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비록 나 자신이 괴물이 되어간다 할지라도
2011-05-12
글 : 이동진 (영화평론가)
두려움의 심연을 응시하기를 멈추지 않는 라스 폰 트리에와 <안티크라이스트>를 지지함

1.
“악마를 연구하는 것은 삶, 성(性), 죽음의 혼합 상태를 연구하는 것이다.”(장-디디에 뱅상)

2.
극중 등장하는 숲 이름이 에덴인 데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 물론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의 내용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 동산 이야기를 비틀어서 만들어졌다. 폰 트리에는 이 영화를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남성성과 여성성 사이에서 발생한 상징적 이야기로 읽히도록 두 주인공에게 이름도 부여하지 않았다.

성경의 에덴은 낙원이지만, 이 영화 속 에덴은 지옥이다(하지만 두 에덴 모두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악이 선존하고 있었다. 성경에선 뱀이, 영화에선 자연 자체가 악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유혹자는 여성이었지만 여기선 남성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여자는 에덴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몇 개월 전에 그 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지속적으로 여자가 그곳에 가야 한다고 주장(유혹)한다. 심리치료사로서 그는 두려움의 근원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에덴에 가게 되는 남자는 그곳이 초행이다. 그렇기에 펼쳐질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똑똑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던 이 이성적인 남자는 에덴에서 철저히 무력해진다.

성경의 에덴에서 두 사람은 타락할지언정 늘 함께했다. 하지만 여기서 남자와 여자는 곧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남자는 오로지 선의로만 여자를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온통 초록색이야”라면서 편재하는 악으로서의 자연을 두려워하는 여자에게 “저항하지 말고 그냥 초록과 동화되는 거야”라는 말로 전문가답게 요구(유혹)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에덴에 대한 지식은 질서정연한 세계를 확신하는 남자가 아니라 혼돈 속에서 흔들리는 여자가 소유하고 있었다(성경의 선악과는 지식을 가져다주는 열매였다). 남자는 뱀처럼 오만했지만, 뱀과 달리 무지했다. 여기서 남자의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오만으로 둘러싸인) 무지였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에덴의 자연은 온통 소멸의 공간이다. 성경의 에덴 중앙엔 생명의 나무가 있지만 여기선 서서히 썩어들어가는 죽은 나무가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선 탄생 역시 죽음과 직결된다. 사슴은 사산하고, 도토리는 썩어가며, 어린 새는 개미와 매의 먹이가 된다. 이때 죽음은 추락의 수직 이미지로 시각화된다. 사슴의 죽은 새끼는 바닥에 툭 떨어지고, 도토리는 폭우처럼 낙하해 지붕을 때리며, 어린 새는 둥지에서 후두둑 미끄러져내린다. 속절없이 떨어져 사멸해가는 어리고 여린 것들.

남자와 여자의 어린 아들 역시 추락했다. (이 영화의 첫 숏에서) 샤워기로부터 방금 벗어나온 물방울이 천천히 추락하고, 하늘에서 금방 쏟아져 내린 눈송이가 천천히 추락하는 그곳에서, 아이 역시 열린 창문 너머로 천천히 추락한다. 그러니 아들을 잃은 여자가 에덴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추락하는 것에는 섹스도 있다. 에로스는 타나토스를 동경한다.

3.
남자와 섹스하는 도중에 여자는 과연 아들이 떨어져 죽는 것을 보았을까. 이 영화의 프롤로그에선 바닥으로 꺼져가는 아찔한 엑스터시로서의 추락에 현기증을 느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아 그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된다(성적인 절정 속에서 클로즈업된 여자의 얼굴은 그 직전 클로즈업된 아이가 그랬듯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는 것으로 시각화된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광기에 가득 차 자신의 음핵을 스스로 잘라내기 직전의 플래시백에선 그녀가 섹스 도중 눈을 뜬 채 그 모습을 보고도 제지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언뜻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후반부의 목격은 죄책감이 빚어낸 기억 속 왜곡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명확한 것은 여기서 쾌락이 죽음과 근친관계에 있다는 것이다(섹스의 결과인 출산을 거의 언제나 죽음과 연결시키고 있는 이 영화의 상징 제조법을 생각해보라). <안티크라이스트>의 프롤로그는 가장 극적인 순간에 두 종류의 추락을 교차편집으로 한데 묶어 동류로 치환한다(그때 추락하는 여자뿐만 아니라 추락하는 아이 역시 즐거워한다). 아이의 죽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아이가 탄생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난 것은 이전에 부부가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들을 잃은 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섹스를 요구하는 것은 늘 여자다. “섹스는 일시적인 해소책일 뿐”이라고 했던 남자는 틀렸다. 여기서 섹스는 인간의 본능이면서 자연과 일체가 되려는 시도인 동시에 소멸에 다가가려는 일종의 자해이기 때문이다. 성적 쾌락을 과용함으로써 부정하는 여자의 태도는 기독교가 규정한 출산의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성경에서 출산은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도록 하는 축복이 아니라 에덴에서 신의 뜻을 거역했던 것에 대한 벌이었다.

이 영화에서 섹스를 촉발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두려움이나 고통이고(악몽을 꾸고 난 뒤나 자해를 하고 난 다음에 여자는 섹스를 요구한다), 섹스를 마무리하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자연의 풍광이다. 이때 고통이나 두려움(두려움이란 고통에 대한 예감이다)은 섹스를 격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종종 섹스의 일부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 섹스를 대체한다. 남자의 벌거벗은 몸을 장난스러운 전희처럼 간질이다 실수로 상처를 내던 여자는 나중엔 죽음의 손으로 가득한 나무 아래서 섹스 도중 때려달라고 요구한다. 남자가 있어야 하는 섹스에서 남자가 필요없는 자위로 옮아가던 여자는 결국 상대의 성기를 짓이기고 자신의 음핵을 잘라낸다. 오로지 쾌락만을 위한 기관인 음핵을 제거함으로써 여자는 죽음의 근원인 쾌락을 거세한다.

이 끔찍한 가학과 자학의 점층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실존의 증거로서의 고통이다.

4.
“당신이 겪는 비탄에는 특별한 게 없다”고 했던 남자는 여자의 고통을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았다(칼로 찔러도 상해를 입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던 중세시대 마녀는 통증을 느끼지 않는 존재로 치부됐다). 그리고 아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남자는 치유한다는 명목하에 여자의 두려움을 도식화함으로써 그녀의 정체성을 자신의 잣대로 정립한다.

그러자 여자는 ‘마녀’가 된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고통을 소유하기 위해서, 여자는 마녀가 된다.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여성들 중에서도 가장 약한 여자들이었던 중세의 마녀와 달리, 그녀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구사하는 강한 마녀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들이 왜곡된 상상으로 규정하며 두려워하는 척했던 마녀의 실제 모습이었다. 남자들에 의해 ‘악’으로 규정되었지만 그것을 고통 속에서 부정하며 객체화되어 죽어갔던 오래전 약한 여자들과 달리, <안티크라이스트>의 그녀는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악’으로 비칭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남자의 요구에 따라 마침내 “초록과 동화”된 마녀는 지독한 공격을 가해 끔찍한 통증을 안김으로써 고통에 무지한 남자에게 고통이란 일반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생생한 꿈을 꾸고 난 뒤 그게 꿈이었는지 알아보려고 흔히들 볼을 꼬집어보는 것은 고통이 가장 확실한 현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울지 않는다”고 호언했던 남자는 전혀 몰랐다. 아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오두막에서 뛰쳐나갔던 여자가 발견한 것은 우는 아들이 아니라 통째로 통곡하는 자연이었다. 자연은 저마다의 특별한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느낀다”고 헤겔은 말했다. 아들을 잃은 여자에겐 고통만이 유일한 정체성이며 실존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여자가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계기가 두 가지로 암시된다는 점이다. 하나는 남편이 아내의 두려움을 분석하면서 삼각형 맨 위칸에 ‘그녀 자신’(Me)이라고 적어넣음으로써 여성의 타자로 완성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난 여름 에덴에서 자신이 아들에게 의도적으로 신발을 거꾸로 신겼다는 사실을 여자가 뒤늦게 자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크라이스트’에 가장 가까운 상징이 있다면 그건 아마 어린 아들 닉일 것이다(그리스도는 스스로를 ‘인간의 아들’로 칭했고, 니콜라스를 줄인 이름인 닉의 그리스어 어원은 ‘인간의 승리’를 뜻한다. 닉이 창고에서 장작을 반으로 가른 나무토막을 가지고 노는 장면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목수였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여자가 나중에 남자의 성기를 짓이길 때 사용한 도구 역시 장작을 반으로 가른 나무토막이었다). 신발을 거꾸로 신기는 것은 일종의 학대이고 변형된 폭력이다. 어린 아들은 성숙하기 전의 남성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역시 남성이다.

결국 여자는 아이의 비극적 죽음으로 미쳐간 게 아니다. 그 겨울 집에서 아들이 추락사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난 여름 숲에서 발생했던 일이다. 여자의 광기는 아들이 죽기 전인 그 여름 숲에서 자각의 형태로 확인한 그녀의 본성이었다. 말하자면 여자는 아들을 죽이고 싶었다(그런데 숲에선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신의 아들을 학대했던 것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근원적 죄책감에서 그녀는 그때까진 자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섹스 도중 아이가 떨어질 위험에 처한 것을 목격하고도 제지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죽음을 이끌었다(그러니까 나는 후반부 플래시백에서 아이가 추락하는 모습을 여자가 섹스 도중 목격하는 장면은 죄책감이 빚어낸 기억 속 왜곡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자가 숲에 가길 두려워했던 진짜 이유는 그곳에서 자신의 혼돈스럽고 광기 가득한 본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세시대 무지와 왜곡으로 뒤틀린 남자들에 의해 마녀로 규정되어버린 여자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모함되었던 그 가공할 힘이었다. <안티크라이스트>의 후반부에서 여자는 광기에서 잠시 놓여나 눈물을 흘리다가도 곧 “우는 여자는 기만적인 여자”라는 말을 내뱉으며 “다 소용없다”는 말과 함께 다시 복수의 화신이 된다. 피해자-여성의 방패였던 눈물 대신 가해자-남성의 창이었던 폭력으로 회귀한 그녀는 오래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가했던 행위를 고스란히 되갚아준다(예를 들어 성경의 에덴에서 쫓겨날 때 남자에게 부과된 형벌인 노동을 상징하는 맷돌과 거기에 달린 파이프로 남자의 몸을 꿰뚫는 것은 상징적인 강간이다).

이 영화의 상징이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은 폰 트리에가 상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신화와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태도 때문이고, 그가 옹립하려는 상징체계가 서구 문명을 지배해온 주류 상징체계에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라스 폰 트리에가 몰두했던 니체의 책 <안티크리스트>는 “모든 가치의 전도!”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5.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아내가 남편을 공격할 때, 여성성은 남성성을 공격하고, 자연은 문명을 공격하며, 육체는 정신을 공격한다. 그때 실존은 역사를 공격하고, 소멸은 구원을 공격하며, 죽음은 삶을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순간에 카오스는 온 힘을 다해 코스모스를 공격한다. 이 영화에서 여자가 악하다면, 그것은 그녀가 질서 대신 혼돈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큰 폭력은 광기로 날뛰는 아내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대응하려는 남편이 저지른다. 남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마녀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카오스의 상징인 그 육체를 불태워 제거함으로써 코스모스를 회복하려고 한다. 이번 마녀는 스스로가 마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극악하게 날뛰었다는 점에서 다루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어쨌든 남성은 이제 또 한번의 성공적인 마녀사냥을 끝냄으로써 질서있는 세계로 안전하게 귀환할 것처럼 보인다.

에덴에서 탈출한(혹은 에덴에서 다시 추방당한) 남자는 허겁지겁 산딸기를 따먹다가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는 수많은 얼굴없는 여자들(잠재적인 마녀들)과 마주친다(이 장면은 이 영화를 뒤덮고 있는 추락의 이미지와 날카롭게 대조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곁을 무심히 스쳐 올라가는 여자들을 보면서 망연자실한다. 에덴에 들어설 때 거기서 무슨 일이 펼쳐질지 짐작하지 못했고, 에덴에서 머무르는 동안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던 남자는 에덴을 벗어날 때까지도 철저히 무지했다. 그곳에서 벗어난 남자의 존재와 상관없이 에덴은 그 자체로 오롯하다.

이 영화의 산딸기는 지식을 가져다주는 성경의 선악과와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남자가 짐작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산딸기를 입에 넣고 난 뒤 산을 오르는 여자들과 마주쳤을 때, 그러니까 에덴에서 벗어난 마지막 지점에서야 비로소 찾아온다.

지식이 없으면 진정한 고통도 없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관계를 맺는 행위가 이뤄진 순간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뒤늦게 인식하면서부터 고통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남자의 진짜 고통은 에필로그에서 산딸기를 따먹은 뒤 여자들이 숲을 오르는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시작된다. 이제 남자는 숲에서 자신이 당했던 일이 아니라 행했던 일을 떠올리며 진정한 고통에 몸부림칠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그건 영화의 구두점 바깥에서 발생할 것이다.

6.
철학자 비엔느는 “나는 두려워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Timeo ergo sum)고 했다. 라스 폰 트리에 역시 그렇게 존재하는 예술가다. 많은 이들의 지적과 달리, 나는 <안티크라이스트>에서 폰 트리에의 허세와 사기술을 발견하지 못했다.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에서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을 나는 거짓이라고 부른다. 가장 습관적인 거짓말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이다”라고 했고, 폰 트리에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한명의 감독으로서나 한명의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두려움의 근원을 향해 끝까지 파들어갔다. 다시 니체식으로 말한다면, 다만 그 두려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폰 트리에는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알아채고도 끝까지 응시를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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