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세 번째 노미네이션. <파이터>의 샬린 역은 에이미 애덤스의 놀라운 재발견이기도 하다. 그녀는 거의 웃지 않고 노래하듯 지저귀지도 않는다. 전설적인 복서 미키 워드의 여자친구로서 그와 나란히 서서 세상과 맞서 싸울 뿐이다. 그녀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영화 속 ‘파이터’다.
“사람들이 나를 되게 순진한 숙녀처럼 생각한다는 게 놀라워요. 전혀 아니거든요. 지금까지 주로 연기했던 캐릭터와 나는 많이 달라요. 심지어 임신했을 때 날 인터뷰한 누군가는 ‘당신이 섹스한다는 사실에 세상 사람들이 놀랄 거다’ 라는 말까지 하더라고요. 할 말을 잃었죠. 내가 20대 때에는 말이죠, 완전 핫했거든요! (웃음)” 타고난 얼굴의 선만으로 혹은 유명세를 얻었던 몇몇 역할들의 캐리커처만으로 배우 본연의 특질 역시 그러할 것이다라는 기대는 언제나, 너무 쉽다. 배우들은 그 거대한 공동의 선입견 앞에서 때로 웃어넘기고 때로 정면으로 거절한다. 순응과 저항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하기, ‘섹스도 안 할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배우 에이미 애덤스가 <파이터>에서 맞닥뜨렸던 것도 그 비슷한 상황이었을까. “음, 난 별로 스위트한 타입이 아니에요. 오히려 좀 뻔뻔하고 드세죠.”
지금까지 에이미 애덤스는 <준벅>의 외로운 임신부, <마법에 걸린 사랑>과 <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에서 진실한 사랑을 노래하는 희귀한 로맨티스트, <박물관이 살아있다2>와 <프로포즈 데이>의 씩씩한 말괄량이, <다우트>에서 선의로 가득한 영혼을 연기했다. 어떤 역할이든 그녀가 표상하는 바는 밝고 아름답고 순수하며 지켜주고 싶은 그런 존재였다. 오죽하면 <다우트>의 존 패트릭 샤인리 감독은 이런 말까지 바쳤다. “에이미 애덤스에게는 복잡미묘한 세계에서 투쟁하는 선한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잉그리드 버그만적인 광채가 있다. 아주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얼굴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공주’ 캐릭터는 아니더라도 ‘공주적인’ 캐릭터를 표상하는 강력한 얼굴인 건 맞다. 에이미 애덤스가 연기한 <파이터>의 샬린이 다소 충격적으로까지 보이는 건 스스로 그같은 광채를 모조리 거세해버렸다는 점 때문이다.
술집여자 샬린의 삶에 동화되기
샬린은 웨이트리스다. 예전엔 꽤 잘나가는 높이뛰기 선수였고 그 덕분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대학을 다녔지만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연인 미키 워드(마크 월버그)가 왜냐고 묻자 그녀는 구구절절 설명은 딱 잘라버린 채 한마디로 답한다. “좀 놀았거든.” 무의미하게 흘려보낸 시간, 더이상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은 현재. 탱크톱에 핫팬츠 차림으로 동네 술집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남자들의 지분거림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건 살아남기 위해서다. 남자 앞에서 달콤한 표정을 짓거나 남자 때문에 슬퍼하며 울거나 할 여유조차 없다. 생존만을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던 이 여자가 미키 워드를 만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이 과묵하고 성실한 남자에게서 놀라운 가능성을 엿보고, 미키의 가능성을 짓뭉개고 있다고 생각되는 드센 가족에게서 그를 지켜냄으로써 미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꿔놓으려고 결심한다. 그러니까 샬린은, 보통 이같은 ‘남성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의 액세서리쯤으로 등장하는 예쁜 여자친구와는 거리가 멀다. 샬린은 미키의 엄마 앨리스(멜리사 레오)만큼이나 거칠고 결단력있고,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다. 그렇기 때문에 미키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미키의 요란한 가족과 혹은 미키의 우상이자 넘어서야 할 장벽이었던 형 디키(크리스찬 베일)와 맞붙을 때 샬린은 더욱 또렷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샬린을 두고 ‘21세기 버전 아드리안(1976년작 <록키>의 여주인공)’이라고 설명하는 건 옳지 않다.
에이미 애덤스가 <파이터>에 합류하게 된 건 감독 데이비드 O. 러셀과의 인연 때문이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던 어떤 영화 프로젝트 때문에 만났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고, 애덤스가 <프로포즈 데이> 촬영차 아일랜드에 머물고 있을 때 러셀은 그녀에게 <파이터>의 20페이지짜리 스크립트 일부를 보여주었다. “20페이지를 다 읽어갈 때쯤에야 ‘잠깐, 내 역은 어디 있는 거야?’ 싶었어요. (웃음)” 미키와 디키 형제의 실제 삶을 집중 조명하는 이 영화에서 샬린의 비중이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애덤스는 출연 결정을 내렸다. 데이비드 O. 러셀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마크 월버그, 크리스천 베일, 멜리사 레오라는 걸출한 캐스팅이 이미 완료된 것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촬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데이비드 O. 러셀은 마크 월버그와 크리스천 베일이 그러했듯, 에이미 애덤스가 실제 인물 샬린의 삶에 그대로 동화되길 요구했다. 어쩌면 애덤스 본인이 프로 배우로서의 길을 걷기 전인 10대 시절 극장식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했던 것, 육상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입학까지 보장받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 춤과 연기를 선택하며 대학마저 포기했던 것, 첫차를 살 돈을 모으기 위해 악명 높은 ‘후터스’ 바에서 3주 동안 일했던 것 모두를 끌어내 샬린과 동화할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리허설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본능적으로 긴장감이 고조됐어요. 다른 배우들은 너무나도 활기차고 열정적이었고 나도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꽤 공격적으로 대거리하며 연기했죠. 하지만 데이비드가 끊고 들어왔어요. ‘아냐, 아냐, 아냐, 샬린은 그딴 식으로 반응하지 않아. 그녀는 훨씬 터프해야 해. 저 사람들이 당신한테 소리지르게 내버려둬. 그러고 난 다음 그 사람들 말꼬리를 잘라먹고 들어가는 거야. 그게 훨씬 파워풀해.’” 러셀은 애덤스에게 ‘계속해서 술 마시는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다소 살을 찌울 것과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저음을 요구했다. 러셀은 그녀에게 “당신의 목소리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저… 너무 뮤지컬 같은 목소리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촬영 내내 애덤스에게 주의를 주었다. “낮게, 더더더 낮게.”
터프하면서도 섹시한, 그녀의 변신
<파이터>에 대한 호사가들의 관심 중 하나는,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데이비드 O. 러셀이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원만하게 촬영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에이미 애덤스는 “데이비드는 정말 흥분을 잘하죠”라며 에둘러 인정했다. “대신 그의 열정의 원천이 진정한 창조력이라는 걸 깨닫고 나자 그 다음부터 일하는 게 즐거워졌어요. 데이비드의 에너지와 내 연기를 못마땅해하는 순간을 혼동하지 않는 게 중요했어요.” 어쩌면 그것마저도 배우들의 에너지를 한층 고조시키며 그들의 또 다른 면을 끄집어내기 위한 러셀의 교묘한 트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나더러 펀치도 제대로 못 날릴 소녀 같은 인상이라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나자 진심으로 그에게 펀치를 날리고 싶어졌어요. (웃음) 그래서 마크 월버그의 트레이너에게 실제로 몇주 동안 복싱 레슨을 받았죠.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중요한 건 누군가를 내 손으로 상처입힐 수 있다는 게 아니었어요. 내 자신이 상처입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에요.”
공주에서 노동자 계급 여성으로. 좀 천박한 요약이지만, 에이미 애덤스는 그 속된 비유마저도 수긍할 수 있게끔 <파이터>를 ‘해치워’ 버렸다. 어쩌면 그녀가 예전에 줄곧 연기했던 사랑스런 소녀 역할을 앞으로는 스크린에서 보지 못할 것만 같다. “에이미는 지금까지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연기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터프하면서도 섹시한 년’ 말이다. 그녀는 그런 면모를 갖고 있고 잘 알고 있으며 카메라 앞에서 죽여주게 해냈다. 에이미의 완전히 다른 면을 오픈시킨다는 게 정말 흥분됐다.”(데이비드 O. 러셀) 에이미 애덤스의 차기작 중 하나인 록 뮤지션 재니스 조플린의 전기영화가 진심으로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