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건.’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고준희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참 말하다가도 그는 ‘어쨌건’ 하며 자신의 말을 정리했다. 이는 자신이 한 말을 성급히 닫아버리거나 서둘러 결론내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고준희의 ‘어쨌건’은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건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다. 그렇게 대단한 의미도 아닌, 이 ‘어쨌건’이라는 말을 그가 깨닫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고준희의 신작 <꼭 껴안고 눈물 핑>이 완성된 지 2년 만에 극장 개봉한다. ‘영화는 기다림의 예술’이라고는 하나 그 기다림이라는 게 누군가에게는 더 길게 느껴질 수 있다. 할 말이 꽤 많을 것 같은 상황임에도 고준희는 의외로 무덤덤하다. “어쨌건 개봉을 언제 하고 싶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영화는 뜻하지 않게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다. 그걸 유용하게 쓸 줄 아는 게 똑똑한 행동인 것 같다.” 이는 전작인 <걸스카우트>를 통해 얻은 교훈이다. “(<걸스카우트>의) 개봉이 늦어지고, 당시 준비하고 있던 드라마도 엎어지면서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 본명이었던 ‘김은주’에서 지금의 ‘고준희’(출연했던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2006)의 극중 이름이기도 하다)로 이름을 바꾼 것도 뭔가 변화를 주기 위해서였다.” 결국 스스로 내린 결론은 ‘조바심을 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것’,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게 최선을 다하다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 등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던 고준희에게 <꼭 껴안고 눈물 핑>의 ‘단비’가 자연스레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단비에게서 자신의 실제 모습과 비슷한 면모를 발견해서인지도 모른다.
헤어질 걸 알아도 사랑할 수 있을까?
참 대책없는 여자랄까. 연극배우 단비는 함께 공연 중인 동료배우 ‘찬영’(이켠)과 사랑하는 사이다. 찬영은 애 하나를 둔 유부남인데, 단비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극중 단비는 표현이 직설적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내 기준에 아니면 아니’라고 얘기한다. 말은 안 해도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다.” 어쩌면 감독이 단비 역에 고준희를 떠올린 것도 찬영에게 마냥 헌신적인 찬영의 아내(신동미)와 상반되게, 그러니까 당당하고 톡톡 튀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고준희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헤어질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까지 사랑을 할 수 있을까라는 ‘단비의 사랑관’이었다. “보통 사랑을 시작할 때 이 사람과 결혼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사귀잖나. 그런데 단비는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 최선을 다하자, 이런 주의다. 실제로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사랑을 하는데… 그 점에서 단비의 사랑은 가슴이 아프고 불안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캐릭터의 가치관에 대한 생각이 다른 만큼 캐릭터에 접근하는 시간이 제법 걸렸을 것 같다. 그러나 고준희는 서서히 캐릭터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총 18회차였다. 단비를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했다. 촬영 전 (이)켠이 오빠와 영화사에서 대본 리딩을 수시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호흡을 맞추는 데 적지 않은 공을 들여서일까. 극중 찬영과 단비가 보여주는 애정신(키스, 뽀뽀)은 두 사람이 실제 커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애정신 촬영 때) 어색한 건 없었다. 이번 영화에서 애정신을 처음 경험했던 (이)켠이 오빠와 달리 나는 매 작품에서 (상대역과) 키스를 했다. 여자들이 잔뜩 나오는 <걸스카우트>만 빼고. (웃음)” 오히려 어려웠던 건 극중 연극배우인 찬영과 단비가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연극장면이었다. 현재 고준희는 경희대 연극영화과를 휴학 중이지만 데뷔 때부터 잠시도 쉬지 않고 활동을 했던 터라 연극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해보지 못한 거라 확실히 어렵더라. 아무래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과 발성 자체가 다르니까. 뮤지컬은 몰라도 연극은 언젠가 도전하고 싶다.”
무엇보다 이켠이라는 또래 배우와 단둘이서 극을 책임진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는 큰 도전이었다. “<걸스카우트> 때 나문희, 이경실, 김선아 선배 사이에서 묻어가면서 선배들이 하자면 했던 것과 확실히 달랐다. <꼭 껴안고 눈물 핑> 기술시사 때 영화를 보면서 ‘아, 한 작품을 끌고 가려면 보통 에너지 가지곤 안되겠다. 더 많은 내공과 생각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고준희가 처음부터 이런 야무진 태도를 가진 건 아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극중 고현정의 동생으로 출연한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 때만 해도 고준희는 자신의 앞날이 탄탄대로일 거라 생각했다. <여우야 뭐하니>는 당시 사용했던 본명 ‘김은주’라는 이름 석자를 시청자에게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데뷔 뒤 지금까지 약 7년 동안 가장 자만했던 때다.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작품도, 광고도 많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바람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172cm라는 큰 키의 신인 여배우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담하고 귀여운 역할을 할 수 없으니까…. 20대 초반에 출연한 드라마에서 주로 부잣집 딸이나 도시 여자, 전문직 여성을 연기한 것도 큰 키 때문이다. 한 4cm만 작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고현정 선배처럼 되고 싶어요
신체적인 제약과 신인이기에 빠질 수 있었던 자만은 스스로를 반성하게 했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하고 난 뒤에 좋은 기회가 오면 받아들이자,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항상 겸손하게 행동하자와 같은 변화가 온 것도 그때다.” 태도가 변하면서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준희는 <여우야 뭐하니>에서 함께 연기했던 윤여정, 고현정을 비롯해 <걸스카우트>의 나문희, 김선아, 이경실, 드라마 <사랑에 미치다>(2007)의 이미연, 드라마 <종합병원2>(2008)의 차태현, 김정은 등 “기본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선배 배우들의 연기를 알게 모르게 흡수”해갔다. “어떤 부분을 딱 집어 배웠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선배들을 옆에서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에너지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특히 <여우야 뭐하니>에서 언니로 출연했던 고현정은 그가 닮고 싶은 대표적인 선배 여배우다. “보통 배우들은 연기할 때 자신의 감정을 신경 쓰느라 시야가 좁다. 그러나 (고)현정 언니는 카메라 뒤에 있는 스탭들까지 눈에 들어온다고 하시더라. 또, 연기를 ‘한큐’에 간다. 에너지를 첫 테이크에 쏟는 스타일이라 스탭들이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 좋은 에너지를 배우고 싶다.”
고준희의 필모그래피를 되돌아보면 혜성처럼 등장하거나 몇편의 작품만으로 족적을 남긴 또래의 어떤 배우들과 다르다. 그는 어떤 작품에서는 선배들 사이에서 한정된 역할을 하고, 또 어떤 작품에서는 작은 존재만 드러낼 뿐이었다. 단 한번도 혼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없었다. “혼자 있을 때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한다. 특히 20대 초반일 때 ‘쟤는 나보다 늦게 나왔는데 어째서 잘나가지’처럼 질투도 많이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을 괴롭히기보다는 어쨌건 내 상황이 이러하니 맡은 일 잘하고, 쉴 때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해야겠다 싶었다.” 지금 고준희의 머릿속이 오로지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 것도 그래서다. 그런 그의 다음 선택은 곧 방영 예정인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다. 극중 역할은 화장품 연구원으로 도시적이면서도 4차원 캐릭터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법한 캐릭터지만 익숙함으로부터 내 색깔이 들어간 새로움을 꺼내볼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캐릭터만 생각하기보다 이야기 전체에서 캐릭터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연구해야 할 듯하다.” 연기의 맛을 뒤늦게 알게 된 고준희의 야무진 발걸음은 지금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