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이제 ‘정치’를 논하자
2011-04-01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탈주와 아방가르드

한동안 ‘탈주’라는 은유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것은 ‘체제, 권력, 혹은 동일성의 폭력에서 벗어나 끝없이 자신을 생성하라’는 어떤 존재미학의 명법으로 보인다. 그 용어 자체는 들뢰즈에게서 유래할지 몰라도, 그에 앞서 그것을 실천한 것은 20세기 초의 이른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었다. ‘탈주’는 미시기획으로 한 개인의 존재미학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종종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거시기획으로 제시되어 왔다. 과연 탈주가 체제의 변혁을 위한 전략이 될 수 있을까?

보헤미안 랩소디

아방가르드 예술의 역사가 ‘탈주’라는 전략의 정치적 유효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지 모르겠다. 탈주라는 존재미학을 누구보다 앞서 실험했던 운동이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부르주아 문화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모종의 종말론적 정서를 갖고 있었다. 예술의 보헤미안으로서 그들은 일단 부르주아 사회와 문화로부터 자신을 철수시켰다. 하지만 요란한 급진적 수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방가르드의 작가들은 부르주아 정치는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 정치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아방가르드의 많은 작가들이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그 시도는 대개 참담한 실패와 좌절로 끝나고 말았다. 가령 이탈리아의 미래파는 파시즘에 동조했으나, 무솔리니는 이들을 버리고 제국양식으로 되돌아갔으며, 러시아의 미래파는 공산주의에 동조했으나, 스탈린 치하에서 마야코프스키는 자살을 해야 했다. 이렇게 아방가르드의 정치참여가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은, 미학적 급진주의와 정치적 급진주의가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는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정치적 성향이 있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었다. 사실 그들은 두개의 적과 싸워야 했다. 하나는 아카데미즘이라는 부르주아 문화, 다른 하나는 ‘키치’(kitsch)나 ‘퐁시프’(poncif)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취향. 고전주의에 맞서 그들은 새로운 형식, 새로운 기법, 새로운 언어의 실험을 통해 전통의 파괴를 시도했다. 동시에 키치에 맞서 그들은 대중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난해한 예술을 만들어야 했다. 소통은 코드를 전제하고, 코드는 획일성을 의미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아방가르드의 전략을 영원한 탈주로 파악한다. 현대예술은 파편화하고 불구화한 그 형식(‘몽타주’)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함을 고발한다. 관리된 사회의 획일성에 항의하기 위해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고, 이를 위해 대중과 공유된 코드를 파괴함으로써 스스로 난해해진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문화산업은 그런 아방가르드마저 대중에게 이해되는 언어로 포장하여 상품으로 제시한다. 이 추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술은 새로운 실험을 통해 끝없는 탈주를 감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방가르드 예술은 곧 한 가지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아방가르드는 부르주아적 예술제도를 비웃었지만 자신을 키치와 구별하기 위해선 여전히 모종의 고전적 기준을 필요로 했다. 실제로 오늘날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 ‘현대의 고전’이 되어 부르주아 미술관에 걸려 있다. 아방가르드는 ‘유행’을 경멸했으나, 끝없는 탈주의 결과는 다소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다가 다른 것으로 교체되는 예술언어들의 ‘유행’이었다. 아방가르드 실험의 성공 여부는 사실 그 실험이 새로운 유행이 되느냐에 달려 있었다.

작가들의 사회적 존재 역시 모순에 처해 있었다. 아방가르드는 부르주아 사회를 거부했지만, 부르주아의 돈주머니까지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는 혁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는 ‘공무원’이 될 뿐이다. 부르주아의 돈주머니를 거부하는 한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가는 실업자로 살 수밖에 없다. 결국 작가로서 독립된 존재를 유지하려면, 부르주아 사회를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역시 부르주아를 후원자로 가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민중미술조차 강남 딜레탕트들의 컬렉션 대상이 된다.

필요했던 허위의식

자기가 사는 체제를 부정할 자유 역시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고트프리드 벤은 나치즘에 귀의했으나 나치는 표현주의를 ‘퇴폐예술’로 낙인찍었다. 소비에트는 피카소 동지의 당성은 높이 평가했으나, 그의 그림에는 절대로 찬동할 수 없었다. 극우로 달려간 이탈리아의 미래파, 극좌로 달려간 러시아의 미래파는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결국 그 급진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라는 물적 토대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상부구조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아방가르드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 정신은 60년대에 ‘네오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으로 부활하나, 이 새로운 아방가르드는 이미 과거에 제스처로 취했던 그 급진성마저 가질 수 없었다. 충격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법. 60년대의 대중은 이미 아방가르드의 온갖 충격적 행위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박물관에서는 변기를 두개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다의 도발이 예술제도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졌다면, 네오 아방가르드의 도발은 이미 예술제도 내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여겨졌다.

내세운 목표에 도달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아방가르드의 의의를 무시할 필요는 없다. 외려 아방가르드의 업적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고 해야 한다. 이 탈주의 시도, 이 불가능한 사명이 20세기 미술 전체를 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에게 파괴는 곧 생산이었고, 탈주는 곧 창조였다. 다만, 그 운동이 예술을 넘어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만큼은 과장된 것이다. 그것은 허위의식, 그러나 역사적으로 필요했던 허위의식이었다.

탈주라는 기획

탈주를 외치는 이들은 여러모로 아방가르드 작가들을 닮았다. 그들 역시 부르주아 정치는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의 정치마저 거부한다. 그들의 눈에는 후자 역시 전자 못지않게 ‘근대적’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재탈영토화로 이어지는 끝없는 탈주를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변혁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현대예술에 관한 아도르노의 생각과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탈주’를 통해 체제를 변혁한다는 원대한 기획 역시 아방가르드와 비슷한 운명에 처하지 않을까?

아방가르드가 아무리 도발을 감행해도 자본주의 체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외려 그 도발마저 자신의 문화로 받아들여 체제의 포용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써먹는다. 탈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역시 실은 자본주의라는 물적 토대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상부구조 위에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아무리 급진적인 수사로 치장해도, 탈주가 미네르바의 글만큼 체제에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탈주로 체제를 변혁한다는 믿음은 허위의식, 물론 어느 정도 필요한 허위의식일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업적이 정작 ‘목표’가 아닌 ‘결과’에 있듯이, 탈주라는 실험의 성패 역시 그들이 목표로 표방하는 체제의 변혁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방가르드가 야만 속에서 문화를 구원하는 세속적 수도원의 역할을 했듯이, 이 정신적 야만 속에서 인문학을 구원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공을 거둔 것이다. 요는, 아방가르드 운동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정신의 탈주를 통해 도발적이고 창조적인 이론을 끝없이 생성해내는 것이다. 이제 ‘정치’를 논하자.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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