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박중훈과 이선균의 행보는 사뭇 달랐다. <체포왕>은 이 두 남자의 전격적인 만남을 주선한다. 오로지 실적만 위해 달리는 두 형사의 조우는 18년 전 <투캅스>의 안성기, 박중훈 두 형사를 떠올리게 한다. 코믹 본능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 박중훈, 다소 생소한 코믹 연기에 도전한 이선균. 만남에서 촬영까지. <체포왕>을 둘러싼 선후배, 두 배우의 솔직하기 그지없는 담소를 들어본다.
이선균_사실 형사 버디무비로 <투캅스>의 명성을 뛰어넘은 게 없지 않나. 그러니 좀 진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현동 추격신의 템포가 구현된다면 재밌겠더라. <투캅스>와는 달라진 시대상을 담는데, 그 중심에 박중훈이라는 배우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게다가 내가 원래 코믹을 좋아한다. 여유있는 코믹을 해보고 싶었다. 액션 역시, 정통 액션은 아니지만 내가 안 해본 부분이라 흥미로웠다.
박중훈_난 시사회 끝나고 좀 놀랐다. 다들 <투캅스>를 연상하더라. <투캅스>가 같은 팀 선후배간의 알력이라면 이 영화는 다른 팀끼리의 경쟁이다. 난 전혀 두 영화의 연관성을 의식 못했다. <투캅스>의 영예를 담보로 걸고 굳이 왜 도전하냐고들 하는데, 현재를 망쳤다고 과거를 망치는 건 아니다. 지금 올림픽 나가서 메달 못 땄다고 지난번 메달 없어지는 거 아니지 않나. 게다가 내가 형사 역할만 6번이다. 장동건이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할 때도 형사 또 하냐고 하더라. 근데 26년 연기하면서 역할만 40개 넘게 하다 보니 겹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선균_사람 만나는 거나 작품이나 비슷하다. 인연이 있어야 한다. 누구랑 하고 싶다고 그게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체포왕>을 할지는 나도 몰랐다. 마침 다른 영화를 준비 중이었고, <체포왕> 시나리오가 왔는데 안 봤다. 내가 원래하기로 한 거 말고는 딴 거 안 보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그 영화가 투자문제 등이 걸리면서 다시 <체포왕> 제안이 들어왔다. 그 한달 전쯤인가 <옥희의 영화>를 보고 일면식도 없는데 중훈 선배가 연락을 해왔다. 난 선후배도 없이 섬처럼 지내는데 친구 많은 분이 연락주니 고맙더라. 선배가 이런 거구나. 나도 후배 영화 보고 연락해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연락이 왔으니 이것도 인연이다 싶더라.
박중훈_선균이는 전학생인 거다. 그 전 학교에선 학교짱인데 전학생.
이선균_학교짱은 무슨. 내가 고1인데 고3 짱 형이, 혼자 농구하고 있는 나를 보고, ‘어 저놈 농구 잘하네’ 한 거지. (웃음)
박중훈_배우의 일이 원래 확인받는 일이고 어린애 같은 거다. 어린애 같고 확인받기 좋아하는 사람이 배우를 하는 게 아니다. 무뚝뚝하고 말씨 없는 배우도 작품하면 평가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가 된다. 카메라 감독이 어떻게 찍느냐가 중요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비추어지느냐가 중요한 사람들이다. 확인해줄 사람이 필요한 거지. <옥희의 영화>는 대중적으로 확인해줄 사람이 많지 않다. 이선균이라는 배우가 TV에서 인기를 얻은 스타인데도 개런티도 안 받고 도전했을 때. 그 도전을 선배인 내가 확인해주고 싶었다. 그런 격려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주리라 생각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때 일면식도 없는 임순례 감독에게도 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선균_전화기에 선배 이름이 뜨는 순간, 내가 이걸 받아야 되나 싶었다. 만난 건 고작 영화제에서 술 마시고 스쳐 지나간 정도였는데.
박중훈_이번 작품은 버디무비라 워낙 상대역이 중요하지 않냐고 하는데 특별히 그런 거 같진 않다. 동성끼리 부딪히는 것만 아니라 남녀관계에서의 일도 다 버디무비다. <내 깡패 같은 애인>도 난 버디무비라고 본다. 다만 이번엔 내가 먼저 캐스팅돼서 제작사에서 내 의견을 많이 물어봤다. 그 리스트 중에 불편한 배우도 있었고, 이선균은 좋다고 한 거다.
치고 빠지기의 밸런스
박중훈_같이 일해보니 가끔 선균이가 에너지 과잉일 때가 있더라. 전쟁에서 이기려면 한두개 전투쯤은 작전상 후퇴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선균이는 전체 전투에 모두 힘을 싣더라. 그렇다고 함부로 얘기는 못하겠더라. 어렵게 고민해서 하는 연기를 내가 과잉이라 평가하면 현장에서도 즐겁지 않을 거 같고. 그래서 임(찬익) 감독한테 따로 이야기했다. 좀 대신 얘기해주면 좋겠다고. 다행히 영화 초반의 일이라 그게 오히려 영화에 긴장감으로 전해지더라.
이선균_난 이번 연기가 꼴찌랑 일등간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반에서 제일 공부 못하는 애가 일등 따라잡으려고 발악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박중훈_그렇게 말하기에는 네가 꼴찌가 아니다. 일등하고 7등 정도가 달리는 게임이었지. (웃음) 그런 면에서 너무 겸손하고 스스로를 폄하했다 싶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연기방법도 제각각이다. 이선균은 이선균, 박중훈은 박중훈이다. 어느 순간 지나고 나선 다른 배우를 평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경험상 선배들이 나를 평가하면 좀 힘들더라. 예전에 <칠수와 만수> 때 내가 매일 매신을 미리 다 설정해서 갔는데도 (안)성기 형이 그걸 뭐라 안 하고 받아주더라. 내가 나이가 드니 그런 마음이 되더라.
이선균_그 이야기 안다. 형이 하도 설정을 많이 해가니 안성기 선배님이, ‘나도 좀 먹자’ 하셨다고. (웃음) 형님 말이 뭔지 알겠다. 야구로 치자면 무조건 직구로 빠르게 쳐서 승부를 보려고 했던 거 같다. 스스로 컨셉을 그렇게 잡아서 좀 과장되기도 했다. 반면에 중훈이 형은 어떤 타자가 나서도 맞춰서 잡을 수 있는 투수 같더라. 다양한 구종이 있어서 굳이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투수 말이다.
박중훈_내 연기플랜을 부러 죽인 측면도 없잖아 있다. 왜냐하면 같이 부딪히면 이상해지겠더라. 합동수사본부에서 형사들끼리 싸우는 장면 생각나나. 그때 넌 막 달려들 때 난 빠져 있었다. 우리가 둘 다 강하게 나가면 관객이 불편해질 거 같더라.
이선균_비유 또 하나. 탁구로 치면 나는 직구, 형님은 드라이브로 받는 느낌이다.
박중훈_관객과 배우 사이에 절대거리유지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배우가 튀어나오면 관객은 도망가고, 반대로 배우가 도망가면 관객이 들어가서 그 거리를 유지하는 거다. 튀어나오는 배우가 최민식, 황정민이라면 도망가고 숨는 배우는 안성기, 한석규 같은 배우다. 나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튀어나오는 연기의 절정판이었다. 그래서 관객이 박중훈의 연기에 피로를 느끼는 것 같더라. 나이가 드니 로버트 드 니로나 알 파치노처럼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배우가 돼야겠다 싶었다. <라디오 스타> 이후의 선택들은 그래서 안으로 삭이는 추세로 갔다. 관객도 요즘 나를 볼 때 좀 편해진 것 같다.
이선균_완급조절. 그게 참 힘들다. 난 그래서 작품 선택 할 때 신중해진다. 드라마 연기가 주로 보여지는 연기다. 그래서 저예산영화에 출연해서 좀더 리얼한 연기를 하려고 한다. 작품 선택의 기준이 그래서 생기는 것 같다. 갑자기 액션 장르로 간다는 등의 극단적으로 변신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이번에 <체포왕>을 하면서도 내심 그런 기준이 있었다. 다음 작품이 변영주 감독의 <화차>인데 사회파 스릴러라 굉장히 어둡고 깊은 느낌이다. 그래서 좀 즐겁고 코믹한 <체포왕>을 하는 거다. 미리 매 작품의 밸런스를 맞춰서 선택하는 거다.
신인감독 VS 베테랑 배우
이선균_이번 작품하면서 제일 힘든 게 창틀 끼우기였다(극중 이선균이 연기하는 정 팀장은 좁은 창틀을 통과하는 사람을 범인으로 규정하고 수사를 진행한다). 나름 정 팀장은 경찰대까지 나온 형사인데 그런 무작위 수사가 말이 되나. 그런데 감독님이 그걸 포기 안 하신 건 좀 의외였다. 영화에는 재밌게 나와서 그건 참 다행이고 기분 좋았지만.
박중훈_난 불멸의 진리로 다시 한번 느낀 게 시나리오였다. 모든 건 시나리오다. 시나리오 보면서 이건 좀 아닌데 싶은 부분들은 영화에서도 결국 문제로 다가온다. 물론 촬영하면서 좀 열어두면 개선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가끔 그 소통이 안될 때가 있었다. 너도 에너지가 센 배우고 나는 (임 감독한텐) 선배니까 임 감독이 제대로 작정하고 준비하고 온 거다. (웃음) 내가 모니터 앞에 자주 안 간 것도 그런 이유다.
이선균_형과 찬익이 형의 소통의 부재는 서로 불편할까봐 너무 배려해서 생긴 것 같다. 찬익이 형과 나랑은 한예종에서 공부할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라 난 좀 편하게 붙들고 이야기하는 편이었는데, 형은 선배라 조심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또 하나는, 이건 우리 작품뿐만 아니라 대부분 영화들이 그런데 신인감독들이 지나고 나면 괜찮은데 좀 고집이 세다. 다른 사람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자는 각오를 애초에 단단히 하고 온다. 요즘 분위기는 투자사가 거의 제작까지 하는 환경이다 보니 감독들이 힘든 점들이 많다. 매 순간 평가받는 입장이니 뭐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감독님들에게 좀 여유를 허용해준다면, 소통이 좀더 원할해질 것 같다.
박중훈_임 감독은 그전부터 현장편집 등을 통해 현장경험이 많은 감독이니 배우들과의 소통을 잘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거다. 그런데 난 감독이랑 게임하자는 게 아니다. 조금씩 양보하면 더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거다. 배우 입장을 대변해서 이 자리를 빌려 신인감독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배우가 만약 감독 위에 군림하려 들거나 지나친 의견을 내세운다면 그때부터 감독의 권위를 내세우는 건 좋다. 그런데 처음부터 대결양상으로 간다면 그건 큰 손해이다.
이선균_난 신인감독들과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 비슷한 경험들이 가끔 있었다.
박중훈_그러고 보니 넌 신인감독이랑 많이 했구나. 나도 신인감독과 작업엔 열려 있는 편이다. 신인감독이라고 해도 일단 시나리오를 보고 만나서 대화를 하다보면 영화를 어떻게 대하는지 감이 온다. 자기 시나리오를 정확히 장악하고 있으면 말의 기술과 상관없는 매력이 보인다. 대부분 시나리오가 괜찮으면 감독도 좋더라.
이선균_형님 말처럼 어떤 식으로 자기 영화를 찍고자 하는지 명확하면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대박기원? 대박예감!
박중훈_그나저나 우리 영화, 난 쉽고 재밌고 따뜻한 영화라 좋았다. 그게 유치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매력이다. 별 네개짜린 아니겠지만.(웃음)
이선균_우리 영화는 확실히 열심히 뛰는 미덕이 있는 영화다. 범인을 직접 발로 뛰어서 잡을 때 그걸 보는 쾌감이 상당하다.
박중훈_임 감독이 기자회견 때, <본 얼티메이텀>의 모로코 추격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선균_얼마 전에 <폭풍 속으로>를 다시 봤는데 굉장히 비슷한 추격신이 나오더라. 키아누 리브스가 패트릭 스웨이지 쫓아가는데 아현동 추격신보다 더 길었다. 우리도 그 추격신은 더 늘려도 되겠더라.
박중훈_말도 마라. 난 찍다찍다 이렇게 힘든 영화는 처음이었다. 추워서 말이다. 지난해 겨울이 ‘3한(寒)3냉(冷)’이었는데, 우리 촬영하는 날이 죄다 3냉(冷)일 때였다. 스케줄을 맞춰도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나 싶을 정도였다.
이선균_너무 추워서 십초만 있으면 그새 호흡이 잘 안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촬영하는 날 보면서, ‘아 내가 이 바닥에 적응했구나’ 싶더라. 하도 추우니 형님은 울더라. 정말로.
박중훈_크리스마스이브 진짜 추웠지 않나. 지붕 위에 서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라. 너무 추운데 폼 안나게 떨 수도 없고. 아현동 골목이 너무 좁아 차를 주차 못 시키니 잠깐 짬이 나도 계속 밖에 있어야 했다. 계속 뛰어다니니 다리에 근육통도 오고. 나중엔 연기가 아니라 체력이더라.
이선균_영화 보고 나서 사람들이 ‘정말 많이 뛰셨겠어요’ 하고 말해주니 기분은 좋더라.
박중훈_확실히 우리가 뛴 것보단 훨씬 더 뛴 것처럼 보이긴 한다. (웃음) 하여간 우리 영화 팝콘무비라 흥행 잘되어야 하는데.
이선균_시사회 끝나고 나갈 때 모두들 기분 좋게 웃고 나가는 걸 보니 이젠 안심이다.
박중훈_근데 왜 ‘대박예감’이 아니라 다들 ‘대박기원’한다고 하나. 슬슬 불안하긴 한데.
이선균_잘되면 속편 어떨까. <체포왕>말고 <체류왕>. 누가 더 불법체류 오래하나.
박중훈_다시 찍는다면 시나리오 더 완벽해지고 나서 해야지.
이선균_우리 오늘 인터뷰 다 나가도 되나.
박중훈_그럼. 이렇게 솔직한 인터뷰 어디서 봤나. 난 임 감독도 봤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런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또 같이 영화 찍어야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