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최악이다. 매번 거기서 벗어나는 미션만 있다. <로열 패밀리> 9부에서 김인숙은 자신의 인생사를 이렇게 정의했다. 배우 염정아에게는 그런 김인숙이 연기인생의 정점에 가까운 미션이었을 것이다. 천사와 악마의 경계, 숨기고픈 과거와 질주하고픈 현실 사이의 괴리. 위험한 줄타기에 오른 염정아는 영화 한편이 담을 법한 기승전결을 매회에 드러냈고, 마지막에 이르러 온몸의 기를 쏟아부은 고공행진을 선보인 뒤 내려왔다. 심장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는 지난 두달의 기억과 마주했다.
-드라마 <워킹맘>이 2008년이었다. <전우치>(2009)에 잠깐 출연한 것을 제외하면 <로열 패밀리>는 3년 만의 작품이다.
=둘째 낳고, 계속 육아에만 힘썼다. 사실 그동안에는 작품을 하고픈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재미도 있었지만 엄마로서의 책임감 같은 거였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넘어가려고 했는데, 대본을 읽어보니 욕심이 나더라. 이런 인생을 살았던 여자가 나오는 드라마는 거의 없었으니까.
-막상 연기를 시작했을 때 후회하는 마음도 있지 않았나.
=부딪히니까 괜히 한 게 아닌가 싶더라. 성격이 한회에만 몇번씩 왔다갔다 하니까 감을 못 잡았다. 시청자는 내가 표현하는 걸 보고 그대로 받아들일 텐데, 도대체 어떤 게 맞고 틀린 건지 판단이 어렵더라. 매신 촬영할 때마다 감독님과 긴 회의를 해야 했다.
-자연인 염정아의 입장에서 김인숙은 어떤 여자였나.
=매력있는 여자인 건 맞는데, 솔직히 나는 별로…. (웃음) 나도 엄마다 보니 그럴 거다. 인숙이가 과거의 살인사건 때문에 아이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게 나로서는 납득이 안되더라. 작가들에게는 부담을 줄까봐 얘기를 안 했지만 감독님한테는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여러 번 물었다. 도대체 엄마가 자식을 죽이는 게 말이 되나. 정황상 죽인 건 아니지만 사실상 죽인 거나 다름없지. 그 순간에 아들을 외면한 거니까. 쉽게 공감하기가 어렵다 보니 연기하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말한 대로 김인숙은 한회에만도 수많은 성격을 오가는 여자다.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흐름을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천사일 때도 인숙이고, 나빠 보일 때도 인숙인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면 안되는 경계가 필요했다. 내가 그 중심을 어떻게 잡았는지는 설명을 못하겠다. 그런데 사람이 다 그런 게 아닐까 싶더라. 만나는 사람마다, 닥치는 상황마다 매번 다르지 않나.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모습이 김인숙에게는 조금 극대화된 상태로 나타나는 것 같았다.
-김인숙, 김마리보다 ‘K’란 별칭에 더 많은 애정이 생겼을 것 같다.
=돌아다닐 때마다 나를 보는 사람들이 다들 ‘케이다!’라고 그러는데 정말 신나더라. 최근에 <해피선데이-1박2일>을 촬영했는데, 강호동씨도 내내 “케이! 케이! 어이 김인숙씨!” 이러더라고. (웃음)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어느 순간 어디부터가 김인숙의 진심일까 의심스러웠다. 모든 게 그녀의 음모일 거라는 예상도 많았다.
=연기를 할 때는 모든 상황을 다 진심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인숙이 시청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도 그런 진심이 보여야 했다. 덕분에 많이 용서받은 캐릭터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울지 못하는 게 힘들더라. 조니가 죽기 전에는 우는 장면이 많았는데, 죽은 뒤부터는 지문에 ‘절대 눈물을 흘리면 안됨’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타당성이 있는 설정이다. 울 자격조차 없다는 거니까.
-한지훈(지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처음에는 뒤로 갈수록 명확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모호해진 게 있다. 시놉시스상에서는 상당히 위험한 감정선까지 가는 게 있었다. 정말 사랑하지만 절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처절한 사랑이랄까. 나로서도 그런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사건이 워낙 커지다 보니 조금만 보여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지훈을 사랑하는 남자로 생각하면서 연기했다.
-김인숙은 정가원 안에서 여러 미션을 돌파한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통쾌했던 부분이 있었다면.
=보는 사람과 똑같을 거다. 첫째 며느리의 무릎을 꿀릴 때, 다들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통쾌해하더라. 나도 그 장면을 찍을 때 느꼈다. (웃음) 그리고 공순호 회장한테 “이 정가원에서 가장 인간이 아닌 게 누군지 아세요?”라고 말할 때. 그동안 당했던 걸 한꺼번에 드러내는 장면이었지.
-방금 말한 그 장면은 14부였다. 권음미 작가 말로는 원래 10분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쓰면서도 걱정이 많았다고 하더라. 하지만 배우를 믿고 맡겼다고 했다.
=대본을 보는데, 장이 계속 넘어가기에 정말 놀랐다. (웃음) 진짜 부담스러운 장면이었다. 나는 NG를 내면 그 감정을 연결해서 다시 가는 걸 정말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래서 스스로 NG를 용서하지 못한다. 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건 당연하고, 그 장면의 모든 감정선을 다 숙지한 다음에 촬영했다. 무엇보다 김영애 선생님의 연기에 누를 끼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정말 많이 감탄했다. 나도 후배들하고 연기할 때, 잘 맞춰주려고 하지만 선생님은 내 앵글을 비추고 있을 때도, 똑같이 연기해주신다. 감정을 두번, 세번씩 잡는 게 정말 힘드실 텐데,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해주시더라. 나는 그런 건 잘 못하는 편이다. 촬영할 때만 제대로 하고, 맞춰줄 때는 그런 척하는 정도다.
-모든 촬영을 다 끝냈을 때는 기분이 어떻던가.
=시원하던데? 나는 할 때 열심히 해서 끝날 때 아쉽거나 한 게 별로 없다. (웃음) 물론 예전과는 다른 경험이기는 했다.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감정으로 몰아가는 연기는 안 해본 것 같다. 언제나 한번에 완전히 쏟아부어야 했다. 할 때마다 기가 빠지니까, 먹기도 엄청 먹었다. 한신 찍고 먹고, 다음 신 찍고 또 먹고.
-<여선생 vs 여제자> <내 생애 최악의 남자> 같은 코미디영화도 있었지만 역시 평범하지 않은 여성 캐릭터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장화, 홍련> 이전에도 못된 부잣집 딸을 자주 연기했다. 그때는 꼭 그런 역할만 들어왔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코미디 연기를 하거나 평범하게 나오는 게 나랑 잘 맞는 것 같고, 너무 재밌다.
-과거에 맡았던 악역은 당연히 조연이었다. 이제는 악역이 가장 매력적인 주연이 되는 시대라는 걸 <로열 패밀리>가 보여준 셈이다.
=세상이 바뀐 게 얼마나 다행인가. (웃음) 사람들이 이제는 가증을 못 견디는 것 같다. 나만 해도 귀여운 척하고 예쁜 척하는 게 싫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 1991년 작품이었다. 올해로 연기한 지 20년이 됐다. 그때 생각했던 20년 뒤의 모습이 있었을까.
=그때도 그런 생각을 안 했다. 살면서 거창하게 세우는 인생계획 같은 게 없다. 단기적인 계획은 세운다. 오늘은 어떻게 시작해서 뭘 하면서 보낼지, 꼼꼼히 짠다. 평소에 정리정돈도 잘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인생 전체의 계획은 그저 잘 살아야지, 행복해야지 하는 정도다. 작품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계획적이 되면 뭔가 기대를 하게 되고 만약 기대에 못 미치면 또 다른 노력을 하게 되는데 나는 그게 피곤하고 싫더라. 하고 싶어서 했으니 잘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다음에 잘하면 되고.
-다음 작품은 결정됐나.
=얘기 되는 게 있기는 할 텐데, 일단은 잠깐 쉬겠다고 했다. 아이 때문에 그랬다. 드라마를 촬영하는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봤다.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가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범죄의 재구성>의 구로동 샤론 스톤이 카메오로 나와도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화도 없고, 어떤 영화인지도 잘 모른다. 이제 애를 둘이나 낳아서 부담스러워서 그런지 연락을 안 하시네. (웃음)