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스캔들>의 성공 이후, 강형철 감독의 차기작은 충무로의 관심사였다. 전작이 설정의 진부함, 신인배우라는 무리수를 두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써니> 역시 비슷한 우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전작이 그걸 보기 좋게 타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강형철 감독의 재기가 그 모든 우려를 불식시킨다.
-엄마의 어린 시절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했다.
=<과속스캔들> 만들 때부터 막연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여러 가지가 합쳐져 있다. 80년대 팝송 같은 것.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의 어떤 것들. ‘엄마도 여자다’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러 가지 것 중 하나다. 잘 모아보면 재밌는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전작의 흥행이 두 번째 작품의 연출에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다.
=부담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또 800만 관객 동원하라는 걸로 해석하는 대신, 그 사실 자체를 그냥 모른 척해버린다. (웃음) 물론 전작이 잘되면서 다들 믿어주셔서 그 덕을 철저히 봤다. 그런데 그것도 첫 만남이 좀 쉬워졌다 뿐이지, 그 다음부터는 또 새로 믿음을 주기 위해 똑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 비중이 생각보다 상당하다.
=과거 분량에서 정서적으로 센 장면들이 많다보니 그렇게 보인 것 같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배우들이 워낙 많다보니 영화 두편 찍는 것 같았다.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게, 어떻게 하나로 잘 이을까에 신경을 많이 썼다.
-과거와 현재의 반복 장면에서 다양한 테크닉을 활용했다. 나미(유호정)가 어린 시절(심은경)로 전환하는 첫 등굣길은 상당히 만화적인 숏이다.
=영화의 첫 감정 전환 비주얼이다. 좀 요란스럽게 해서 ‘준비땅’ 하고 영화가 시작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나미의 등굣길 장면은 CG를 하나도 안 쓰고 다 직접 찍었는데, 카메라가 돌아갈 때 배우들이 초라하게 숨어 있다가 나왔다. (웃음) 최대한 유머러스하게 가고 싶었다. 타이밍이 아닐 것 같은 순간, 장면을 전환해서 엇박자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
-시공간의 이동과 더불어, 주요 등장인물만 현재 7명과 그 과거의 짝이 존재한다. 복잡한데 영화에서는 교통정리가 잘됐다.
=7명이 너무 많지 않나 고민을 좀 했다. 그런데 현재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까지 어우르려니 그 정도는 돼야 플롯이 나오겠더라. 세세하게 가정사로 파고드는 것보다 친구라는 관계에 중점을 뒀다. 인물들이 다양하다 보니 한 캐릭터를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더라도 충분히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었다.
-소녀들의 에피소드로 들어가면 두손 들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 있다. 남자감독이 쓴 각본인데 말이다.
=처음 대본 쓸 때 과연 내가 여자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고민이 되더라. <과속스캔들> 때도 그랬지만, 사람 이야기로 접근하니 해결이 되더라. 난 남자지만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이야기는 많다. 여학생들의 온상인 매점이 관건이었는데, 단순하게 접근했다. 매점 가면 엄청나게 시끄럽더라, 그런 설정 하나로 디테일을 만들어갔다. 사실, 여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생활을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 (웃음)
-<라붐>의 주제가를 들려주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패러디된 장면인데도, 영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른 데도 많이 쓰였나? 난 <라붐>만 생각하고 그 장면을 만들었는데. 과거장면 같은 경우 오히려 뻔뻔하게 나갔다. 소재로만 사용하면 겉돌았겠지만 유기적으로 이야기에 필요하게 연결하니 정서적으로 잘 연결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써니’의 반대파인 ‘소녀시대’와의 욕배틀이나, 나미 머리에 껌붙은 걸 떼어주는 장면 등 굉장히 유치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웃음)
-<과속스캔들>도 세련된 스코어가 마음을 흔들더니, <써니>의 80년대 음악 선곡은 단연 돋보인다.
=턱&패티의 <타임 애프터 타임>이나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 같은 곡은 대본 단계에서 이미 선곡해둔 곡이었다. 김준석 음악감독과 전작부터 같이했는데 서로 의견을 많이 교환했다. 동갑이라 옛날이야기하면 서로 잘 통한다. 원래 내가 어릴 때도 동요 안 듣고 팝송이나 록 같은 것만 들었다. 누나의 영향도 컸고, 삼촌에게 LP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접했던 것 같다.
-캐스팅의 역할이 컸다. 촬영 전, 성인과 아역의 얼굴 하나하나를 맞추는 것부터 숙제라고 했는데. A플러스 받을 만한 과제물이었다.
=캐스팅은 감독의 큰 의무다. 잘못된 캐스팅은 관객에 대한 반칙이라 생각한다. 성인 역에 익숙한 배우를 배제했고, 어린 역할에는 잘나가는 아이돌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다. 이건 영화를 할 때 내가 고수하는 캐스팅의 원칙이기도 한데, 역할은 그 역할의 주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명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력이 우선이고 전부이다. 그래서 오디션을 엄청 많이 봤다. 흔히 충무로에 배우 없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데, 오디션 보면서 좋은 배우들을 굉장히 많이 봤다. 우리 영화의 욕쟁이 진주는 카메라 앞에 한번 서보지도 못한 신인이었다. 다들 여느 슈퍼스타 못지않게 해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린 배우와 성인배우의 매칭이 절묘하다. 외모뿐만 아니라 제스처나 목소리톤도 잘 맞아떨어진다. 연기톤을 조율하기 위해 같은 역할의 배우들과 만남의 자리가 많았나.
=두 배우가 같이 만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내가 그 중간 역할을 한 거다. 두 배우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이간질도 하고, 특성들을 전달하기도 했다. (남)보라 같은 경우 원래 그 배우가 툭 건드리면 많이 웃는다. 그게 참 예쁘다. 그래서 성인 역을 한 이연경씨한테 그런 모습을 주문했다. 마침 이연경씨한테도 비슷한 면모가 있더라. 이렇게 캐릭터별로 맞춰나가는 작업을 많이 했다.
-30~40대 관객이라면, 끝까지 숨겨두었던 민효린의 성인 역이 주는 파장이 크다. ‘수지 효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영화의 엔딩을 빛냈다. 활동을 전혀 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캐스팅했나?(수지의 성인 역 배우는 스포일러라 밝히지 않습니다.)
=수지의 성인 역은 단 한컷, 활짝 웃는 모습이 필요했다. 그 짧은 순간에 영화의 마지막을 표현해줄 얼굴이 필요했다. 영화에 쓸 옛날 사진을 보는데, 그분의 사진이 섞여 있더라. 예쁘다 침 흘리고 있었는데 마침 진희경 선배가 본인이랑 굉장히 친하다며 소개시켜주셨다. 현장에서 내가 너무 그분만 좋아하니 진희경 선배가 구박하시더라.
-여배우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현장은 흔치 않다.
=영화 끝나면 탈진 상태가 되는데 이번엔 현장이 너무 즐거워서 다시 찍으라고 해도 할 것 같다. 심지어 나를 다들 너무 예뻐해주셨다. 선배님들은 귀여워해주고 아이들은 날 따라주고 챙겨주더라. 나도 배우들한테 꼼수 안 쓰고 정직하게 다가갔다. 모니터 뒤가 더 재밌는 현장이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과정에서, 힘주었던 장면이 무척 많다.
=난 ‘콘티감독’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콘티를 정교하게 짜는 편이다. 그게 제일 빛난 장면이 합천세트장에서 찍은 시위장면이었다. 시위대의 충돌, 소녀들의 패싸움, 그 당시의 거리를 모두 한 시퀀스에 담아내려 했다. 해는 지고 갑자기 폭우가 내리는데 그걸 맞으며 찍어서 모두에게 보람있는 장면이었다.
-당시의 암울한 분위기를 소녀들의 패싸움과 함께 엮은 건 다소 위험한 발상이다.
=난 그 장면이 부조리 시퀀스라고 생각한다. 당시 청소년들은 정치, 사회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기들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정치, 사회에 대해 정색하고 다루는 영화였다면 달라졌겠지만, <써니>는 오로지 소녀들의 시점에 맞춘 이야기다. 그래서 그런 부조리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나도 처음엔 해도 되나 하고 여러 차례 스스로에게 물었는데, 철저히 소녀들의 시점을 가져갔다.
-소소하고 귀엽던 일상이 엄청난 사건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는다. 성장통이라고 치부하기에 꽤 강도가 세다.
=그 장면은 80년대 학교괴담에서 이야기를 도출했다. 다들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어딘가에서 한번쯤 들었을 일이다. 그런 충격적인 계기를 통해서 친했던 친구들이 피치 못해 헤어지게 된다. 큰 사건을 계기로 감정적으로 성장하는 것, 아픈 성장기를 표현하고 싶었다.
-나미가 소녀들을 소환하는 동안 결국 중년 여성의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 일탈을 통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인가.
=인생의 아이러니다. 나미가 영화의 내레이터 역을 하며 친구를 찾아가는 동안, 우리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데로 흘러간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남편과 아이가 있어서 친구들을 찾아 나서는 데 멈칫했던 나미가 오히려 깊이 빠져드는 걸 통해 성인들도 어떤 식의 성장을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다시 안 만날 것 같은 친구들을 만나 인연을 이어가는 것. 인생은 이런 아이러니의 연속인 것 같다.
-만남의 과정, 혹은 만남의 지속 과정에서 금전적인 부분이 해결책으로 제시되는데. 친구라는 순수한 관계에는 다소 위배되지 않나.
=시선을 달리하면 좋을 것 같다. 춘화가 보호망을 쳐주는 것은 과연 금전적인 혜택인가? 춘화가 친구들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과거 25년 전, 수지 집 앞에서 다시 만나서 뭉치자고 했던 다짐을 실현한 것이다. 천박하고 세속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 나눠주는 걸로 봐서 춘화는 역시 예전 그대로 친구들에게 ‘멋진’ 춘화인 거다.
-매 시기 성장하는 것이 이 영화의 테마라면, <써니> 역시 스스로에게 성장을 하게 해준 작품일 텐데.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부끄러운 장면도 있지만, 그것도 좋다. 쉬고 싶어도 자꾸 마지막 작업을 더 하게 만든다. 허투루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든다. 난 영화 한편 만드는 것은 인생을 걸고 가야 하는 신성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은 정말 내 능력이 되는 한도에선 최선을 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