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원본은 뭐고 복제는 뭔가요.
=저한테 그런 걸 물어보시면 어떡합니까. 저는 이탈리아에서 골동품 가게를 하는 프랑스 여자일 뿐이에요. 보드리야르와 같은 나라 출신이라고 그런 어려운 질문을 던지시면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엘르씨가 하도 줄리엣 비노쉬랑 닮으셔서 왠지 철학적인 질문도 잘 대답해주실 줄 알았어요. 원래 별거 아닌 질문에도 뭔가 철학적인 대답을 줄줄 쏟아내는 게 프랑스 전통이잖아요. 건더기가 있든 말든.
=어머나 세상에. 프랑스 스노비즘 무시하나요, 지금?
-그냥 개인적으로는 뭔가 똑 떨어지는 영국 철학자가 좋아서요.
=푸하. 영국. 그 청승맞은 섬나라에도 철학이란 게 있나요?
-하긴 그 동네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뉴턴 같은 과학자이긴 합니다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왜 프랑스는 입만 번지르르한 철학자나 예술가만 잔뜩이고 꼽을 만한 과학자는 드문지를 함께 고민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파스칼도 있고, 파스칼도 있고, 또 파스칼도 있고… 사실 18세기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고요. 프랑스가 계몽주의 사상을 낳지 않았다면 과학도 발전 못했을 겁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영국만큼은… 근데 이것 참 애초에 여쭤보려던 질문은 하나도 못하고 쓸모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네요 저희. 어쨌거나 참으로 줄리엣 비노쉬를 닮으셨습니다. 평소에 그런 이야기 자주 들으시죠? 줄리엣 비노쉬 복제품 같다고.
=줄리엣 비노쉬를 닮았다는 이유로 저를 복제품이라고 부르시는 건 정치적으로 불편하네요.
-그럼 엘르씨를 그냥 줄리엣 비노쉬라고 생각하고 인터뷰를 한번 해볼까요? 원본과 복제를 한번 탐구해보죠. 저는 레오스 카락스가 되겠습니다.
=풋. 그러시든가요. 그럼 갑니다. 레오. 당신이 <퐁네프의 연인들> 따위를 5년 동안이나 찍느라고 한창 젊고 잘나가던 내가 얼마나 많은 역할을 거부했는지 알아? 너 따위와 사랑만 안 했어도 내가 5년이나 참고 살진 않았을 거야.
-웃기고 있네. 줄리엣. 내가 당신을 <나쁜피>와 <퐁네프의 연인들>에 출연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잘나갔을 거 같아?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안드레이 줄랍스키 따위랑 싸구려 애정영화나 찍다가 10년 전쯤에 은퇴하고 브리지트 바르도 언니 옆에서 고양이 등이나 쓰다듬으면서 늙어버렸을걸.
=레오. 당신은 정말 구제불능이야. 20여년 만에 만나도 변한 게 없군. 통역도 안되고 카피도 안되고 리콜도 안되는 이 죽일 놈의 사랑… 아니,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