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느냐’는 논란으로 시작한 이 논쟁에서 정작 내 관심을 끈 것은, 소설가로 하여금 트위터와 블로그를 접게 만든 대목이었다. 그는 논쟁을 하는 가운데 마침 벌어진 한 사건을 ‘인용’했다. 그가 펼치는 논리의 맥락 속에서 그 인용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가령 그것은 주장의 정서적 호소력을 높이는 장치일 수 있다(정서에 호소하는 것이 철학에선 오류지만, 문학에선 힘으로 간주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트위터를 통해 반복(=RT)되면서 그 인용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자까지 팔아먹느냐.’ 이는 저자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석이었을 것이다. 사려 깊은 독자라면, 다소 인용의 맥락이 부적절해도 저자가 의도한 맥락 속에서 그 인용의 의미를 이해해줄 것이다. 하지만 제자의 죽음이 준 사회적 충격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었고, 게다가 일부 독자들은 사려 깊고 싶지 않은 나름의 욕망을 갖고 있다. 그 결과 그 인용이 의도하지 않은 맥락에서 반복(RT)되면서 졸지에 예상하지 못한 의미를 갖게 된 것. 만약 그 사건을 몇달 뒤에 인용했다면, 사정은 많이 다르지 않았을까?

과연 반복을 통해 차이가 생산되더라. 데리다가 기대한 대로, 때로는 그것이 생각하지도 못한 새 의미를 창조하는 미학적 ‘축복’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화행론자들이 우려하듯이, 때로는 그것이 생각하지도 않은 물결에 휘말리는 윤리적 ‘저주’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저자가 자신의 발언이 반복될 모든 맥락을 예상하고 통제할 수는 없다는 것. 사실 저자는 제가 하는 말의 주인이 아니다. 원하는 문장은 만들 수 있어도, 원하는 맥락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 저자는 차라리 ‘반복가능성’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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