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진중권의 아이콘] 잃어버린,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시적 능력
2011-05-13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 정원교 (일러스트레이션)
미메시스와 존재론적 닮기

젊은 시절 칸딘스키는 모스크바 대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다가 결정적 체험을 한다. 새로운 관현악 속에서 “나는 정신 속에서 내가 가진 모든 색을 보았다. 바로 눈앞에서 광폭한 선들이 거의 광기에 가까운 드로잉을 이루었다.” 이렇게 음향에서 색채를 보는 능력을 ‘공감각’(synaesthesia)이라 부른다. 역시 공감각을 지녔던 파울 클레는 30년대에 화폭 위에 형과 색으로 푸가를 작곡(?)한 바 있다. 작곡가 스크랴빈은 <프로메테우스>의 총보 아래에 음향과 함께 투사되어야 할 빛들의 기호를 적어놓은 바 있다.

칸딘스키는 공감각에 기초하여 회화의 화성학을 만들려고 했다. “색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다. 색은 피아노의 건반이요, 눈은 줄을 때리는 망치요, 영혼은 여러 개의 선율을 가진 피아노다.” 그의 저서에는 심지어 색채가 미각으로 전이되는 예들도 언급되어 있다. “드레스덴의 한 의사의 보고에 따르면, 어느 환자는 일정한 소스에서 언제나 푸른 미각을 맛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색채와 후각에 관한 언급은 별로 없다. 그저 “우리는 ‘향기로운 색’이란 표현을 자주 접한다”는 전언뿐.

색채로 후각을 전달할 수 있을까? 회화로 직접 냄새를 묘사할 수는 없는 일이나 우회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철학하는 예술>에서 미국의 미학자 아서 단토는 회화로 냄새를 표현한 최초의 예들을 언급한다. 가령 르네상스 초기 조토의 그림 중에는 예수가 죽은 나자로를 되살리는 장면을 담은 게 있다. 성경에 따르면, 그때 예수에게 마르타가 이렇게 말한다. “주여, 그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지금쯤 그의 몸이 썩어 냄새가 날 것입니다.” 여기서 화가는 ‘불가능한 임무’(mission impossible)를 떠안게 된다.

조토는 이 과제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의 그림 속에서 한 여인은 코를 막고 서 있고, 또 다른 여인은 베일을 끌어올려 코와 입을 가리고 있다. 조토 외에도 이 시기에 냄새를 묘사한 이들은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각의 묘사는 사라진다. 가령 같은 장면을 묘사한 카라바조의 작품에선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다. 단토는 그 이유를 성서가 화가들에게 “덜 억압적으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노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후각의 배제는 문명화 과정에 따르는 일반적 현상이라고 한다.

후각적 공감각과 후각의 예술

하지만 조토의 그림은 아직 ‘공감각’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것은 그저 간접적 방식으로 냄새를 암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보다 냄새를 좀더 직접적으로 묘사할 수는 없을까? 청각적(auditory) 공감각의 예가 거기에 힌트가 될지 모르겠다. 가령 우리는 소리를 내는 회화의 탁월한 예를 알고 있다. 뭉크의 <절규>를 생각해보라. 그 그림을 보면 정말로 절망에 빠진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귀에 들리는 듯하다. 뭉크가 했던 방식으로 보는 이의 코에 냄새를 풍기는 그림은 없을까?

그런 후각적(olfactory) 공감각의 뛰어난 예를 아마도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발달한 무역과 더불어 일찍부터 자본주의적 소유욕을 긍정했던 네덜란드에서는 (부르주아의 ‘소유물’이 될 수 있는) 물건들을 그린 정물화가 유행했다. 그중에는 물론 굴, 장어, 오징어, 청어, 가오리, 고등어 등 생선을 그린 것도 있다. 광학적 정밀성에 가까운 놀라운 자연주의 덕분에, 그 그림들 속의 생선들은 촉촉한 광도를 통해 신선함을 뿜어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코끝에 싱싱한 생선 냄새를 떠올리게 만든다.

네덜란드의 정물화가들이 회화로 냄새까지 묘사할 의도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반면, 현대의 화가들은 회화를 시각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애 의식적으로 공감각을 추구한다. 가령 미래주의자들은 그림 안에 기계문명의 속도감은 물론이고, 대도시의 소음과 냄새까지 담으려 했다. 아일랜드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림 속에 촉각, 청각, 후각, 미각을 통합하려 했다.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를 쓸 때 그의 작품을 모델로 삼은 것은 그 때문이다. 전후 프랑스의 앵포르멜의 회화 역시 촉감(‘마티에르’) 외에 때로 후각적 느낌을 준다.

모든 예술은 시각, 청각, 아니면 시청각의 예술이다. 미각, 후각, 촉각의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시각이나 청각은 정신이나 영혼에 가까운 반면, 다른 감각들은 신체에 가깝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요리를 미각예술로, 직조술을 촉각예술로, 향수제조를 후각예술로 받아들이자는 엉뚱한 주장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제안은 미학계에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는 정말로 향수제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장인의 얘기가 나온다. 천부적인 후각을 갖고 태어난 그루누이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남녀간의 호오를 결정하는 데에서 실은 냄새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소설에 따르면 냄새의 천재인 주인공의 몸에서는 정작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기냄새’가 나지 않는 아기란 얼마나 끔찍한가. 그리하여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들에게 본능적 혐오감을 주게 된다. 그루누이 소년은 그렇게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이 외롭게 자라, 훗날 범죄적으로 천재적인 향수 제조자가 된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아마도 어린 그루누이가 ‘나무’라는 낱말의 뜻을 배우는 장면의 묘사이리라.

“등을 창고 벽에 기댄 채 장작더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그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는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않았다. 단지 아래로부터 퍼져 올라오다가 뚜껑에 덮인 것처럼 지붕 밑에 갇혀서 그를 감싸고 있는 나무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냄새를 들이마시고 그 냄새에 빠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땀구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나무 냄새로 가득 채운 그는 그 스스로가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된 것처럼 그 장작더미 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한참 뒤, 거의 30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나무’.”

영화로 후각의 효과를 내려면?

우리가 시각이나 청각을 통해 사물의 이름을 배운다면, 그루누이는 후각을 통해 사물의 이름을 배운다. 카멜레온이 자신의 몸 색깔을 주위환경에 완전히 동화시키듯이, 나무의 냄새를 맡는 동안에 그루누이는 스스로 나무인형이 된다. 스스로 나무가 되어버림으로써 그는 ‘나무’라는 낱말의 진정한 의미를 그 냄새의 현상학적 충만함 속에서 신체로 배운다. ‘그루누이의 피노키오-되기.’ 이 존재론적 닮기를 ‘미메시스’라 부른다. 미메시스는 문명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예민한 후각과 더불어 잃어버려야 했던 가장 중요한 원시적 능력이다.

영화 역시 시각과 청각의 예술이다. 하지만 영화도 종종 공감각을 사용한다. 물론 4D영화라는 이름으로 좌석을 흔들거나 객석에 연기를 분사하는 유치한 방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가령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 장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의 채찍질, 특히 <블랙 호크 다운>은 거의 ‘쇼크’에 가까운 강렬한 촉각적 효과를 주지 않던가. 이 ‘시청각의 촉각-되기’도 감각들 사이의 미메시스라 할 수 있다. 영화로 후각의 효과를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향수>를 영화화한 작품에서는 유감스럽게 냄새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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