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샬롯 갱스부르]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롤러코스터의 삶이 좋아
2011-04-14
글 : 김도훈
<안티크라이스트>의 샬롯 갱스부르

당신이 여배우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 몇 가지가 있다. 물론 ‘여배우 십계명’ 같은 것이 서류로 만들어진 적은 없다만, 그래도 몇 가지 금기를 늘어놔보자. 첫째, 오스카 수상작이 될 법한 진지한 영화와 싸구려 액션, 코미디를 동시에 촬영하지 말라. <몬스터 볼>로 오스카를 받은 해 본드걸이 된 할리 베리, 오스카와 골든라즈베리를 같은 해 수상한 샌드라 불럭을 생각해보시라. 둘째, 남편이 연출한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컷스로트 아일랜드>로 함께 지옥에 떨어진 뒤 결국 이혼과 경력의 부침을 겪었던 지나 데이비스를 한번 떠올려보시라. 사랑에 빠지면 원래 금인지 똥인지 구분하기 힘든 법이다. 셋째, 그리고 궁극적으로, 라스 폰 트리에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를 정치적으로 깐깐하게, 공정한 여성주의자의 입장에서 정리해보자. <어둠 속의 댄서>는 눈이 점점 멀어가는데다 저지르지 않은 죄 때문에 교수형 당하는 여자 이야기다. <도그빌>은 거대한 수레바퀴에 묶인 채 집단 강간당하는 여자 이야기다. 이쯤 되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대충 눈치챘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서는 스크린 앞에서 육체와 정신을 모멸당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많은 여배우들은 출연에 승낙하고도 이를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비욕은 <어둠 속의 댄서>가 “감정적인 포르노”이며 라스 폰 트리에가 “영혼의 도둑놈”이라고 분노했다. 니콜 키드먼은 <도그빌> 현장에서 큰소리로 감독과 논쟁을 벌이다가 이렇게 외쳤다. “왜 당신은 여자들에게 이토록 악마처럼 굴어요?” <안티크라이스트>에 처음 캐스팅된 에바 그린은 대본을 읽고는 아예 도망쳐버렸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들어온 사람이 샬롯 갱스부르다. 무슨 배포로?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의 딸로 살다가…

사실 배포와 논쟁에 관해서라면 샬롯 갱스부르는 이미 오래전에 면역 백신을 맞은 적이 있다. 갱스부르의 아버지는 전설적인 샹송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 어머니는 영국 출신의 도발적인 여배우 제인 버킨이다(몇몇 독자에게는 에르메스의 ‘버킨백’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리라). 1991년 세르주 갱스부르가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때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이런 추모사를 읽었다. “우리 시대의 보들레르, 우리 시대의 아폴리네르.” 글쎄, 세르주 갱스부르를 미워하던 수많은 또 다른 세력은 아마 ‘샹송계의 사드 백작, 마침내 죽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갱스부르는 성적으로 문란하고 예술적으로 치명적이며 체제적으로는 반항적인, 전형적인 프랑스 한량이었다. 그에게 예술과 논쟁은 동의어였다.

샬롯 갱스부르는 논쟁을 즐기는 아버지에게 이용당하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시작은 13살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부른 샹송 <레몬 인세스트>였다. 이 노래는 근친상간과 소아성애에 대한 은근한 찬사로 읽힐 수 있는 가사를 가지고 있었다. 전세계가 난리가 났다. 영미권에서는 금지곡이 됐다. ‘샬롯 갱스부르는 이 경험으로 무시무시한 성적 트라우마를 얻었고, 그 때문에 <안티크라이스트>처럼 도발적인 영화에 출연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갱스부르는 껄껄껄 웃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노래를 부를 때 그닥 순진하진 않았다. 무엇에 대한 가사인지 잘 알고 있었고, 재미있었다. 물론 당시에도 예술적 도발에서 쾌락을 찾는 아빠에게 이용당한다는 상상은 해봤으나, 뭐, 그게 아빠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잖나.” 이후 그녀는 <귀여운 반항아>(1986)를 통해 15살의 나이로 세자르 신인배우상을 수상하며 전 프랑스가 좋아하는 소녀 중 하나가 됐다. 80년대 당대의 소피 마르소가 사랑스러운 프랑스의 첫째딸이었다면 샬롯 갱스부르는 어딘가 약간 위험한 프랑스의 둘째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샬롯 갱스부르의 여배우 경력은 이상할 정도로 거기서 멈춘 듯하다. 1996년 그녀는 프랑코 제피렐리의 <제인 에어>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연기하며 아역의 기운을 완전히 벗어던졌고, 2001년작 <아내는 여배우>의 감독 이반 아탈과 결혼했다(지금 그들은 12살과 7살 난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지난 2003년 그녀는 첫 할리우드영화 <21그램>에서 숀 펜과 연기했고, 2005년과 2007년에는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과 토드 헤인즈의 <아임 낫 데어>에 연이어 출연했다. 그녀는 프랑스와 할리우드를 오가는 드문 여배우 중 하나로, 많은 당대의 감독들과 손을 잡고 끊임없이 작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샬롯 갱스부르는 여전히 여배우라기보다는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의 재주 좋은 딸 혹은 ‘프렌치 시크’라 불리는 대표적인 패셔니스타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안티크라이스트>를 찍기 전의 인터뷰에서 샬롯 갱스부르는 “내가 여배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정말로 힘들다. 한번도 연기학교를 다닌 적이 없고, 어린 시절엔 방학 때만 영화 일을 했다. 그래서 영화계의 일원이 아니라는 느낌을 종종 갖는다. 메소드도 없다. 매번 나는 첫 영화를 다시 찍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을 진지한 여배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여배우란, 위태로운 법이다.

<안티크라이스트>로 ‘자멸’하면서 배우로 거듭나

지난 몇년은 샬롯 갱스부르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불릴 만하다. 시작은 2007년의 뇌수술이었다. 수상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한 갱스부르는 6개월 뒤 <아임 낫 데어>의 촬영장에서 극렬한 두통을 경험했다. 파리에서 MRI로 뇌스캔을 한 그녀는 의사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뇌가 한쪽으로 몰려 있습니다. 빈 공간에는 피가 가득해요. 지금쯤 죽어 있거나 반신불수여야 정상일 정도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드릴로 두개골을 뚫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에서 회복하자마자 샬롯 갱스부르는 <안티크라이스트>에 출연하기로 했다. 극단적인 역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윌렘 데포의 성기를 짓이기고, 그의 다리에 거대한 구멍을 뚫고, 자신의 클리토리스를 스크린 앞에서 잘라내야만 했다. 갱스부르는 그것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해독제였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연기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해독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정말이지 극단적인 곳으로 깊숙하게 들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배우로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다.”

극단적으로 자신을 파멸시켜야 했던 <안티크라이스트> 이후, 그녀는 예민하고 수줍은 성격에 세르주 갱스부르라는 아이콘을 등에 업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나는 여전히 모든 것에 불만족스러운 상태다. 언제나 자신을 의심하고, 그런 의심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하지만 이젠 그런 성향이 내가 일하는 방식의 하나라는 걸 깨닫고 있다. 스스로를 끝없이 부정하는 것. 그것이 나의 메소드다. 나는 균형없이 비틀거리는 상태를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불안정한 이 상태가 좋다. 하나를 잘하고 나면 다음 하나를 망치고, 그러고 나서 다른 하나를 훌륭하게 해내는 것. 이게 바로 내가 좋아하는 롤러코스터의 삶이다.” <안티크라이스트>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샬롯 갱스부르는 아버지 세르주와, 자신을 진짜 여배우로 인정해준 선배 이자벨 위페르에게 감사를 보냈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여배우 샬롯 갱스부르는 진짜로 시작한다.



샬롯 갱스부르의 여섯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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