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끔찍한 농담인가 극한의 예술인가
2011-04-19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논란의 영화,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

논란의 영화가 온다.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다. 제목이 풍기는 도전적인 뉘앙스만큼이나 영화는 첫 공개 직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는 찬반양론에 휩싸여왔다. 강력한 표현 수위에서부터 영화가 포괄하는 생각들까지 논란의 여지는 강력하다. 그 찬반의 의견들을 짚으며, 동시에 그 의견들이 놓치고 있는 <안티크라이스트>의 핵심을 새롭게 탐색하며 이 논란의 작품을 소개한다.


영화를 공개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라스 폰 트리에 영화 작업의 진정한 최후 공정으로 자리잡은 지는 오래됐다. 극장에서의 야유와 박수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말과 글의 공방전 그 때문에 종종 일어나는 소동들. 예컨대 2009년 칸에서 열린 <안티크라이스트> 기자회견장의 풍경. 어쩌면 그 자리의 모두가 공모자였을지도 모르지만(자, 누가 시비를 거는지 보자!), 하여간 영국의 한 타블로이드지 기자가 손을 들었고 “어떻게 당신의 영화를 정당화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일단 심사가 한번 꼬이면 비아냥과 허세의 제스처가 본능처럼 튀어나오는 것으로 유명한 폰 트리에다. <유로파>가 황금종려상 수상에 실패한 것에 불만을 품고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로만 폴란스키를 가리켜 “난쟁이” 운운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그는 참지 않았다. “내가 왜 정당화해야 하는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 당신이나 관객을 위해 만들지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라도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운을 뗐고 한번 심기가 불편해지자 마침내 그의 입에서는“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감독이다. 나머지는 다 과대평가 받았다”는 말까지 쏟아졌다. 이날의 입씨름이 꽤 시끄러웠는지, <안티크라이스트>에 관한 많은 기사와 평문들이 잊지 않고 이 시시비비를 적어두고 있다.

이후에도 찬반양론은 멈추지 않았다. 일례로 영화에 대한 호불호를 지수로 표현하는 영화 사이트 ‘로튼 토마토’를 보면 150명의 평자 중 긍정의 평이 72, 부정의 평이 78로 박빙이다. 지지의 글 중 대표적인 건 이런 것이다. “언제나 선동가였던 폰 트리에는 어떤 진지한 영화감독, 심지어는 브뉘엘과 헤어초크 이상으로 관객을 대면하고 뒤흔든다. 그는 섹스, 고통, 지루함, 신학 그리고 스타일 넘치는 실험들로 이것을 한다. 왜 아니겠나. 우리는 적어도 영화사 중역이 끔찍한 물타기를 한 이후가 아닌, 정확히 감독이 의도한 그것대로 영화를 보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로저 에버트) 수적으로 다소 우세한 비판론에는 이런 것들이 있다. “라스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로 크고 비만한 병신 예술작품을 행한다. 마치 비평적 남용과 의도적으로 연애라도 즐기듯, 이 덴마크의 악동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자의식적으로 도발적인 이미지로 이 신학적-심리학적 호러 작품을 빽빽이 포장한다.”(<버라이어티> 토드 매카시) “내장된 고통을 만들기를 원하는 <안티크라이스트>는 결국엔 진실한 경험을 투사하는 데 있어서는 덜 성공적이다. 이 급격한 전술은 결국 마비된다.”(<빌리지 보이스> 짐 호버먼)

능수능란한 이미지 직조술 vs 뻔뻔하고 폭력적인 고문 포르노

지지자들은 강력하면서도 몽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감독의 능수능란한 이미지 직조술 혹은 배우들에게서 육체적 극한의 연기를 끌어내어 그것을 통각으로 느끼게 하는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윌렘 데포와 샬롯 갱스부르는 높은 수위의 연기를 해냈고 샬롯 갱스부르는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한편, 그 찬사의 기준들이 고스란히 역겨운 가짜로 보이거나 그것에 감독의 진심이 담겨 있다 해도 미숙하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이 영화를 반대한다. 극렬 반대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영화는 일종의 뻔뻔하고 폭력적인 고문 포르노에 불과하며 자기 과시로 도배된 허깨비 같은 영화다.

폰 트리에라면 그 찬반의 태도 자체가 필시 못마땅할 것이다. 그의 작품이 논란을 몰고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그 자신의 더 개인적인 결과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가 자신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일종의 요법으로서 출발했다고 밝힌다. 우울증이 극에 달해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삶과 꿈에 불현듯 등장하곤 했던 불안과 두려움의 이미지와 유년 시절부터 즐겨 읽었던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작품의 어떤 불온한 인물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남들이라면 안식과 평안함으로 탈출하려 했을 그 공황기를 광기의 프로젝트로 탈출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내 영화 중 영화적으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 자체가 한 인물의 파탄적인 공황상태를 치료하는 과정이다. 부부가 격정적인 섹스를 나누는 동안 그들의 갓난아기가 문이 열린 요람 바깥으로 나온다. 그러더니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고 부부의 섹스가 정점에 달하는 그때 아기는 눈이 오는 창밖으로 떨어져 죽고 만다. 장면이 바뀌면 부부는 비탄에 빠져 있다. 아니, 아내(샬롯 갱스부르)가 비탄에 빠져 있고 남편(윌렘 데포)은 그녀를 치유하기 위해 애쓴다. 심리치료사인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그들이 ‘에덴’이라 부르는 아무도 없는 숲속의 작은 오두막을 찾아 안정과 정상을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이 집 주변에서 오히려 기괴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남편의 치료가 실패할 조짐을 보이더니 마침내 아내는 광기로 물들고 남편을 해치려 든다. 폰 트리에는 프롤로그-비탄-고통(혼돈이 지배하리라)-절망(대학살)-세 거지들-에필로그로 장을 나눠 영화를 전개한다.

장점과 단점은 아무래도 뚜렷해 보인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우화 내지는 동화의 방식을 즐겨 취하며 그것으로 서사를 압축 또는 은유하는데 <안티크라이스트>도 그런 장점을 지녔다. 동시에 몇몇 놀랄 만큼 어둡고 불온한 이미지들은 때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그림에 접근한다. 그러나 전시적 강도를 더 고려한 것처럼 보이는 위악적인 장면들이 영화를 때때로 위태롭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내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 그녀가 남편의 성기를 학대하거나 자신의 음핵을 가위로 자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혹은 폰 트리에는 어떤 불가사의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과거를 불현듯 길어올리곤 하는데, 이때 그 의도의 비약이 심각하여 도리어 유치해지는 때가 있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가 대표적이다.

마지막 헌사, 고백문인 동시에 불안감 가득한 유아적 표식

장단점을 교차하면서 영화는 에덴에서 벌어지는 아담과 이브의 싸움으로, 근대적 합리성의 믿음과 태곳적 선악의 격돌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때 <안티크라이스트>에는 더 말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 한 가지 남는다. 폰 트리에는 그 점에 관하여 영화가 다 끝난 다음에야 알려준다. 영화가 끝나자 다소 엉뚱해 보이는 자막이 뜬다. “이 영화를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칩니다.” 이미 데뷔작 시절부터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대한 경외심을 숨기지 않은 폰 트리에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경의를 드러낸 적은 예전에 없었다. 성기를 자르고 악마적 본성이 판치는 이 영화와 도저히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 헌사.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헌사에 관하여 지적은 많지만 납득할 만한 설명이 많은 것 같지 않다. “폰 트리에가 타르코프스키와 공유하는 것은 바로잡을 수 없을 만큼 위선적인 하찮음과 잔인함, 세속적 권력구조에 대한 강박적 반감”(<필름 코멘트>에 기고한 각본가 래리 그로스의 글)이라고 멋지게 표현한 글이 있지만 이 글은 매력적인 내용과 무관하게 <안티크라이스트>에 관해서는 다소 추상적인 설명이 된다. 적어도 <안티크라이스트>에서라면 두 감독의 사이는 좀더 구체적이다. “내가 조그마한 텔레비전으로 영화 <거울>을 보았을 때 나는 황홀경에 빠졌다. 만약 종교에 관하여 말한다면 이것이 종교적 관계다. 나는 그의 영화들을 수차례 보고 또 보았다. 나는 그가 나의 첫 번째 영화 <범죄의 요소>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가 매우 싫어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건 정직한 리액션으로 느껴진다. 그는 나보다 앞선 세대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가깝다고 느낀다. 만약 어떤 감독에게 영화를 바친다고 하면 누구라도 당신이 그로부터 훔쳤다고 말하진 않을 것이고 이건 정말 도망치기 쉬운 방법이지 않겠나.” 폰 트리에의 말이다. 그러니 영화사상 대표적인 안티크라이스트(폰 트리에)가 영화사상 대표적인 크라이스트(타르코프스키)에게 영화를 바치는 이 아이러니는 순수한 경외심을 넘어서서 어떤 도전장이며, 그 말은 사실 “이 영화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서 훔쳐왔습니다’라는 고백문인 동시에 행여 훔쳐 썼는데도 누군가가 몰라주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일부러 새겨넣은 불안감 가득한 유아적 표식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이미지를 흠모하되 그의 신앙을 반격하고 그의 미의 철학은 경외하지만 종교 철학은 부정하는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를 철저하게 타르코프스키적 이미지로 주조하면서도 그 결과는 안티 타르코프스키적 영화에 도달한다. 비. 바람. 안개. 불. 공히 타르코프스키의 그것으로 알려진 이미지들이 <안티크라이스트>에서도 중요하고 지배적이며 꿈결 같은 순간들을 형성한다. 다만 그건 향수의 꿈이 아니라 모든 게 끔찍한 악몽의 꿈이다. 만약 인물과 관계된 것이라면, <안티크라이스트>는 언제나 아이가 최후 희망의 징표로 남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반대로 그 아이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여성, 순결하고 위대한 여성, 특히 어머니로 대변되는 일종의 마리아는 여기에 없으며 악한 본성을 발산하는 광기의 여인만이 있다(그리고 우연이겠지만 윌렘 데포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 그리스도 역을 맡았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유작 <희생>에서 구원과 호소의 노래 바흐의 <마테 수난곡>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흐르게 한다면 라스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거절과 외면의 노래 <나를 울게 내버려두소서>를 흐르게 한다. 마침낸 타르코프스키가 죽은 나무를 살려내는 영화(<희생>)를 세상에 남기고 떠나갔다면, 지금 폰 트리에는 <안티크라이스트>에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우뚝 세워두고 불안을 탐색한다.

관객을 조급하게 만드는 폰 트리에의 재능 혹은 사기술

존경하는 선배 감독 영화의 모든 미적 이미지들을 차용하되 그것으로 그의 사상을 전적으로 되받아치기. <안티크라이스트>는 그런 점에서야말로 흥미진진한 안티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해 타르코프스키와 크라이스트에 관한 강력한 패러디다. 타르코프스키는 그가 숨을 거두던 해인 1986년의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기독교의 자기희생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에서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사람의 한 측면을 다루려고 했다”고 말했다. 현존하는 감독 중 거기에 가장 동의하지 못할 사람이 폰 트리에일 것이며 적어도 <안티크라이스트>가 그 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작품을 타르코프스키에게 바쳤다. 그런데 망자인 타르코프스키가 <안티크라이스트>를 좋아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폰 트리에가 12살 시절부터 테이블 위에 두고 보았다는 니체의 말년의 글 ‘안티크라이스트’. 폰 트리에가 신봉하는 무와 부정에의 의지 혹은 오해가 어디에 물길을 대고 있는지, 막연하게나마 그 안에 대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티크라이스트>는 폰 트리에의 사상적 논쟁의 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타르코프스키의 그림자가 중요하다 해도 그걸 일종의 주요 단서로 미뤄둔 다음 이 영화의 평가를 다시 시도할 필요도 있다. 그 마지막 헌사로서 영화는 흥미롭게 해석될 여지를 갖게 되었지만 그 알리바이와 무관하게 판단은 또한 다른 식으로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미적 논쟁이 다시 핵심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안티크라이스트>를 그냥 능란한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성스러운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이 영화에 관해 우린 어느 편에라도 서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되는데 바로 그렇게 조급하게 만들 줄 안다는 것이 더도 덜도 아닌 폰 트리에 영화 <안티크라이스트>의 뛰어난 재능 혹은 뛰어난 사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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