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전작들에 비하면 결말이 던져주는 묵직함이 덜하다. 감정의 파고를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차분한 시선으로 설득력있게 잡아내는 솜씨는 여전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그랜 토리노>처럼 응축시켜 폭발시키지 않는다. 보기에 따라선 심심하고 밋밋할 수도 있는 엔딩. <히어애프터>의 어딘지 비어 있고 밀도 낮은 이야기는 잔잔한 가운데 늘 일렁거리는 에너지를 빡빡할 만큼 채워두었던 전작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단지 호흡을 고르는 거장의 조용한 한 걸음이라 위안 삼아도 좋고,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는 피터 모건(<더 퀸>과 <프로스트 vs 닉슨>의 작가) 각본의 영향 탓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저 고용감독의 위치에 충실했을 뿐이라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기엔,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참으로 단단하다. 특유의 안정감있는 연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고통의 극복, 죽음을 통한 삶의 긍정,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그친다면 그저 거장의 범작을 아쉬워하고 가볍게 실망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그렇게 조곤조곤 읊조리는 데 만족했단 사실을 좀처럼 믿을 수 없다. 밋밋하기까지 한 결말을 목격한 뒤에도 내내 뇌리를 맴돌며 되살아나는 어떤 인상, 이야기로 완성되는 감정의 폭발과는 또 다른 종류의 묵직함을 느끼며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사색적 연출이 두드러지는 이 영화를 몇번이나 곱씹고 난 뒤에야 전작들보다 더욱 단단해진 뿌리의 끝이 조금씩 더듬어진다. <히어애프터>는 고저 없는 드라마가 아닌 이스트우드라는 거목의 뿌리가 향하는 방향에 주목해야 할 영화다.
성장과 함께 망각되는 죽음
<히어애프터>의 세계관은 이스트우드가 인식하는 세상의 연장에 있는 것이 분명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따뜻하지만 관조적인 시선 역시 여전하다. 사람과 삶에 대한 그의 연민과 애정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다. 죽음에 대한 그의 오래된 관심은 전작 <그랜 토리노>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스스로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삶을 완성한 <그랜 토리노>의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질문한다. “죽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끝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가요? 그럼 삶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명백한 것은 삶보다 죽음쪽에 가까울 노장의 초점이 언제나 삶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선은 늘 살아 있는 자들을 향한다. 산 자는 죽은 자의 세계를 알 수 없음에도 대답없는 물음을 반복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거울을 통해 삶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도, 번뇌도, 절망도, 회한도 모두 남겨진 자의 몫인 까닭에 죽음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응당 삶이 무엇인가란 메아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한 가지 의문. 삶을 관조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음에도 이스트우드가 굳이 죽음을 통해 삶을 환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히어애프터>는 이 문제에 대해 비교적 명확하게 답변한다. 그것은 우리가 늘 죽음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누구나 한번쯤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밤잠을 설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긴 밤, 자신이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는 불연속적인 존재임을 자각하는 절망의 시간. 그러나 우리는 소위 ‘성장’이라는 변명과 함께 죽음의 그림자를 일상에서 지워버렸다. 해결하지 못한 숙제는 악몽처럼 되살아나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만 우리는 그 무게조차 깨닫지 못한다. 망각이란 이름의 마취제를 맞고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된 대신 현재의 삶에도 둔감해진다. 자신만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근거없는 맹신.
아나운서 마리(세실 드 프랑스)를 둘러싼 방송국 사람들이 언뜻 보여주는 기계적인 비인간성은 거기에서 기인한다. 나는 이 영화가 죽음에 관한 충격으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 서로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쓰나미로 죽음을 경험한 마리,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는 조지(맷 데이먼), 자신의 반쪽 같은 쌍둥이 형을 잃은 마커스(프랭키 맥라렌)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상태야말로 오히려 긍정적이다. 다만 그들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진실에 잠시 먹먹해져 있을 따름이다.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다른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도 무감각하며 ‘지금, 여기’가 아닌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상상도 하기 힘든 심연을 응시한 다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의미에서 다음 걸음을 뗄 수 있다. 죽음에서 삶으로의 연속, 또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연결. 바로 이 ‘이어짐’이야말로 이 영화가 호소하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삶이 죽음을 향해 이어져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파리의 마리가 동남아시아에서 쓰나미를 겪고, 샌프란시스코의 조지는 죽은 자들 때문에 산 자들과 관계를 지속하지 못하며, 런던의 마커스는 형의 모자 덕분에 지하철 테러를 모면하는 것은 죽음이 어느 순간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퍼져 있음을 상기시킨다. 죽음을 통한 전지구적 연결. 보편타당한 절대적 진실 앞에서 세 사람은 서로를 만나고 혼자가 아님을 자각한다. 언뜻 건조하게 서로를 발견하는 이 영화의 엔딩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단절된 세계를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순간은 드라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극적인 감동으로 매끈하게 봉합되는 순간 그것은 다시 지극히 ‘영화적인 것’이 되어버리며 현실과의 단절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거리두기를 통한 카메라의 윤리
초반의 쓰나미 장면은 2011 아카데미 시각효과상 후보에 오를 만큼 압도적인 현실감을 자랑한다. 실제로 쓰나미에 휩쓸리는 듯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장면 덕분에 일본에서는 상영이 중지되기도 했다. 런던에서 마커스의 쌍둥이 형이 불량소년들을 피해 달아나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 역시 이 영화에서 가장 진한 슬픔의 정서를 전달한다. 드라마적으로 볼 때 <히어애프터>의 특이한 점은 초반이 오히려 영화적으로 가장 생생하고 활력이 넘친다는 점이다. 죽음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 죽음을 인식하는 영역으로 들어올 때 영화는 ‘리얼하게’ 그 순간들을 구성해나간다. 정면에서 덮쳐오는 쓰나미 장면의 리얼리티는 얼마 전 TV에서 보던 일본 대지진의 쓰나미 영상을 도리어 가짜처럼 느끼게 만들어버린다. 죽음의 순간이 생생할수록 그것은 스크린 너머에서 자주 접하던 쾌감의 영역에 머문다.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적어도 영화가 현실인 척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초반 장면들이 지나간 뒤 영화는 이렇다 할 사건을 내세우지 않고 뚜벅뚜벅 일정한 속도로 거리를 둔 채 세 인물의 일상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특히 망각된 죽음을 응시하기 시작하는 마리와 마커스와 달리 처음부터 죽음의 영역에 매몰되어 있는 조지는 첫 등장부터 강한 콘트라스트와 어두운 색조를 통해 실루엣을 장면화한다. 한편의 정지된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지루한 장면의 연속. 구도적으로 황금비율을 맞추며 빠른 커팅 없이 일정한 속도를 반복하는 화면은 안정감보다는 거리감을 자아낸다. 정면에서 인물의 표정을 응시하기보다는 늘 누군가의 뒷자리에 카메라를 머물게 하거나 여타 영화에 비해 유달리 부감장면이 많은 것은 역시 이스트우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 사색하는 완고한 현자의 눈은 늘 ‘지금, 여기’에 초점을 맞춘 채 따뜻하게, 그리고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응시한다.
죽음과 사후세계를 소재로 하는 <히어애프터>에는 죽음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이미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살아 있는 우리에겐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단순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 이스트우드는 그것이 카메라의 윤리이자 재현의 온당한 태도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카메라는 화면에 무언가를 채우려 하기보단 비워내기 위해 애쓰며 최대한 인물과 거리를 두어 관객이 몰입하지 않고 사색할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삶을 지속하는 인물들이 만들어낸 흔적들은 축적되어 비로소 보편적인 삶의 두께를 담아내는 것이다. 내가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을 긍정하고 싶은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그 풍성함은 우리가 그것에 다가가기 위해 영화를 되새김질하는 순간에만 우리와 이어질 수 있다. 삶과 죽음. 연속과 불연속. 관계와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