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쉬는 날, 그간 소진된 에너지에 버금가는 피로곰을 등에 업은 채 숙면을 걱정하며 심야영화로 <만추>를 보았다. 예상한 대로 안개와 가랑비가 가득한 시애틀은 어둡고 습한 풍경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우울증이 도질 듯한 그 도시에서 메마른 여자와 눈물도 웃음도 많을 듯한 남자가 만난다. 영화 속 사랑이라기엔 끈적하지도 격하지도 않은, 참으로 말수가 적은 영화였다. 결국 숙면은커녕 귀갓길 밤거리에 안개만 있다면 시애틀이라 믿을 정도로 영화에 취한 채 극장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에 현장으로 출근(?)할 준비를 하며 노트북 뒤에 깔려 뭉개진 책을 발견했다. 몇편의 현장을 거치며 책들은 늘 제목이 제각각이었다. 프라하, 베이징, 파리, 앙코르와트, 인도, 뉴욕. 언제나 촬영 끝무렵 한달간 짬이 날 때마다 여행책을 펼쳤던 것 같다. 하지만 늘, 저렴하지만 새로운 현장들과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기회, 밀린 생활비 앞에서 비행기표는 내 손에 들어오질 못했다.
하지만 아쉬워하지 않으련다. 역마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생활이지만 여의도에서 월스트리트의 풍경을 보고, 퇴근길 한강 대교들 위에서 프라하의 야경을, 촬영이 끝나고 스탭들이 모여드는 호프집에서 독일의 맥주를 꿈꿀 수 있지 않나. 내일 현장의 공기에서 안개 자욱한 시애틀의 풍경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 아직은, 새로운 도시와 낯선 사람들보다 다이내믹한 이 현장이 훨씬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