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talk]
[Cine talk] 상업영화라면 이렇게 결말짓지 못했겠지
2011-04-26
글 : 김용언
사진 : 백종헌
인권영화 프로젝트 <시선 너머> 중 정보인권 다룬 <백문백답>의 김대승 감독

강이관, 부지영, 김대승, 윤성현, 신동일. 공통점을 찾기 힘든 다섯 감독이 한 작품으로 뭉쳤다. 올해로 설립 10주년을 맞이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프로젝트 <시선 너머>에 참여한 것. 새터민, 미등록 이주노동자, 정보인권 등의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각자의 연출 터치에 따라 따뜻하거나 유쾌하거나 진중하게, 흥미로운 발자취를 보여준다. 이중 성폭력과 정보인권을 노련하게 결합시킨 <백문백답>을 연출한 김대승 감독과 만났다. 그는 “인권영화 프로젝트를 통해 관객보다 먼저 감독 자신이 재교육된다. 뭘 알아야 찍으니까 알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가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시선’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다섯 개의 시선>에 포함된 정지우 감독님 작품을 참 좋아한다. 나에게도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청탁이 왔다. 처음에는 다른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게 있어서 시간이 안될 것 같아 정중하게 거절했는데, 결국 그 프로젝트가 성사되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이현승 감독님이 술 한잔 하자고 부르더니, “인권영화 그냥 해!”라고 하더라. 술김에 알겠다고 했는데 그 다음날 바로 전화가 왔다. (웃음)

-주제는 자유롭게 결정한 것인가.
=아니다. 나와 신동일 감독님은 처음부터 정보인권 주제를 청탁받았다. 사실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라서 깜짝 놀랐다. 어제도 음원 다운로드를 처음 시도했는데, 노래 한곡 받는 데 두 시간 걸렸다. 그 정도로 둔한 사람이 어떻게 정보인권을 다룰 수 있을까 고민스러웠다. 게다가 같은 주제를 다루게 될 신동일 감독님은 영화에서 꾸준히 사회적 발언을 담아온 분이고. 너무 불리한 게임이다 싶었다. (웃음) 그만둬야 하나 싶었는데, 두 가지 이유로 마음을 굳혔다. 매년 한편씩 만들던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예산이 반 토막나 있었다. 알고 보니 정권과 위원장이 바뀌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2년에 한편씩 찍을 수밖에 없는 괴로운 상황이더라. 그 얘기를 들으니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많은 지원을 해주셨다. 자료를 보내주고 이런 책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강의에 초대해주고. 그러면서 정보가 어떻게 인권과 관계되는지 가닥이 잡혀갔다. 인권문제는 권력문제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아는 쉬운 주제로 시작하여, 권력자가 정보를 어떻게 악용하는지를 파고들면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주 역의 김현주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상업영화 감독인 나를 굳이 데려온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 부응해야 할 것 같았다. (웃음) 연기도 잘하고 재능 기부에 흔쾌히 공감할 수 있는 스타를 찾다보니 김현주씨가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인권영화의 취지를 설명했더니 그 자리에서 흔쾌히 승낙하더라. 알고 보니 김현주씨는 기부와 봉사가 일인 사람이더라. 유방암 예방 캠페인에 참여하고 굿 네이버스 등에서 꾸준히 봉사하고 재능을 기부해왔다. 그런 활동에 대한 두려움이라든지 이해타산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서른 넘도록 연기를 하는 이 배우의 속내가 깊어질 수밖에 없는 여러 세월이 쌓여 있었다. 기존의 발랄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결말에 이르면 희주가 새로 옮기는 직장, 어머니와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안겨주는 부담 등을 통해 그녀의 미래가 여전히 어두울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나아질 수가 없다. 나아진 것처럼 보이게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희주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번 맨땅에 헤딩하려 하지만 상사는 “넌 내 손아귀에서 못 벗어난다”며 끝까지 굴종을 요구하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예전처럼 완벽하게 돌아갈 수 없다. 희주는 죽을 때까지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이다. 더불어 우리의 개인 정보가 항상 타인에게 노출되어 있으며 관찰되고 있다는 것까지, 전부 무섭게 느껴지길 바랐다. 만일 이게 상업영화였으면 희주가 실장의 뺨이라도 때리고 당당하게 나오는 장면을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문백답>에선 아니었다. 발버둥쳐도 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문백답>이라는 제목은 어떻게 지은 건가.
=혹시 백남준 선생이 1984년 벽두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퍼포먼스를 한 걸 봤나? (웃음) 빅 브러더가 정보를 수집하고 통제하며 지배할 거라던 1984년이 왔는데, 실은 빅 브러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문제라는 걸 예술가가 비아냥거리는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이 옳았나, 조지 오웰이 옳았나. 난 둘 다 옳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출발했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넷 카페 등에 가입할 때 백문백답 형식으로 아무 거리낌없이 자기 소개를 쓰지 않나. 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희주의 입사지원서, 직장 담보 대출, 출퇴근 기록 등 모든 정보를 회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경찰도 희주에게 나이트클럽, 야한 옷, 시위 경력, 우울증 같은 아무 상관없는 시시콜콜한 질문을 퍼부으며 2차 피해를 만들어낸다. 그런 것들이 결합되며 <백문백답>을 제목으로 지었다.

-‘시선’ 시리즈가 벌써 다섯 번째다. 총 41명의 감독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아무래도 더 잘 만들고 싶다는 부담이 은연중에 있을 것 같은데. (웃음)
=상업영화는 흥행을 목적으로 한다. 관객이 뭘 좋아하는지, 러닝타임이라든가 장면 전환 속도 같은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부담을 가져야 한다. 인권위원회에서 만드는 영화는 자유롭지 않을까, 기존의 내 색깔과 다른 걸 실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역시 이번 프로젝트에서 나를 부른 건 상업영화 찍듯 재미있는 영화를 찍으라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까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다. (웃음)

-<시선 너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해 짧은 감상을 알려준다면.
=강이관 감독님의 <이빨 두 개>는 탈북 청소년의 눈을 통해 우리 모습을 보게 하는 훌륭한 성취를 이뤘다. 탈북자 소녀가 “돈이 그렇게 좋아?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내뱉을 때마다 나에게 하는 말 같아 가슴을 치게 된다. 부지영 감독님의 <니마>는 따뜻하고 섬세하고 낭만적이다. 비극을 다루면서도 넉넉하게 포용하는 느낌이 있다. 내가 연출했다면 절대 그렇게 못하고, 칼같이 들이대려고 했을 것 같다. 윤성현 감독의 <바나나 쉐이크>는 너무 재기발랄해서 볼 때마다 껄껄거리고 웃게 된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성큼 질러가는, 젊은 감독다운 패기가 큰 장점이다. 신동일 감독님의 <진실을 위하여>는, 영화가 사람과 똑 닮았다. 진지하고 진득한 정공법, 한눈팔지 않고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조심스럽게 질문하자면, 2008년 촬영을 마친 <연인>이 아직 개봉을 못하고 있다. 투자사의 입장이 어찌 됐든 몇 개월 동안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는 큰 상처일 것 같다.
=첫째로는 감독 책임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영화에 상업적인 뉘앙스가 있었으면 개봉을 안 했을까. 그런 자괴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기죽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연인>은 어른들 이야기다. 백윤식 선배와 김미숙 선배가 주연이고, 처음부터 젊은 층을 겨냥한 자극적인 영화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투자사 SK텔레콤과 제작사 사이에 이견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투자사에서는 개봉시켰을 때 흥행이 안되면 손해니까, 갖고 있으면 자산이라는 쪽으로 기울어졌던 것 같다. 영화제에서라도 틀고 싶지만 저작권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지금까지 A 프린트만 나온 상태고, 색보정 등의 후반작업 비용들도 남아 있다. 게다가 나를 비롯한 스탭들에게 치러야 할 잔금문제가 있으니 아무도 쉽게 움직이질 않는다. 백윤식 선배와 김미숙 선배, 스탭 모두에게 너무 죄송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작사 및 감독들이 취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법은 없을까.
=아니다. 제도가 없어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게 아니다. 제도가 있지만 지키질 않아서 그런 거다. 결국은 사람문제다. 내가 생산한 상품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투자사가 있고, 무책임하게 발 빼는 제작사가 있고. 상업영화의 미덕을 못 가진 감독의 문제가 있다. 고 최고은씨 사건을 봐도 그렇다. 계약 조건에 맞게 제때 돈을 주었어야만 했다. 그런 비극을 없애고 싶다면 임금을 체불한 경험이 있던 이들에게 아예 기회가 가질 않도록 해야 한다.

-김기영 컬렉션 박스 세트 중 <고려장>에서 이연호 평론가와 함께 음성해설을 맡기도 했다.
=<혈의 누>를 찍은 다음 <고려장>을 봤는데 되게 충격적이었다. <혈의 누> 찍기 전에 봤으면 큰 도움이 됐겠다 싶기도 하고. 이를테면 난 <혈의 누>에서 연쇄살인을 통해 염치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는데, 김기영 감독님도 <고려장>에서 비슷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외에도 장면 전환 등의 영화적 기법에 대한 신선한 고민을 이미 몇 십년 전에 치열하게 하고 계셨다는 게 놀라웠다.

-앞으로의 계획은.
=막바지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에로틱한 궁중 사극 미스터리다.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볼거리로 그치면 안되는 지점들이 분명 있는데, 확실하게 전달하되 장황하지 않게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으면 좋겠다. 투자문제도 대부분 해결됐고 캐스팅을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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