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를 본 이유는 단 하나, 주인공 제인 에어가 아닌 버사 메이슨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누구인가?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와의 결혼식 당일에서야 알게 되는 로체스터의 숨겨진 아내, 밤마다 저택을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기괴한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로 존재를 증명하던 광기에 사로잡힌 여인, 서사를 끌고 가는 설명되지 않는 어둠의 힘이자 끝내 설명되지 않고 사라지는 비극적인 운명의 담지자, 서사 안팎으로 거부당하는 존재. 제인이 로체스터의 저택에 가정교사로 오면서부터 줄곧 이야기의 기운과 흐름을 좌우하는 여자지만 그녀의 구체적인 실체는 비밀에 부쳐져 있다. 샬롯 브론테의 원작이나 이후 몇 차례 리메이크된 영화들에서 우리가 이 여인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짙은 머리색과 창백한 얼굴을 한 이 미친 여자가 15년 전, 로체스터와 결혼한 자메이카의 스페인 타운 출신이라는 점뿐이다. 이 결혼이 로체스터 자신의 결정이 아니었다는 점, 즉 그의 아버지가 몰락하는 가문을 살리기 위해 저 멀리 자메이카의 부유한 메이슨가와 맺은 정략결혼이라는 점이 로체스터의 입을 통해 잠시 항변된다. 어쨌든 버사 메이슨은 샬롯 브론테의 원작 소설에서나 이후 영화들에서 로체스터나 제인의 시선 안에서만 설명되는 존재다. 그녀가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을 이 이야기는 그러나, 단 한번도 그녀에게 스스로를 언어화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다.
여전히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봉건주의적 시대 분위기 속에서 삶을 개척하고, 사랑을 선택한 독립적인 여성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실은 여성주의 문학비평사에서 백인 여성 제인 에어만큼 혹은 그보다 더 논의의 대상이 되어온 인물은 버사 메이슨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가 지닌 함의, 이를테면 버사 메이슨이 제인 에어의 억압된 또 다른 자아라거나 당대 철저한 남성 중심적 문단에서 여성 작가로서 샬롯 브론테가 싸울 수밖에 없었던 불안이 투영된 대상이라는 분석은 지금은 좀 따분하기는 해도 어쨌든 버사 메이슨을 담론의 장으로 끌어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들은 이 여인이 자아내는 광기의 물질성을 제인 에어의 내면을 설명하기 위해 관념화, 수단화하는 오류 또한 범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제인-로체스터-버사의 삼각 구도에서 버사에게도, 로체스터나 제인만큼의 독립된 개체성을 준다면 즉 그녀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이 광기에 얽힌 사연뿐만 아니라 다른 두 인물을 다시 바라본다면 어떻게 될까?
<제인 에어> 재해석의 핵심 버사 메이슨
사실 그 비슷한 시도를 성공적으로 해낸 소설이 이미 1960년대에 출간되었다. 도미니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영국인 작가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의 전사를 상상하며 쓴 작품이다. 여기서 결혼 전 버사의 이름은 앙투아네트이며, 그녀는 영국 식민지에서 태어난 크레올인이다.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어린 시절, 그리고 로체스터가 결혼을 위해 자메이카로 온 뒤 벌어지는 일들에 할애되며 그녀가 광기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맥락, 관계의 정황들이 자세히 언급된다. 그런 이야기들 끝에서야 영국으로 이주한 다음의 사건이 짧게 등장하는데, 앙투아네트는 제인 에어를 그다지 중요하게 인식하지 않을뿐더러 그녀를 그저 “두 번째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칭한다. 그래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제인 에어>에 대한 여성주의적일 뿐만 아니라 탈식민주의적 다시 쓰기로 평가받아왔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영화화된 적이 있다. 90년대 초, <카리브해의 정사>라는 요상한 제목을 달고 나온 영화는, 앙투아네트를 연기한 여자의 나신과 섹스신만 기억에 남는 걸 보니 별다른 자의식없이, 그저 유색인 여성의 관능성과 이국의 풍광을 영화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더 가까운 작품이었던 것 같다.
서두가 좀 길었지만, 고전을 영화화할 때, 재해석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면 <제인 에어>에서 그 변주의 가능성은 다른 무엇보다 버사 메이슨이라는 인물에게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진 리스처럼 제인 에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예 독립된 세계로, 분리된 작품으로 완성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제인 에어> 안에서 버사의 영역이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지가 더 궁금하다. 버사의 전사가 아니라, 지금 손필드의 저택에서 제인과 함께, 그러나 고립된 채 살고 있는 버사의 이야기, 즉 제인의 세계에서 작용하는 버사의 시선 말이다. 그건 원작 속 인물의 성격, 선택, 행동 등과 같은 전제, 즉 서사의 기본적인 틀에 가하는 변화라기보다는 소설 안에 분명 존재하나 몇 문장으로 규정되어 불공평하게 다뤄지던 인물, 혹은 기운을 영상이 어떻게 되살려놓을지, 그 이미지가 서사의 정형화된 틀에 다시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문제다. 우리는 문학의 충실한 영화적 재현이란 문자 그대로의 이미지화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 과정에서 문자를 넘어서, 심지어 감독의 의도를 넘어서 서사가 통제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순간이 불현듯 나타날 때를 발견하는 것이다. 때로는 서사의 전복을 노골적으로 꾀할 때보다도 그런 순간이 등장할 때가 더 급진적이다. 영화는 원작의 뼈대를 비틀지 않고도, 심지어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그걸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가 아닐까? 요컨대 ‘그녀는 광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라는 문장으로 인물이 묘사될 때와 인물의 그런 표정이 화면으로 클로즈업될 때의 차이. 전자에는 ‘나’로 환원되는 시선뿐이지만 그 대상이 영화 안에서 상대 숏으로 등장하는 순간, 여기에는 두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문학은 대개의 경우 챕터를 나누어 번갈아 제시하지 않으면 한 맥락 안에서 거의 동일한 무게로 교환되는 시점들의 운동을 보여주기 어려운 장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무리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의해 대상화되는 걸 피할 수 없다고 해도, 우리는 적어도 제인의 시선에 걸러지지 않은 버사의 시선, 혹은 그 시선의 잉여를 목격할 기회를 가진다.
그렇다면 다시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로 돌아가 보자. 우선 이 작품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단적으로 시각화하고 플래시백 구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원작 소설에 배어 있는 양가적 속성을 전면화한다. 지난 리메이크작들에서도 제인은 밝고 쾌활한 인물이 아니었으나, 이 영화에서 그녀는 유난히 병적으로 보인다. 정신적으로 병색이 짙게 형상화된 제인과 그녀와 좀 다른 의미, 다른 토대에서, 그러나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병을 앓고 있는 버사와의 대면을 이 영화는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
이미지는 유려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더라
오래전, 오슨 웰스가 로체스터로 출연한 <제인 에어>(로버트 스티븐슨)에서 버사 메이슨은 인간의 모습이기보다는 짐승의 형상에 가깝게 등장한다. 제인이 버사의 실체를 정식으로 대면하는 첫 순간, 그러니까 로체스터가 제인을 데리고 버사의 다락방으로 갔을 때, 우리는 그들이 버사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토록 경악하는지 알 수 없다. 영화는 다락방에서 새어나오는 버사의 웅얼거리는 음성을 들려주며 문에 비치는 그녀의 괴물 같은 그림자만을 보여준다. 목소리와 인간성을 거세당한 야만적이고 열등한, 그래서 위협적인 존재. 수십년 뒤, 샬롯 갱스부르가 제인으로 분한 <제인 에어>(프랑코 제페렐리)는 제인과 버사가 마주한 동일한 순간을 다르게 찍었다. 흰 가운을 입은 흑발의 버사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제인이 로체스터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데, 영화는 서로를 응시하는 두 여자 각각의 얼굴을 단독숏으로 오간다. 단지 공포감이라고도, 질투라고도 설명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묘한 동질감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시선이 오가는 그 짧은 순간은 이 영화에서 가장 긴장감이 팽팽한 장면이다. 더욱이 이 영화는 집에 불을 낸 버사가 자신을 구하러 계단 위로 올라온 남편을 텅 빈 표정으로 쳐다본 뒤, 바로 그 앞에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과정을 다 보여준다.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버사는 여전히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고 있지만, 어떤 감정을 표상하는지 알기 어려운 그녀의 시선, 서사상으로 잉여의 감정을 체현한 그녀의 표정이 이 영화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가 버사와 제인의 첫 만남을 형상화하는 것에 야심을 보이지 않은 건 의외이다. 여기서 버사는 단 한번 등장하며, 그녀의 응시는 서사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그저 거기 있는 것처럼,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게 상투적으로 지나간다. 이번 영화에서는 원작에 내재된 병적인 어둠을 제인이 고스란히 가져가기 때문에 그 어둠의 담당자였던 버사의 존재감이 그만큼 줄어든 것일까. 더이상 제인의 억압된 내면을 투영할 타자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제인의 내면의 요동이 타자를 경유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든 제인의 다채로워진 캐릭터로든) 외면화될수록 다락방에 갇힌 버사의 실체는 어쩐지 단순하고 시시해진다. 영화의 이런 선택은 원작 속 ‘제인 에어’의 강화이지, 그 ‘제인 에어’를 넘어서는 얼룩을 남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작품의 질을 떠나, 혹은 이 영화의 유려한 이미지들과 별개로, 이 영화가 <제인 에어>에 대한 충분히 ‘영화적인’ 리메이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제인 에어> 영화가 만들어졌어도, 아직도 버사 메이슨은 소설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