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이 사라졌다. 2011년 4월17일, 암투병 중이던 캐나다 출신 영화배우 마이클 사라진이 몬트리올의 한 병원에서 70살로 타계했다. 시드니 폴락의 1969년작 <그들은 말을 쏘았다>(They Shoot Horses, Don’t They?)에서의 열연으로 잘 알려진 마이클 사라진은 1940년 퀘벡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몬트리올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액팅스쿨을 다니며 연기자의 꿈을 키웠고 텔레비전 드라마로 연기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천천히 경력을 쌓아가던 마이클 사라진은 1968년 윌리엄 할 감독의 <샤일로 여행>(Journey to the Siloh)에서 풋내기 남부 동맹군 역을 맡으면서 인기에 급물살을 탄다. 이 영화에서 사라진은 당시 신인이었던 해리슨 포드와 연기했다. 다음해인 1969년 <그들은 말을 쏘았다>로 사라진의 인기는 정점에 오르게 된다. 이 영화는 경제 불황기에 방황하는 젊은 영혼들이 쉬지 않고 춤을 추는 마라톤 댄스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는 오스카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으나 긱 영이 남우조연상을 받는 데 그쳤다. 1994년 <토론토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사라진은 이 영화를 추억했다. “늘 새벽 서너시까지 촬영하곤 했다. 그때까지 영화 속 캐릭터로 깨어 있었던 것이다. 시드니 폴락 감독은 종종 지칠 때까지 영화를 찍자고 했다. 남자배우들은 싸우기 일보 직전까지 갔고, 여배우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이후에도 사라진은 <법과 질서>(The Life and Times of Judge Roy Bean, 1972), <검블 경주>(The Gumball Rally, 1976), <조슈아 나우 앤 덴>(Joshua Then and Now, 1985), <베이징 익스프레스>(Bullet to Beijing, 1995) 등에 출연했다. 마이클 사라진은 구름 너머로 사라진 뒤에도 영원한 퀘벡의 국민배우로 남을 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에 경의를
마이클 사라진의 주변인물들이 전하는 추모사
아주 착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어려서부터 좋은 배우였다. 생애 첫 연극 <The Bishop’s Candlestick>이 끝나자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관람하던 친구들이 그를 보고 웃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와 함께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아주 평범한 가족이었는데 갑자기 무비스타와 함께 살게 됐다.
-대니얼 제리(<라 플로리다>(La Florida) 대사·음악 코치)
마이클은 삶에 대한 열정이 넘쳤다. 세트장에서도 우리는 늘 즐겁게 일했고, 덕분에 영화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이 영화는 마이클의 형인 피터도 함께했는데 피터는 동생을 무척 아꼈다. 둘이서 불어로 대화하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조지 미할카(<라 플로리다> 감독)
마이클과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매우 영광이었다. 동시에 그는 나의 20년지기 좋은 친구다. 그의 영면에 모든 캐나다 영화인들이 슬퍼하고 있다. 마이클은 뛰어난 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위트가 넘치고 겸손하며 예의바른 친구였다.
-마이클 오스카(마이클 사라진의 오랜 매니저)
마이클은 감성적이고, 비할 데 없이 뛰어난 배우였다. 또 그는 뛰어난 언변가였고 가장 소중한 고객이자 친구였다. 그를 잃은 슬픔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클로드 샹블랑(몬트리올의 프랑스어 영화축제 누보시네마페스티벌 프로그래머)
불과 며칠 전에도 친구에게 마이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할리우드 유명배우인 마이클을 내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니 아직도 신기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를 생로랑 길(몬트리올의 번화한 거리)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일부러 아는 척하진 않았다. 나는 마이클을 <그들은 말을 쏘았다>를 통해 기억하고 싶다. 1992년 누보시네마에서 100주년 기념으로 개최했던 ‘250시간 영화 마라톤’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 영화를 틀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