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인디라마]
[김영진의 인디라마] 네 스타일을 죽이지 마라
2011-04-21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중편 <남매의 집>과 닮은 그러나 약해진 조성희의 첫 장편 <짐승의 끝>

일년 전 이 지면에서 중편 <남매의 집>을 평하며 조성희의 첫 장편영화 <짐승의 끝>에 대한 기대를 비친 적이 있다. 마침내 개봉한 <짐승의 끝>은 <남매의 집>의 확장형 버전이라 할 만하다. 어떤 환유로도 묶이지 않는 묵시록인데, 이건 <남매의 집>에서도 이미 맛봤던 조성희의 성향이다. 하나의 세트로 제한된 <남매의 집>의 배경에 비해 <짐승의 끝>은 시골이라는 특정공간으로 다소 넓어졌으며 대부분의 사건이 야외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감안해도 장편영화에 맞는 에너지가 기대만큼 못 미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폐소공포증을 느끼게 했던 <남매의 집>의 템포감이 이 영화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의 기이한 이야기가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늘어지고 있다는 인상만을 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지나치리만큼 솔직하게 쓴 조성희의 제작후기가 <발칙한 카메라의 이면>이라는 책에 실려 있다. 편집에서 가다듬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숏을 넉넉하게 찍어둔다는 생각이 템포감을 없앤 것, 카메라 바깥의 상황에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제작여건에 종속당했던 것, 주연 여배우의 연기를 기계적으로 통솔한 것 등을 조성희는 가감없이 자책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완성된 영화는 장편 분량을 감당하지 못해 좀 허덕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예기치 않은 상황의 연속으로, 절대자인 듯한 사람마저도 괴물로 비치는 영화 속 상황의 원초적인 공포감이 많이 누그러져 있다.

부조리한 스토리, 더 부조리하게 찍었으면

<짐승의 끝>은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임신부 순영이 탄 택시에 정체불명의 모자 쓴 남자가 탑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자는 택시 기사와 순영의 과거사와 성격을 귀신같이 알아맞히더니 곧 전기가 나가고 세상이 지옥이 될 거라고 예언한다. 그의 말대로 전기가 나간 뒤 순영이 택시에서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다. 택시가 멈춘 자리에서 멀지 않은 휴게소로 가려는 순영에게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무전기로 연락을 해온다. 그는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으라고 충고하지만 순영은 길을 나서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상한 일들을 겪으며 차츰차츰 더 심한 곤경을 겪는다. 어떤 연유로 임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순영은 어른답지 않게 지나치게 순진한 여자이며 영화 초반 그녀는 뜻밖의 부당한 일들에 속수무책 끌려다니는 캐릭터다. 주변 인물들은 딱히 악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예기치 않은 괴물성을 드러내며 순영을 위기에 빠트린다. 순영의 내면에 그런 것이 있었는가 싶게 순영도 조금씩 변한다. 요컨대 그녀도 괴물성을 드러낸다. 심지어 절대적인 신처럼 이 모든 상황을 관장하는 야구 모자를 쓴 남자도 의도하지 않은 심술궂음을 순영에게 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모든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물론 부질없는 짓이다. 감독이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이 부조리한 스토리를 더 부조리하게 찍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기대보다 못한 완성도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것은, 혹시 이 4차원적 성향의 감독이 영화학교 졸업작품을 만든다는 외적 상황에 자신을 지나치게 맞춰 무의식적 검열을 한 건 아닐까, 라는 걱정이었다. 그랬다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시도하지 못했다면 그가 차기작을 찍을 것으로 알려진 제작사에서는 이런 모험이 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의 원안부터 이 영화는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냐?’라는 물음에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었다. 또는 억지로 논리를 꿰맞추더라도 정작 영화를 촬영하는 단계에서는 더 막나가도 좋았을 것이다.

조성희의 장점은 그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자신이 의식적으로 지배하는 작품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체계를 무너뜨리게 되는, 곧 작품 자체가 창작자의 의식적 체계를 벗어나 제 마음대로 꾸려질 가능성이 큰 상상력을 갖고 있는 감독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모두 다 균질화된 상상으로 매끈한 이야기를 향해 일로매진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이때에 영화학교 학생으로서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이 애초의 원시적인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지 못하는 소심한 형태로 나왔다. 조성희는 어떤 체계나 기원이 없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질의 소유자이다. 기형적인 작품, 모두 다 해독 불능이라고 고개 젓는 작품에서 그가 에너지를 다할 기회가 좀 위축되고 만 것이다.

인물들의 괴물성의 에너지는 대단해

그렇더라도 현재의 <짐승의 끝> 완성본에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야구 모자 쓴 남자를 비롯해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정의할 수 없는 괴물성의 에너지는 끈적하게 객석을 감아돈다. 논리적으로 접수할 수 없는 적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각자 살아남아야 할 정당한 이유를 갖고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의도하지 않은 가해를 입히고 피해를 당한다. 정해진 사이클없이 짧은 시간 동안에 되풀이되는 이 선의와 악의의 교차 겹침은 <짐승의 끝>이라는 제목의 ‘짐승’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서적으로 실감하게 해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듯이 보이는 야구 모자 쓴 남자가 선의로 베푸는 행동의 비논리성이다. 그는 구원할 수 있지만 구원해주지 못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 종교적 화두로 인류가 품어온 문제를 간단하게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그가 내뿜는 종잡을 수 없는 초월한 위치의 기세는 보는 사람을 주눅들게 할 만큼 대단하다. 박해일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느물느물한 초월성, 선한 듯이 보이지만 살짝 표정만 바꿔도 속이 궁금한 무서운 인물처럼 보이는 개성이 온전히 인물에 투영되었다.

비록 여전히 잠재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쉽지만 이상 말한 것들을 어떤 범주에 묶어 설명하려는 것에 조성희의 영화가 저항하는 결을 가졌다는 것이 앞서 밝힌 대로 <짐승의 끝>의 진정한 매력이다. 누군가가 지금 벌어지는 세상의 정황을 명료한 언어로 설명해준다 하더라도 개별적인 각자의 욕망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충돌하며 예상할 수 없는 카오스를 만들어내는 광경은 <짐승의 끝>에서 방사형으로 넓게 퍼진다. 일직선으로 쭉 뻗어가는 게 아니라 걷다보면 다시 출발했던 지점에 돌아오고 더 나쁜 상황에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 기진한 끝에 맞이하는 파국의 심리를 이 영화는 의미의 괄호를 치고 묘사하고 있다. 부당한 사람들, 수상쩍은 공기로 에워싸여 있지만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조차 종잡을 수 없다. 애초에 이 모든 상황을 제공한 듯이 보이는 절대자와 같은 사람도 끝내 답을 주지 않는다. 상황이 좋지 않은 터라 주인공 순영은 아주 일상적인 희망 한 자락을 펼쳐놓기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은 결말을 맞는다.

동시대 사회에서 누군가 이렇게 기막힌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숙명대로 이 특이체질의 감독이 장래에도 자기 폼대로 살아갈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불길하게도 <짐승의 끝>은 어찌됐건 첫 장편을 만든 감독이 주위 상황에 가위 눌린 흔적이 어쩔 수 없이 깔려 있다. 주제넘게 충고한다면 이 감독은 모든 경계가 명확한 스토리에서 일탈의 강도를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힘들더라도 전혀 다른 형식체계를 스스로 억압하지 않으며 지향할 수 있는 쪽으로 나아가든지 명료한 선택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스토리의 인과성에 따라 화면의 인과성을 맞추는 쪽으로 주류형식이 설계돼 있다. <남매의 집>에서 비교적 만개했으며 <짐승의 끝>에서 가능성으로 그친 조성희의 스타일은 그 인과성을 의식하지 않으며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확장성에 고유성을 갖고 있다. 자칫 난삽해지기 쉬운데도 그것이 난삽함일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표식이 될 가능성을 조성희의 세계는 품고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잘 만든 영화에서 그 가능성이 발현될지 아니면 예상치 못한 형태로 그 가능성이 폭발할지 아직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저 조성희의 자기 세계가 쭉 유지되기를 관전자 입장에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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