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봤어요? 발가벗겨진 느낌인데.” <나는 아빠다>의 기술시사 직후 만난 김승우. 김승우는 “(기자가) 영화 안 보고 인터뷰해야 잘난 척도 좀 하지”라며 웃어젖힌다. 그의 호탕한 웃음에는 초조함도 묻어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대뜸 “영화 어떻게 봤냐”고,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몇번이고 물어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빠다>의 비리 형사 종식은 그동안 김승우가 감춰왔던 얼굴이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산 사람도 장기밀매 조직에 팔아넘기는 무지막지한 종식을 떠안고 김승우는 지난여름 끙끙댔다. 탈을 수시로 바꾸는 것이 배우의 업이라지만, 일상에선 더없이 좋은 아빠인 김승우에게 ‘나쁜 아빠’ 종식은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는 도전이었을 것이다. 딸에게서 아빠라는 말을 단 한번도 듣지 못하고, 자신 때문에 딸을 잃은 상만(손병호)의 복수를 감내해야 하는, ‘나쁜 아빠’ 종식을 만났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랑 <해변의 여인> 때 인터뷰하고 처음이다.
=벌써 몇년이야? 2006년이니까 5년이 지났네.
-그동안 영화 출연은 좀 뜸했다. <포화속으로> 말고는.
=요 몇년간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다. 마흔 넘어서 처음으로 무대에도 서보고. 뮤지컬 <드림걸즈>는 내가 스타냐 아니냐 뭐 이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고집 센 미국 연출자가 실력이 안되면 무대에 세우지 않겠다고 해서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했다. 공연 끝나고 멋진 모습 봤다면서 같이 사진 찍자고 할 때에야 ‘아,내가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이 들더라. <승승장구> 진행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 시작했는데, 처음엔 한 6개월 정도 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1년 넘게 하고 있고, 그걸로 예능 신인상도 받았고.
-드라마 <아이리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처음엔 많이 당황했다. 내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지 않는 작품을 선택한 게 오랜만이니까. 이러다 계속 작은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또 강한 캐릭터이다 보니 소화하지 못하면 연기 못하는 배우였구나 할 수도 있을 테고. 다행히 시청자가 ‘미친 존재감’이라는 반응을 보여주셔서. (웃음) 돌이켜보면 김승우는 참 운이 좋은 놈이구나 싶다. 그 운이 계속 따라줄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아빠다>의 비리 형사 종식도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나리오를 지난해 2월에 받았다. 합천에서 <포화속으로> 촬영하고 서울 잠깐 올라왔을 때 건네받았는데 그동안 악역은 안 해봤으니까 재밌겠다, 조금 더 연구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극중에서 종식은 욕을 입에 달고 산다.
=육두문자는 뭐 이미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서 실컷 보여줘서. (웃음) 개인적으로 육두문자를 잘 쓰는 편이긴 하다. 예고편을 본 관객이라면 거친 남자 이야기라는 걸 알겠지만, 제목만 듣고 따뜻한 영화라고 생각한 관객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악역은 제의가 와도 거절한 건가.
=그런 건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 때문이겠지. 1990년대 ‘스크린쿼터 싸움’ 초창기에 명동에서 영화인들이 시위한 적이 있다. 상복 느낌의 검정색 옷을 입고 명동에서 시위하고 나서 청룡영화상 시상식장까지 그 차림으로 걸어갔다. 스크린쿼터가 전국민적인 관심사라 여기저기서 카메라들이 많이 왔다. 근데 며칠 뒤에 선배들한테 혼났다. 웃었다고,앞으로 웃지 말라고. 내가 설마 그 숙연한 상황에서 웃었겠나. (웃음) 내 얼굴이 기본적으로 밝은 느낌을 주나보다. 타고난 거지.
-액션 연기는 어땠나.
=이번 영화의 액션이 고난도의 현란한 액션은 아니다. 그랬다면 특훈을 받아야 했겠지. 하지만 이 정도는 하겠더라. 예전만큼 빠르진 않아도 아직 신경이 살아 있다. 흉내내는 것 정도는 하니까. 평소에 운동을 하기도 하고.
요 몇년간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다. 마흔 넘어서 처음으로 뮤지컬 무대에도 서보고, <승승장구> 진행도 하고 있고, 이걸로 예능 신인상도 받았고. 이번 영화 <나는 아빠다>의 비리 형사 종식도 그동안 김승우가 감춰왔던 얼굴이다.
-첫 장면의 액션은 대역을 쓴 것 아닌가.
=(내가 했다니까) 아, 정말. 촬영, 무술 스탭들이 이전에 같이 작업했던 분들이라 내가 뭘 잘하는지 다 안다.
-뭘 잘하나.
=뒤돌려차기. 첫 장면 액션에서 내 얼굴이 좀 잘 나오게 찍었어야 했는데. (웃음)
-그래도 몸이 예전 같진 않을 텐데.
=저렇게 훌륭한 액션을 보여줄 나이가 아닌데 무리를 많이 했다. (웃음) 3년 전에 찍었다면 하루면 회복이 됐을 텐데 이번엔 2∼3일씩 걸렸다. 뛰고 나서 전엔 한 10분 쉬면 되는 것도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호흡도 가쁘고. 그래서 요즘 담배 끊으려고 노력 중이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아이들이 자립할 때까지는 건강해야 하니까. 근데 영화를 어떻게 봤나? 아까부터 물어봤는데 왜 대답을 안 줘. 어때? 별점 주면 몇개? 일단 흥행 면에서.
-관객수를 어떻게 맞추겠나.
=별점 2개 반은 넘어요? (대답하지 않자) 어, 불안하네. 작품성은? (대답하지 않자) 개봉할 때 잡지 못 보겠네. 별점이 얼마나 상처 주는데. <포화속으로> 때 무대인사 가다가 20자평 보고 배우들이 ‘헉’ 했다. (웃음)
-그 상처 어떻게 푸나?
=받아들여야지, 뭐.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남에게 평가받아야 자극도 받는 것이고. 어렸을 때보단 자유로워졌다. 어렸을 땐 아주 미친다. 저 기자가 나를, 우리 영화를 그렇게 봤단 말이야? 그 사람 막 싫어하고.
-종식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 아이를 둔 부모라는 게 도움이 됐나. 아니면 외려 혼란을 줬나.
=원래는 김승우와 인물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스타일이다. 카메라 돌면 김승우는 버리고 캐릭터한테 가는데, 이번에는 그게 좀. 원치 않아도 내 상황이 자꾸 개입되니까 머리가 복잡했다. 시나리오도 현장에서 많이 바뀌기도 했고, 그러다가 위경련 때문에 실려 가기도 하고. 지방 촬영 하러 가면 하루 두세 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 촬영 일정 때문은 아니고 잠이 안 와서.
-종식과 딸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촬영 도중에 컨셉이 좀 변했다. 이 과정에서 다소 혼선도 있었다. 과거가 생략되어 있어서 종식과 딸의 관계에 대한 실질적인 설명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김)새론이가 <아저씨>로 스타가 됐는데 그럴 줄 미리 알았으면. (웃음) 나로선 종식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굴곡을 좀더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종식이 악랄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좀더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원래 시나리오대로 태생적으로 나쁜 놈의 극단적인 모습을 더 보여주는 것도 재밌었을 것 같고. 물론 이런 아쉬움 때문에 더 애정이 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종식은 세상과 혼자 맞서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촬영하면서도 외롭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나 <해변의 연인> 때는 감독님한테 투정 부리면 큰형처럼 나를 많이 도닥여줬는데, 이번엔 그런 도움을 많이 못 받았다. 그럴 만큼 여건이 여유롭지 못했다.
-상대역인 손병호씨와는 어땠나.
=외로웠다니까. 워낙 바쁘셔서. 우리 촬영할 때 ‘손병호 게임’이 터져서 예능 끌려다니시느라 대화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대본을 깊이 팔 수 있었지만.
-현장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을 텐데.
=의자 개수 줄고, 식사 메뉴 줄고. (웃음) 그래도 풍요로울 때 놓쳤던 것들을 다시 붙잡으려는 안간힘이 있다. 이런 표현은 싫긴 하지만 헝그리 정신이랄까. 모두 절실한 마음으로 작업한다. 다만 현장의 어려움을 더 많이 체감하는 스탭들을 보면 안타깝다. 배우들은 알다시피, 뭐. 게다가 우리 집은 둘이 벌잖나.
-김승우는 큰 욕심 부리지 않는 배우가 아닐까 싶다. 카메라 바깥 일상도 행복해 보이는 것 같고.
=주변에서 다들 그런다. ‘넌 왜 그렇게 욕심이 없냐’고. 그래도 승부욕은 대단하다. 자극하지 않고, 건드리지 않으면 나만큼 핸들링하기 편한 사람이 없는데, 한번 건드리면. (웃음)
-차기작은 드라마 <리플리>(가제)다.
=한때 러브 스토리 없는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배우로서 나이에 맞는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심은 있다. <리플리>(가제)가 딱 그런 작품이다. 가정을 갖고 있는 40대 남자와 거짓말 잘하는 20대 여자아이의 끈끈한 사랑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 하고 싶다, 그랬다.
-드라마 <강력반>에 출연키로 했다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하차했다는 기사를 봤는데.
=이젠 공식적으로 이야기를 해야겠네. 지난해 11월에 <나는 아빠다> 촬영 끝내고 <강력반>이랑 <리플리>(가제) 대본을 받았다. 일정도 <강력반> 끝내고 <리플리>(가제)를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리스> 찍고 야구하고 <나는 아빠다> 촬영하고, 그러는 동안 어깨를 계속 다쳤다. 지금도 옷을 입을 때 ‘아, 아’ 하면서 입을 정도다. 야구도 전혀 못하고 있고. 재활치료를 해야 하는데 <강력반>은 액션 드라마다 보니 아무래도 어렵겠더라. 그래서 양해를 구했고, 좋게 끝냈다. (이)종혁이를 추천해서 그쪽에서도 좋다고 했고. 그런데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경력 많은 배우에게 우문이지만 배우의 배역 욕심은 끝이 없을 테니. 탐나는 배역이 있나.
=배역 욕심내기보다 필드에 오래 있고 싶다. 짧고 굵게 가자, 생각했는데, 이젠 반대다. 사실 실력 없으면 필드에 오래 못 있는 것 아닌가. 필드에 오래 남아서 실력을 더 쌓고 싶다. 아이들이 다 자랐을 때까지 내가 왕성한 활동을 할 자신은 없지만 훗날 “우리 아빠가 거짓말 안 했구나” “우리 아빠가 연기 열심히 한 좋은 배우였구나” 하는 말은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