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철(이준혁)은 유아 성폭행 전과자다. 출소 뒤 가족과 연락을 두절하고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며 살고 있다. 철거 예정인 아파트에서 지내는 그는 곧 거처를 옮겨야 하지만 불경기에 일감이 줄고 품삯마저 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오성철을 찾는 이들은 두 부류다. (그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 매춘부거나 (그의 과거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형사다. 한편, 작은 인쇄소를 운영하는 김형도(오성태)는 아파트 분양 광고물을 수주하러 다니다 오성철의 출소 사실을 확인한다. 자신의 딸을 유린하고, 가정을 송두리째 파괴한 오성철을 보고 김형도는 복수를 결심한다. 며칠을 고민하던 김형도는 택시 운전 일을 시작한 오성철에게 손님으로 가장해 접근한다.
줄거리를 이렇게 요약하면, “당한 만큼 앙갚음해주겠다”는 식의 복수극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애니멀 타운>의 원한과 복수는 그렇게 간단한 도식의 쾌감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는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을 두 남자의 일상을 번갈아 보여준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 두 인물에 대한 정보는 비대칭적으로 주어진다. 관객은 오성철이 찬 전자발찌를 수도 없이 마주하게 되며, 그가 끔찍한 범죄자의 낙인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동시에 그가 세상으로부터 얼마만큼 냉대와 수모를 당하는지도 마주하게 되며 이에 얼마간 동감한다. 그러나 김형도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영화엔 없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던 그가 성경을 내버린 대신 칼을 품고 오성철을 뒤쫓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머리에서부터 의문이 들 수 있다. 경찰은 김형도를 찾아와 당신이 분실한 오토바이를 훔쳐 탄 아이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으며, 법적으로 당신에게도 일정 정도의 과실이 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신기한 건 김형도의 반응이다. 그는 “아무리 법대로라지만 분실의 피해자인 내가 책임을 떠안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묻는 대신 “(죽은) 아이가 몇살이냐”고만 그저 묻는다. “딸을 서울대에 입학시킨” 교회 장로가 준 매운탕감 물고기를 길바닥에 버리고서 담배를 피우며 묵묵히 생각에 잠기는 표정도 쉽사리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의문은 영화의 마지막에서야 풀린다. 전규환 감독이 문제 삼고 싶어 하는 건 두 인물의 비정상성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자기 주위를 둘러싼 고통을 모르는 척하는” 병적인 도시의 환부다.
장르적인 의미의 서스펜스를 자아낼 장치를 부각시키지 않지만, 그럼에도 <애니멀 타운>은 자극적인 영화다. <애니멀 타운>의 긴장은 두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두 인물을 통해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는 데서 오는 듯하다. 동네에서 폐지를 주우며 돌아다니는 아이를 오성철이 힐끔거릴 때 우리는 여전히 그를 의심한다. 그리고 이내 우리의 판단이 틀렸음을 확인하고 반대급부로 오성철을 동정한다(택시에 탄 몰상식한 손님을 오성철이 폭행할 때 그의 잔인함에 잠깐이나마 동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동정은 결코 추인받을 수 없는 성질의 감정이다. 반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김형도는 어떤가. 김형도의 행위는 또렷하게 설명되지 않는 탓에 의심을 피할 순 없지만 결국엔 동정의 수혜를 받는다.
의심과 동정의 시선이 수시로 바뀌고, 또 중첩되면서 <애니멀 타운>은 선과 악의 확고하지만 편협한 경계를 허물려고 한다.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김형도가 복수를 마음먹기까지 행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제 힘으론 어쩔 수 없는 오성철의 혐오스런 일상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김형도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으려는 오성철의 목숨을 잠시나마 구해주는 건 일말의 도덕 때문이 아니라 전이된 연민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렴치한 행동이 아니라 치욕 때문에 고통받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김형도는 자신 또한 오성철과 다르지 않은, 불쾌하지만 무감각한 도시에서 사는 퀭한 눈빛의 맷돼지였음을 깨달았던 것은 아닐까. 이준혁, 오성태, 날냄새 풍기는 두 배우의 연기 또한 ‘짐승 같은 도시’ 애니멀 타운의 황량한 풍경을 각인시키는 요소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배우들의 무심함이 점점 극적인 드라마로 전개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