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성숙한 빨간 두건의 핏빛 스릴러
2011-03-23
글 : 안현진 (LA 통신원)
<트와일라잇> 감독에 의해 잔혹동화로 재탄생된 <레드 라이딩 후드>

“옛날에, 옛날에…”로 시작하는 동화들의 공통점은, 비현실과 상징으로 가득 찬 세계가 배경이 된다는 점과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교훈으로 끝맺는다는 점이다. 이야기에 늘 목이 마른 할리우드가, 마녀와 요정이 등장하고 왕자와 공주가 사랑하고 인어가 사람이 되는 이야기를 보고, 결말에 숨겨진 교훈보다는 환상적인 표면에 집중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최근 이 경향은 (동화가 원작은 아니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라푼젤> <마법사의 제자> 등 판타지 장르로 둔갑한 일련의 영화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첫편의 메가폰을 잡았던 캐서린 하드윅 감독의 신작 <레드 라이딩 후드>도 이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늑대를 늑대인간으로, 소녀를 로맨스가 가능한 성년의 여자로 변형시킨 이 영화는, <빨간 두건>이라는 잘 알려진 유럽의 전래 동화를 할리우드적 상상력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결과물이다.

영화의 무대는 중세 유럽의 작은 산촌. 오랫동안 늑대의 침입을 견디며 살아온 이 마을은 어른 키만한 높이의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집을 짓고, 보름달이 뜨면 늑대의 먹이가 될 가축 새끼를 문밖에 매어둔다. “숲에는 혼자 가면 안돼.” 어릴 때부터 어머니(버지니아 매드슨)의 주의를 듣고 자란 발레리(아만다 시프리드)에게 숲은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연인 피터(샤일로 페르난데즈)와 밀회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부잣집 아들 헨리(맥스 아이언스)와 발레리의 결혼이 정해진 날, 둘은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한데 발레리의 언니 루시가 늑대에게 죽임을 당하며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더이상 당할 수 없다며 늑대 사냥에 나선 마을 남자들이 하루 뒤 늑대의 머리가 꽂힌 창을 들고 돌아오자 사람들은 축제를 시작한다. 한데 때맞춰 마을에 찾아온 ‘파더 솔로몬’(게리 올드먼)은 “적은 늑대가 아니라 늑대인간”이라며,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늑대의 본성을 감춘 채 인간의 거죽 아래 숨어살고 있었다고 말해 마을을 동요시킨다.

<레드 라이딩 후드>는 소녀와 늑대에 대한 민화의 구석구석에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덧칠한 판타지 호러다. 영화는 상영시간 110분 동안 잔혹 동화, 로맨틱 스릴러, 범인이 누구인지를 소거법으로 밝히는 ‘후던닛’(Whodunit) 등 다양한 장르로 옷을 갈아입는다. 어린이용으로 윤색된 하드커버 동화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간의 어두운 단면들은 이 장르의 변용을 통해서 드러난다. 늑대와 말을 했다는 이유로 ‘마녀’로 지목된 발레리가 붉은 두건과 가면을 쓰고 마을 공터에 묶인 장면은, 마녀사냥, <주홍글씨> 등에서 사람들이 자행해온 ‘희생양 만들기’가 잔인한 형벌이었음을 새삼스럽게 확인시킨다.

재료는 같지만 패러디를 통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애니메이션 <빨간 모자의 진실>과 달리 <레드 라이딩 후드>의 플롯은 오리지널에 충실하다. “할머니 눈은 왜 이렇게 커요? 귀는 왜 이렇게 뾰족하죠? 이빨은 또 왜 이렇게 큰가요?”라는 유명한 대사와 늑대의 배에 돌을 채워 꿰맨 뒤 수장시키는 결말 등이 특히 그렇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PG13(13세 미만 보호자 동반 관람가) 등급을 위해 전체적으로 수위가 상당히 조절됐다는 점이다. 동화의 이면에 숨겨진 잔혹함과 윤색과 각색으로 사라졌던 야만스러운 섹슈얼리티를 부활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한 느낌이다.

다음은 2011년 3월3일, <레드 라이딩 후드>의 캐서린 하드윅 감독과 아만다 시프리드, 게리 올드먼 등 출연진과 나누었던 인터뷰의 일부다. 캐서린 하드윅 감독은 등장부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마치 애니메이션의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듯 힘차게 문을 열며 인터뷰 장소에 ‘입장’한 감독은 시종일관 신나고 들뜬 10대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어른에게 늑대는 위험한 섹슈얼리티의 상징

감독 캐서린 하드윅

현장에서 게리 올드먼과 이야기 중인 캐서린 하드윅 감독(오른쪽).

-어린 시절 가장 좋아한 동화가 뭔가.
=거짓말이 아니라 <빨간 두건>을 제일 좋아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빨간 두건’을 만들어줬을 정도다. 그리고 <백설공주>도 좋아했다. 이유는 사과를 좋아해서? <트와일라잇>의 원작 소설의 표지도 사과였다.

-할리우드가 동화를 사랑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700년 된 이야기가 가지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있지 않을까? 동화에 숨어 있는 상징은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10살에 <빨간 두건>을 읽으면 낯선 존재를 조심하라는 교훈으로 읽히겠지만, 어른에게 늑대는 “위험한 섹슈얼리티”의 상징으로 보이기도 한다.

-<레드 라이딩 후드>가 당신에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뭔가.
=발레리가 두려움(늑대)에 맞서는 부분이 좋았다. 영화는 ‘파더 솔로몬’의 등장과 함께 누가 진짜 범인인지를 가려내는 ‘후더닛’ 구조로 바뀌고,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해 파라노이아가 극대화된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희생양을 찾고, 발레리를 마녀로 몰아세운다. 그런 긴장 속에서도 끊임없이 두려움과 맞서려는 주인공이 매력적이었다.

-의상과 세트 디자인은 어떻게 준비했나.
=감독이 되기 전엔 건축학도였다. 17살 때부터 즐겨 읽던 책이 북유럽 지방의 건축물에 대한 거였다. 마을의 집 구조나 주변환경 등은 그 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의상은 중세 북유럽이라는 설정보다는 <빨간 두건>을 그린 그림과 삽화들을 참조했는데, 그중에서도 <보그>에서 촬영한 <빨간 두건> 컨셉의 패션 화보(2009년 9월) 속의 붉은 두건이 주는 선명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음악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더 나이프와 피버 레이로 활동한 스웨덴 뮤지션 카렌 드레이어 앤더슨에게 각본을 주고 음악을 부탁했다. 덕분에 태곳적 소리 같으면서도 부족적이고 또 모던한 음악이 탄생했다.

-<트와일라잇>과 <레드 라이딩 후드>의 풍광은 비슷하다. 겨울과 숲을 좋아하는 것 같다.
= 아니다. 나는 텍사스 남부 출신이라 사실은 햇살을 사랑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작비도 줄일 겸 배경을 여름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흰 눈밭 위에 길게 끌리는 붉은 두건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어쩔 수 없었다. <트와일라잇>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을 읽었을 때 머릿속에 축축하고 서늘한 숲과 창백한 뱀파이어가 떠올라 빨리 그 이미지를 영화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13> <독타운의 제왕들> 등 당신의 초기작과 비교하면 <트와일라잇> <레드 라이딩 후드>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초기 작품들이 그립지는 않은가.
=감독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상상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트와일라잇>과 <레드 라이딩 후드>는 나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해 만들어낸 세계다. 이 세계에 만족한다.

시대극과 코스튬, 새로운 경험이었죠

주인공 발레리 역의 아만다 시프리드

-어렸을 때 좋아한 동화가 있나.
=없다. 나는 동화를 무서워했다. <라푼젤>도 무서웠고, <재크와 콩나무>도 그랬다. 나는 어렸을 때도 동화보다는 실없이 웃기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레드 라이딩 후드>에 출연해서 좋은 점은 무엇인가.
=우선 아이코닉한 이야기를 영화화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점이 좋았다. 시대극이며 코스튬을 입어야 한다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전까지는 시대물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헨리라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선택이 눈앞에 있는데, 발레리가 피터를 놓치 못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팀 피터’, ‘팀 헨리’ 중 당신은 어느 쪽인가.
=개인적으로는 대답하기 힘들지만 발레리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피터와 발레리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가 있다. 숲에서 작은 동물을 사냥하며 자란 어린 시절이 그렇다. 발레리가 헨리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잘 모르는 데 반해 피터에 대해서는 어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어렸을 때부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팬이라고 들었다. <레드 라이딩 후드>의 제작자로 만난 그는 어땠나.
=이건 정말 슬픈 이야기다. 나는 정말 열성적인 팬이었다. 그런데 그건 11살 아만다의 이야기다. 레오가 대단하고 멋진 사람이고, 그가 선택한 영화라면 꼭 다시 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그 시절로 돌아가 그때처럼 그를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배우로 살면서 꼭 하고 싶었던 역할이 있나.
=잭 스나이더 감독의 <서커 펀치>에서 에밀리 브라우닝이 맡은 역할이 그랬다. 원래 내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빅 러브>(<HBO>의 TV시리즈) 마지막 시즌 촬영과 겹쳐서 못했다. 8개월이나 진행되는 큰 작품을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을 때 정말 많이 울었다. 어떻게든 하고 싶어서 <HBO> 관계자에게 전화까지 했었다.

-의식하는 또래 여배우가 있나.
=(조금 생각하다가) 밀라 쿠니스다. 그녀는 정말 현실적이고 동시에 엄청나게 웃기다.

할리우드 B무비의 일면을 떠올리게 해

파더 솔로몬 역의 게리 올드먼

-당신이 연기한 캐릭터 ‘파더 솔로몬’은 어떤 사람인가.
=신념이 오래되어 집착으로 바뀐 것만 제외하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늑대인간인 것을 알고 제 손으로 죽인 사람이니, 문맥상으로 보면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물에 빠뜨려 떠오르면 마녀라고 죽이던 시절이 이야기의 배경이 아닌가.

-<해리 포터>에 이어 <레드 라이딩 후드>도 코스튬을 입는 영화다. 당신은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나.
=코스튬을 입다가 평범하게 양복을 입고 연기하면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가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냐고? <배트맨 비긴즈> <해리 포터> <다크 나이트> <레드 라이딩 후드>까지 10년째 판타지영화만 하고 있다. 판타지영화에 출연하는 일은 상당히 외롭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아이들이 12살, 13살인데,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그 연령의 아이들이 영화를 봐야 하고, 그래서 이 장르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거다.

-<해리 포터> 시리즈 덕분에 당신의 아이들에게는 인기있는 아버지겠다.
=맞다. 근데 그건 <해리 포터> 때문이 아니라, <콜 오브 듀티>라는 비디오 게임에서 빅터 레즈노프라는 캐릭터의 목소리를 내가 녹음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아니라 비디오 게임 덕분이다.

-그래도 몇년 뒤엔 아이들에게 <드라큐라>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좀 다른 판타지다.
=나는 내가 출연한 영화를 소장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달력을 넘기며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드라큐라>는 요즘의 판타지와 비교하면 너무 다르다. 아마 그건 카메라 뒤에 선 사람(감독)에게 배짱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거다.

-<레드 라이딩 후드>에 출연한 이유는 무엇인가.
=각본을 읽었고, 마음에 들었다. “늑대를 죽여라”고 소리지르는 마을 사람들의 단체 정서가, 앞뒤 없이 “괴물을 죽여라”라고 외치던 할리우드 B무비의 일면을 떠올리게도 했다. ‘파더 솔로몬’ 캐릭터가 자기 중심적 인물이라는 것, 셰익스피어적 반영웅의 면모를 가졌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있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할까? 우선, 말했듯이 집에 12살, 13살 된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을 키우고 학교에 보내야 한다. 두 번째는, 지금은 어려운 시기다. 내가 이 영화를 거절하면 이 영화를 하겠다고 줄 선 배우들이 있다. 숀 펜에게도, 리암 니슨에게도 요즘은 어려운 시기다. 연기할 배우들은 많고 영화는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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