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복수의 성공담이 아닌, 관계의 실패담
2011-04-14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고백>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일본사회의 알레고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백>의 첫 고백. 유코(마쓰 다카코)는 부주의에 의한 사고사로 알려졌던 딸의 죽음이 자신이 담임을 맡은 학급의 학생 A와 B가 저지른 살인이었음을 침착한 어조로 고백한다. <고백>은 유코의 고백을 재빨리 마무리한 뒤, 이를 계기로 한 다른 인물들의 고백을 연쇄시킴으로써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이 <라쇼몽>을 상기시키긴 하지만, <라쇼몽>이 인물의 진술 차이로 사건의 진실을 인식 불가능의 영역에 머무르게 하는 반면에, <고백>은 앞선 고백의 빈틈을 연쇄되는 고백이 반복적으로 채우거나 뒤집음으로써 사건의 진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고백>에서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나미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는 그와 관련한 또 다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맥거핀에 가깝다.

연민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악의

일반적으로 고전적 서사에서 고백은 파편화되고 흩어져 있는 삶(기억)의 편린을 통일성있는 서사로 완성하는 기능을 하곤 한다. 하지만 <고백>에 드러나는 여러 인물의 고백은 이러한 의미의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고백>은 인물의 고백을 통해 마나미의 죽음이라는 동일 사건 위에 포개져 있는 인물들의 악의(惡意)를 하나씩 들춰냄으로써, 그들의 삶을 공허한 것으로 게워내도록 한다. <고백>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사연이 모이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 모두가 자신의 ‘빈곤한 자아’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들의 빈곤한 자아는 어떤 대상의 상실을 자아의 상실로 경험한 결과라는 공통의 기반을 갖는다.

물론 이러한 자아의 빈곤함이란 소년, 소녀에게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고백>에서 소년, 소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타자의 시선이 비어 있는 나의 자아를 채워주는 것. 나오키(후지와라 가오루)에게 슈야(니시 유키토)는 유일하게 자신을 바라봐주는(또는 인정해주는) 타자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정작 슈야는 어머니의 시선을 욕망하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포함하여 그 누구의 생명도 제물로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슈야와 나오키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시선을 욕망하면서도, 정작 이들은 타자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주체로 스스로를 정립하려 하지는 않는다. <고백>의 비극은 이러한 시선의 일방통행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고백>에서 인물들이 펼쳐놓는 고백은 내면의 비밀스러운 진실의 토로가 아닌,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는 도구이자(이는 유코와 나오키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자아의 빈곤함과 불완전성을 감추기 위한 포장술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슈야의 고백은 나를 바라봐달라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려달라는 어떤 호소처럼 들리기도 한다. <고백>은 인물에 대해 센티멘털리즘의 여지를 남기며 연민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긴 하지만, 인물들의 가학적, 피학적 행위는 연민의 허용 범위를 훌쩍 넘어서버린다. <고백>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아무리 빈곤한 자아에 허덕이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죄의식의 마취 상태에서 악의의 행위가 멈출 여지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단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

<고백>에서 유코의 고백은 복수이자 단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의 행위에 자신을 동일시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복수란 일종의 ‘되갚는 행위’다. 즉,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채무 정리의 행위, 그것이 복수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약자를 향한 강자의 복수를 다루지 않는다. 그 결과가 너무도 뻔하기 때문이다. <고백>에서 성인과 13살 소년들이라는 불공정한 힘의 관계 속에서도 복수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소년들은 청소년보호법이라는 보호막 아래 처벌을 면제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고백>이 어떠한 면에서는 어른이 청소년에게 복수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데 있다. 유코의 복수는 그 대상인 소년들의 불완전한 자아의 수준에서 그 눈높이에 맞춰 행해진 것이다. 즉, 자아라는 측면에 본다면, (윤리적 태도를) 청소년의 지위까지 격하시킨 어른만이 그러한 방식으로 복수할 수 있다. 딸을 잃은 유코가 슈야와 나오키에게 법 외부의 사적 복수를 다짐했을 때, 그녀는 단순히 교사라는 직업만을 버린 것이 아니다. 유코의 고백은 자기 파멸의 몸짓이거나 자아를 상실한 자신에 대한 폭로에 가깝다.

영화 말미에서 슈야에 대한 복수를 마친 유코는 슈야의 말투를 흉내낸다. 무언가 교훈적인 내용을 말한 뒤, 이내 농담이었다며 둘러대는 슈야의 말투는, ‘이제 갱생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말한 뒤, 그것을 농담으로 돌려놓는 유코의 대사를 통해 반복된다. 우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농담이었다는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해도, 이러한 말투의 흉내내기는 유코가 슈야를 갱생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유코가 슈야의 길에 들어섰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 것이라면, <고백>의 차가운 정서는 단순히 복수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윤리적 태도의 격하(또는 그와 관계된 자아의 빈곤함)로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 여지없이 삭제한다는 데 있다. 단죄의 행위마저 악의의 흉내내기에 머물고 말 때, 과연 우리에게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겠는가.

억압된 가능 세계

<고백>을 단순한 복수담이나 청소년의 범죄에 대한 단순한 문제제기 차원을 넘어, 일본사회의 알레고리로 부를 수 있다면, 이는 무엇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불완전한 자아에 허덕이는 동등한 위치로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사쿠라미야의 죽음은 단순한 인물의 죽음이 아니라, 이러한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어졌던 어떤 가능 세계의 죽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고백>은 이러한 가능 세계를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작품이 아니다. 이는 <고백>이 영화에서 발생한 파국의 원인을 분석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어떤 결과로서의 파국의 상황을 병렬화하는 작품에 가깝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 이러한 유토피아적 가능성은 실패의 흔적으로 텍스트에 남아 있곤 한다. <고백>이 복수의 성공담이 아니라, 관계의 실패담이고, 복수의 쾌감보다는 관계의 실패가 주는 어두운 전망이 짙게 드리운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고백>이 (잠재적으로) 드러내는 실패한 가능 세계는 ‘상호 인정’의 관계 속에 진정한 주체성을 개화하는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적 관계이든, 학교이든, 가족이든 간에 일방통행의 시선이 아닌 상호교환 시선이 전제될 수 있는 공동체.

영화 도입부에 등장하는, 빈 우유갑이 각 학생의 이름이 새겨진 우유 박스의 빈칸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처럼, 텅 빈 자아의 인물들은 개성이라는 각자의 공간에 처박혀 있을 뿐이다(미즈키의 고백을 상기하라). 그들은 한 공간에 함께 머물지만 각자의 공간으로 차단된 채 서로를 마주보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고백>에서 가장 유토피아적인 순간, 달리 말해 사라져버린 상호 인정의 관계(공동체)의 가능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두말할 것도 없이 슈야와 미즈키가 함께하는 짧은 시간이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미즈키만의 착각이었음이 드러나긴 하지만, 그 시간이 주는 낭만적 정서의 힘은 <고백>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우울의 정서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선사한다. 나카시마 데쓰야는 이 장면 8mm 카메라의 낡은 질감을 통해 향수어린 정감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8mm 카메라처럼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면 시뮬라크르화된 이미지로 단지 흉내만 낼 수 있을 뿐이다. 유코 스스로 칭하듯, 슈야를 향한 복수를 지옥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슈야의 유일한 바람이었던 이 가능 세계의 싹을 여지없이 잘라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고백>이 드러내는 일본사회의 진실은 오직 사라진 것을 그리워하며 흘리는 인물들의 눈물 속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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